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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5월 15일 계축 1번째기사 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왕세자의 관서 행차를 부추긴 자들의 처벌을 청하는 장령 윤재겸의 상서

장령 윤재겸(尹在謙)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대신은 초방(椒房)118) 의 지친[肺腑]으로서 대조(大朝)의 신임하는 중임을 맡았으면서도 이렇게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한마디도 바로잡아 구제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간혹 국사를 말한 자를 망령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대신에게 바라는 바의 일이겠습니까?

아! 관서로 행차한 한 가지 일은 이미 국자 장(國子長)119) 의 글에서 모두 밝혀졌는데, 그때 저하께서 오랫동안 세자궁[震宮]을 떠나 있었음은 바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바인데도, 약원에서의 진후(診候)와 승정원[喉院]에서의 출납과 대신(臺臣)의 논달(論達)은 그전대로 거행하였습니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게 되자 대조(大朝)께서 승선(承宣)에게 성균관의 유생을 거느리고 입대하도록 명하여 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승지인 이영휘(李永暉)가 도리어 구윤옥(具允鈺)의 서본(書本)을 고치거나 바꾼 간사한 습관을 답습하였으니, 그의 간사하게 가리고 막은 죄를 추궁하면 대체로 구윤옥이 나쁜 전례를 처음으로 만든 데에서부터이니, 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한결같이 모두 크게 불경한 형률로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환관[閹竪]이 대내에 있으면서 대신 정무를 맡아서 정령(政令)을 수응(酬應)하고 동정(動靜)하는 때에 곁에서 모시면서 종용하며 아첨한 자에 이르러서는 죄악이 크고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천지[覆載] 사이에서 용납하기 어려우니, 그도 즉시 엄중한 주벌(誅罰)을 쾌하게 시행하소서. 그리고 기전(畿甸)양서(兩西)120) 와 삼도(三道)의 도신 및 송도(松都)의 수신은 곤외(閫外)를 지키는 그 직임이 자별하니, 오직 융성한 의식으로 경상(境上)에서 영접하고 전송하여 학가(鶴駕)121) 의 위엄을 갖추도록 해야 마땅한데도 심상하게 응접(應接)하기를 마치 관례를 따라 닥치는 사신을 공봉(供奉)하듯이 하였으니, 특별히 엄중한 주벌을 더하게 하소서.

그리고 춘방의 요속(僚屬)은 다른 신료와 다른 점이 있으니 당연히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울먹이든지122) 말고삐를 부여잡고 간(諫)해야 하며123) , 간하여도 들어주지 않을 경우 모시고 따르겠다는 것을 청했어야 옳은데, 직숙하는 곳에서 누워 쉬면서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였으니, 신은 저하께서 대궐을 떠났을 때에 입직(入直)했던 궁관(宮官)에게는 불충(不忠)한 죄로써 처벌을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을 책망하는 글을 급히 내려 팔도에 사죄하고 인심(人心)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것은 유념(留念)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법제(法制)

  • [註 118]
    초방(椒房) : 후비(后妃)를 가리킴.
  • [註 119]
    국자 장(國子長) : 국자감의 장관. 곧 성균관 대사성.
  • [註 120]
    양서(兩西) : 해서(海西)와 관서(關西).
  • [註 121]
    학가(鶴駕) : 왕세자의 행차를 이르는 말.
  • [註 122]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울먹이든지 : 이는 위(魏)나라 문제(文帝) 때 시중(侍中) 신비(辛毗)가 기주(冀州)의 사졸가(士卒家) 10만 호(戶)를 하남(河南)으로 옮기려는 문제의 결정에 대하여 불가함을 들어 그릇됨을 간하였으나, 문제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하므로, 신비가 따라가서 옷자락을 끌어 당기면서 버티고 직간하여 결국 절반만 옮겼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한 것으로, 임금이 물리쳐도 끝까지 버티고 간언하는 것을 말함.
  • [註 123]
    말고삐를 부여잡고 간(諫)해야 하며 : 이는 은(殷)나라 제후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칠 때 말고삐를 부여잡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무왕이 이미 천하를 손안에 넣자 백이·숙제는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서 채미(採薇)하며 숨어 살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임.

○癸丑/掌令尹在謙上書, 略曰:

"今日在庭之大臣, 以椒房肺腑之親, 受大朝股肱之任, 則當此國勢岌嶪之日, 未聞有一言之匡救, 反或以言者爲妄, 是豈所望於大臣者哉? 噫! 西行一事, 已悉於國子長書, 伊時邸下, 久離震宮, 是國人之所共知, 而藥院之診候, 喉院之出納, 臺臣之論達, 依舊擧行。 太學之陳書也, 大朝命承宣率館儒入對承答。 而其時承旨李永暉, 反襲具允鈺改易書本之侫習, 究厥奸侫壅蔽之罪, 則蓋自允鈺作俑, 而實爲亡國之兆。 臣謂一幷重繩, 以大不敬之律。 至於閹竪之在內替當, 而酬應政令, 動靜侍側, 而慫慂諂諛者, 罪大惡極, 覆載難容, 亦卽夬施嚴誅焉。 若夫畿甸兩西三道之臣, 及松都守臣, 守閫在外, 職任自別, 則惟當盛禮迎送於境上, 以備鶴駕之威儀, 而尋常接應, 有若循例使客供奉者然, 特加嚴誅。 春坊僚屬, 與他臣僚有異, 當牽裾而泣, 叩馬而諫, 諫若不聽, 則請以陪從可也, 偃息直次, 佯若不知, 臣謂邸下離次時, 入直宮官, 施以不忠之罪。 急下責己之書, 以謝八路, 以鎭人心。" 王世子答曰: "所陳留念。"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