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3월 4일 계묘 3번째기사
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좌의정 이후의 졸기
좌의정 이후(李)가 졸(卒)하였다. 이후의 자(字)는 후옥(厚玉)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음관(蔭官)으로 진출하여 목사(牧使)가 되었으며 태학사(太學士) 조관빈(趙觀彬)에게 종유(從遊)하였었는데, 조관빈이 큰 그릇으로 여겼으며 〈조관빈이〉 고시(考試)를 주장함에 이르러 이후가 과거에 합격하였다. 고 상신 신만(申晩)과는 친하게 지냈는데, 신만이 이조 판서가 되자 이후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추천하였고, 이후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통현(通顯)058) 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병조 판서에서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역신(逆臣) 김상로(金尙魯)가 그를 극력 추천한 것이었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우의정이 되었으나 이후가 평소 홍봉한(洪鳳漢)이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에 수찬 이형규(李亨逵)가 이후를 탄핵하며 개정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형규를 바다 가운데로 귀양보냈다. 이후가 병으로 졸하니, 나이 68세였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9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58]통현(通顯) : 지위와 명망이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