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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98권, 영조 37년 7월 30일 병인 2번째기사 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황단에 나가다. 인현 왕후가 태어난 곳을 찾도록 하다

임금이 황단(皇壇)에 나아갔다.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태추문(泰秋門)을 경유하여 나아가 단소(壇所)에 봉심(奉審)하고, 황단의 수복(守僕) 황선(黃繕)을 소견하였으며, 군문(軍門)에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황선이란 자는 황조(皇朝)의 전당지부(錢塘知府) 황공(黃功)의 5세손이다. 임금이 요금문(耀金門)을 열고 여(輿)에서 내려 문지방을 넘은 지가 두 번이었는데,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성모(聖母)께서 일찍이 이곳을 두 번 넘으셨을 것이다."

하였다. 환궁할 때에 한천동(寒泉洞) 입암(立巖)여양 국구(驪陽國舅)가 살던 옛 터를 역림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趙榮進)에게 하교하기를,

"인현 성후(仁顯聖后)께서 탄강(誕降)한 유지(遺址)를 알아서 들이라."

하니, 조영진반송방(盤松坊) 입암의 밑이라고 앙대(仰對)하였다. 어가(御駕)가 한천동 입구에 임하니, 한성 우윤 이경호(李景祜)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길이 좁고 또 험준하니 만약 보여(步輿)로 나가시면 거의 다니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조영진은 또 아뢰기를,

"신이 다시 민범수(閔範洙)의 말을 듣건대, 성후(聖后)의 탄강(誕降)은 실로 거동(車洞)에 있었다고 하는데 또한 준신(準信)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어느 곳인가 상세히 알아보기를 기다린 뒤에 어가(御駕)로 왕림하여 보시는 것이 아마도 신중히 살피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한참 동안 연(輦)을 머물자 대소 여러 신하가 모두 험준하고 좁아서 나가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우러러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추모(追慕)하는 일로 왔는데 보지도 않고 돌아간다면 아들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보여(步輿)를 타고 나아가니, 여러 신하가 따르다가 간혹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임금이 입암(立巖)에 임하여 우의정 홍봉한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형국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참으로 사록(沙麓)183) 에 경사스러운 일이 모인 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환궁하니 밤이 거의 삼경이었다. 임금이 한천동에 비석을 세우라고 명하고 손수 비액(碑額)을 썼는데, ‘인현 성후 탄강 구기(仁顯聖后誕降舊基)’라 하고 ‘영모비(永慕碑)’라고 이름하였다. 이튿날 국구(國舅)의 집에서 저 지난 기유년184) 의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냈는데 곧 거동에 거주하였었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도승지가 잘못 알고서 여러 신하로 하여금 공연히 크게 피곤하게 하였다."

하고, 곧 거동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세워서 유지(遺址)를 표시(表示)하도록 명하고, 이어서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과 호조 판서 윤동도(尹東度)에게 명하여 살펴보고 형지(形址)를 그려서 올리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영진(趙榮進)은 성후(聖后)의 가까운 친속으로서 그가 예전의 일을 안다고 하면서 앞에서 난여(鑾輿)를 인도하였는데 이미 손위(遜位) 때 사제(私第)에 대해서 잘못 알았고, 재차 탄강(誕降)한 옛터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으니, 이때에 사람들이 그 주착(做錯)의 실수를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한 분노하여 꾸짖는 자가 많았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98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7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예술-미술(美術) / 주생활-택지(宅地)

  • [註 183]
    사록(沙麓) :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춘추 시대 때 이 토산이 무너지자 일관(日官)이 645년 뒤 성녀(聖女)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 예언과 같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후(后)인 원후(元后)가 이곳에서 태어나 645년 뒤인 해에 애제(哀帝)가 죽은 후 섭정(攝政)하였던 것임.
  • [註 184]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上詣皇壇。 先詣昌德宮, 展拜眞殿, 由泰秋門出, 奉審壇所, 召見皇壇守僕黃繕, 命軍門調用。 蓋黃繕者, 皇朝錢塘知府黃功之五世孫也。 上, 開耀金門, 降輿踰閾者再, 謂近侍曰: "聖母曾再踰此矣。" 回鑾時, 歷臨寒泉洞立巖驪陽國舅舊基。 初, 上下敎于都承旨趙榮進: "知入仁顯聖后誕降遺址。" 榮進盤松坊立巖之下仰對。 駕臨寒泉洞口, 漢城右尹李景祜請對而奏曰: "路狹且險, 若以步輿進則庶可行也。" 榮進又奏曰: "臣更聞閔範洙之言, 則聖后誕降, 實在車洞云, 而亦未準信。 更待詳知某處後, 御駕臨視, 恐合審愼之道。" 時, 上駐輦移時, 大小諸臣, 皆以險阨難進之意, 仰陳, 上曰: "予以追慕而來, 不見而還, 非子道也。" 乘步輿以進, 諸臣從之者, 或多顚仆。 上, 臨立巖, 顧謂右議政洪鳳漢曰: "形局不亦異乎?" 鳳漢曰: "眞沙麓鍾慶之地也。" 上還宮, 夜幾三鼓。 上命立碑於寒泉洞, 手書碑額曰, ‘仁顯聖后誕降舊基’, 名曰: ‘永慕碑’。 翌日考出國舅家二去己酉帳籍, 乃居車洞也。 上笑曰: "都承旨誤知, 而致使諸臣, 公然大憊矣。" 乃命立碑建閣于車洞, 以識遺址, 仍命禮曹判書李益炡, 戶曹判書尹東度, 看審圖形以進。

【史臣曰: "趙榮進以聖后近屬, 謂以知其故事, 先導鑾輿, 旣誤於遜位之私第, 再誤於誕降之舊基, 時人莫不笑其做錯之失, 而亦多憤罵者。"】


  • 【태백산사고본】 67책 98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7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예술-미술(美術) / 주생활-택지(宅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