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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5월 8일 병오 3번째기사 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유신 김종정 등이 왕세자에게 관서 행차의 잘못과 빈대·진현 등을 권하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좌정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령하기를,

"내가 이미 뉘우치고 깨달았으니, 뉘우치고 깨닫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런데 서명응(徐命膺)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하고서 또 어찌하여 글을 올렸는가?"

하였는데, 우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서명응의 글은 참으로 지나쳤습니다. 신이 대신으로 욕되게 있으면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저하의 심사(心事)를 알도록 하지 못한 신의 죄 만번 죽어야 합니다."

하였으며, 유신(儒臣) 김종정(金鍾正)·이석재(李碩載)·김노진(金魯鎭)과 헌신(憲臣) 이진형(李鎭衡)이 소조(小朝)에 구대(求對)하였다. 김 종정이 말하기를,

"지난 역사를 낱낱이 관찰하여 보면 인군(人君)의 미행(微行)은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였었는데, 더구나 왕세자의 지위[儲位]에 있으면서 이러한 거조가 있게 된 데에 이르렀다는 것은 더욱 역사 책에도 없는 바입니다. 저하께서는 열성조(列聖朝)의 태평 성대를 계승한 나머지 마음대로 욕심나는 대로 드나들면서 실컷 놀기를 어찌 갑작스럽게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입니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의 거취(去就)와 향배(向背)의 기틀은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지금 다행스럽게 예지(睿旨)가 지극히 간절하게 깊이 뉘우치고 깨달으면서도 오히려 철저하고 통쾌하게 할 수 없으니, 군정(群情)이 어찌 마음속으로 뉘우쳤다고 믿겠습니까? 빨리 자신을 책망하는 영(令)을 내려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확실히 뉘우치고 깨달은 뜻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말은 옳다. 즉석에서 영(令)을 내린다 하더라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다만 여기에는 고집하는 것이 있으니, 한갓 말로서만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면 한갓 형식적인 데로 돌아갈 것이기에, 성실한 마음으로 고치려고 한다."

하자, 김종정이 말하기를,

"현 사대부(賢士大夫)는 날마다 소원(疏遠)해지고 좌우의 근신[近習]은 날마다 친근해지며 무뢰(無賴)한 부류들이 종용하고 말을 꾸며 이끌어서 지난날의 사건이 있도록 하였으니, 이런 등의 부류들은 의당 엄중히 배척을 더하여 뒷날의 폐단을 영원히 끊어버리소서. 지금부터 이 뒤로는 법가(法家)의 보필하는 인사(人士)를 조석(朝夕)으로 가까이하여 충성스런 말과 곧은 논의는 마음을 비우고 강연(講筵)에서 받아들이며, 지극한 뜻으로 빈대(賓對)에서 탐구하고 토론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물으며, 놀기를 좋아하고 게으르거나 오만한 행동으로 고혹(蠱惑)되는 바가 없도록 하고, 드나들며 실컷 노는 것에 마음이 끌리거나 동요되는 바가 없도록 해서 재물과 여색 좋아하는 것을 의리(義理)로써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바꾸며, 형벌하고 죽이는 누(累)를 천지(天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옮기도록 하여, 일마다 곳마다 통렬하게 사욕(私欲)을 이겨내고 사념(私念)을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요즈음 소대(召對)에서 발문(發問)한 바가 많았던 것 또한 잘못을 뉘우치는 하나의 단서이다."

하자, 김종정이 말하기를,

"며칠 전 열 세 사람의 비국 당상이 등대(登對)하였을 때는 잘못된 일이 있었던 초기였는데, 서로 돌아다보며 잠자코 있었으니, 그래도 조정에 인물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리고 삼도(三道)의 도신(道臣)·수신(帥臣)과 구경(舊京)113) 에 머물고 있는 신하들은 옛 사람의 단앙(斷鞅)의 의리114) 는 본받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는 척 모르는 척하는 사이에다 방치해 두고서 구차스럽게 임시 방편으로 둘러대고 모호(模糊)하게 받들었으니, 〈신하로서의〉 분수와 의리는 땅을 쓸어버린 듯합니다."

하니, 춘방(春坊) 이진형은 말하기를,

"이번 사건은 신이 차라리 죽어버려 몰랐으면 하는 심정이니, 지금으로서 편안하게 진정시키는 방법은 오직 뉘우치고 깨달음을 환하게 보이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저하(邸下)께서 결단코 스스로 법도가 아닌 데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임을 본래부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근신[近習]과 무뢰배(無賴輩)로서 종용하여 인도한 자를 가려 유사(有司)에게 회부해서 그 죄를 바로잡도록 하고, 그 사이에 대소(大小)의 공사(公事)를 대신 집행하면서 달하(達下)한 자가 누구입니까? 청컨대 가려서 왕옥(王獄)에 회부하여 전형(典刑)을 명백히 밝히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관서(關西)로 행차할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통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혹시 나를 모를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자, 이진형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저하께서 잡희(雜戱)로 날을 보냈다고 하는데, 학문을 강론하고 정무를 부지런히 하는 외에 어떻게 다른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활쏘고 말을 달리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그것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한 사람 병사의 능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고, 김종정은 말하기를,

"대조(大朝)의 하교를 우러러 체득하여 강연(講筵)을 부지런히 열고 빈대(賓對)를 자주 행한 뒤에 예후(睿候)가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고 여겨질 경우 진현(進見)하는 예(禮)를 차례대로 거행한다면, 어찌 청(請)을 얻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가납(嘉納)하겠다."

하였다. 처음에 김종정이 맨 먼저 구대(求對)하는 논의를 발설하였으나 빈객(賓客) 윤급(尹汲) 및 여러 사람들과 끝까지 의사가 귀일(歸一)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종정이 다만 관료(館僚)와 헌신(憲臣)과 입대(入對)하여 의견을 충분히 말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註 113]
    구경(舊京) : 개성(開城)을 가리킴.
  • [註 114]
    단앙(斷鞅)의 의리 : 춘추 시대(春秋時代) 때 진(秦)나라에서 제(齊)나라에 쳐들어오자 제나라 임금이 두려워하여 달아나려 하니 태자와 곽영(郭榮)이 말고삐를 잡고 만류하였는데, 그래도 임금이 달아나려 하자 태자가 칼을 뽑아 말의 가슴걸이[鞅]를 끊어 이를 저지시킨 고사임.

○王世子坐德成閤, 藥房入診。 令曰: "余旣悔悟, 則悔悟誠易事也。 徐命膺不知余心, 又何陳書?" 右議政洪鳳漢曰: "命膺之書, 誠過矣。 臣忝在大臣, 不能使諸臣, 知邸下心事, 臣罪萬死。" 儒臣金鍾正李碩載金魯鎭, 憲臣李鎭衡, 求對于小朝。 金鍾正曰: "歷觀前史, 人君之微行, 皆是亡國, 而況在儲位, 至有此擧, 尤是史牒所無。 邸下承列朝昇平之餘, 循情縱慾, 出入遊衍, 何遽至於此? 而不知天命人心去就向背之幾, 大有可畏? 今幸睿旨懇惻, 深有悔悟, 猶不能澈底痛快, 群情豈信其悔於心乎? 亟下罪己之令, 使臣民曉然知翻然悔悟之意焉。" 令曰: "言則是矣。 卽席下令, 亦有何難? 而第於此亦有固執, 徒以言語而不以實, 則徒歸文具, 欲以實心改之矣。" 鍾正曰: "賢士大夫, 日遠日踈, 左右近習, 日親日近, 無賴之類, 慫慂導諛, 致有向來之擧, 此等之流, 宜加嚴斥, 永絶後弊。 自今以後, 法家拂士, 朝夕親近, 忠言讜論, 虛心開納於講筵, 極意探討於賓對, 實心諮訪, 無爲盤樂怠傲所蠱惑, 無爲出入遊衍所牽動, 貨色之好, 易之以義理之悅心, 刑殺之累, 移之以天地之好生, 隨事隨處, 痛加克治。" 令曰: "近來召對, 多所發問, 此亦悔過之一端也。" 鍾正曰: "日前十三備堂登對, 在過擧之初, 而相顧含默, 尙可謂朝廷有人乎? 三道道帥臣, 舊京居留之臣, 不能效古人斷鞅之義, 置之於知與不知之間, 苟且彌縫, 糢糊承奉, 分義掃地。" 春坊李鎭衡曰: "今番事, 臣寧欲溘然無知, 卽今鎭安之道, 惟在洞示悔悟, 使知不復爲此矣。 固知邸下, 決不自陷於非度。 而近習無賴之慫慂而導之者, 出付有司, 以正其罪, 其間大小公事之替行達下者誰也? 請出付王獄, 明正典刑。" 令曰: "西行時不知民心之至愚而神, 意或不知余。" 鎭衡曰: "臣聞邸下, 以雜戲度日, 講學勤政外, 豈有他事? 至於弓馬, 雖令入神, 不過一卒之能也。" 鍾正曰: "仰體大朝之敎, 勤開講筵, 頻行賓對, 後以爲睿候今已差復, 而進見之禮, 次第擧行, 豈有不得請之理哉?" 下令嘉納。 初金鍾正首發求對之論, 賓客尹汲及諸人, 終未歸一, 至是鍾正只與館僚憲臣, 入對極言之。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5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