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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 1월 5일 을사 3번째기사 1761년 청 건륭(乾隆) 26년

영중추부사 이천보의 졸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천보(李天輔)가 졸(卒)하였는데, 그의 유소(遺疏)에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지금의 한없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성궁(聖躬)을 보전하고 아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간혹 갑자기 발하게 되면 그 중정(中正)한 도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기혈(氣血)이 손상될 우려가 있으며, 시행과 조치가 간혹 격렬하거나 번뇌를 이루게 되면 교령(敎令)에 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소모되고 허물어지는 근심이 있게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중화(中和)하는 도리를 더욱 힘쓰시어 강녕(康寧)하는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하소서."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천보(李天輔)의 자(字)는 의숙(宜叔)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젊어서는 사장(詞章)을 익혔는데,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이 그의 시가(詩歌)를 보고서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였었다. 영종(英宗)기미년016) 에 을과(乙科)에 합격하였으며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한 세대에서 명망이 높아 이조 참의와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일찍이 상소하여 조정(調停)을 넓히도록 청하니 영종이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에 대신(大臣)인 김재로(金在魯)·조현명(趙顯命)이 번갈아가며 말로 추천하자 바로 발탁하여 이조 참판 겸 예문관 제학을 삼았고, 얼마 있다가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또 이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다가 의정부에 들어가 우의정이 되었는데, 당시 나이 52세였고, 얼마되지 않아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처음에 홍계희(洪啓禧)가 균역(均役)에 대한 일을 건의하니, 임금이 이천보에게 명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홍계희와 균역에 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이천보가 끝까지 명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존중(李存中)김상로(金尙魯) 형제를 발탁하였다가 처벌을 받아 배척되고 기용되지 않았는데,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존중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바로 추천하여 승문원 부제조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홍봉한(洪鳳漢)은 지위가 높아 조정에서 위세를 떨쳤으므로 여러 대신(大臣)들이 함께 올리려고 하였는데 유독 이천보만은 불가하게 여겼으며, 임금이 복상(卜相)017) 하도록 명하였으나 이천보가 끝내 홍봉한을 복상하지 않았다.

이천보가 물러나 육화정(六化亭)에서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64세였다. 벼슬살이하면서 조심하고 조촐하였는데, 그가 졸(卒)함에 이르러서는 염습(斂襲)할 한 가지 의복도 없었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그의 청렴했음을 칭찬하였다. 하지만 공명(功名)을 차지하기에 급하여 상소하여 조정(調停)을 주청하였고, 조현명(趙顯命)에게 아부하여 크게 추켜 세워 추천해 줌을 얻어 마침내는 의정부의 정승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임금이 은졸(隱卒)018) 하는 전교(傳敎)를 내리어 해당 관서로 하여금 구재(柩材)를 가려서 보내도록 하고 모든 일은 다른 대신(大臣)의 예(例)에 의거 거행하게 하였으며, 인해서 3년 동안 월봉(月俸)을 지급하게 하고 승지로 하여금 치조(致弔)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6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

  • [註 016]
    기미년 : 1739 영조 15년.
  • [註 017]
    복상(卜相) : 정승(政丞)이 될 사람을 가려 뽑음. 정승은 국가의 중임(重任)을 맡은 사람이므로, 옛날에는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의 길흉(吉凶)을 점쳐서 뽑았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였음.
  • [註 018]
    은졸(隱卒) : 사망한 신하에 대하여 임금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일.

○領府事李天輔卒。 其遺疏略曰:

"顧今悠悠萬事, 莫如保嗇聖躬。 喜怒或有暴發, 則非但失其中正, 氣血有損傷之慮, 施措或致激惱, 則非但有害於敎令, 神精有耗敗之患。 伏願益懋中和之道, 克享康寧之休焉。"

謹按天輔宜叔, 延安人也。 少治詞章, 金文康昌翕, 見其歌詩, 稱引甚盛。 英宗己未, 中乙科, 入弘文館爲正字, 名重一世, 爲吏曹參議, 承文院副提調。 嘗上疏請廣調停, 英宗大喜, 於是大臣金在魯趙顯命, 交口薦之, 乃擢爲吏曹參判兼藝文提學, 已而超拜兵曹判書, 改吏曹, 入議政府爲右議政, 時年五十二, 未幾陞領議政。 初, 洪啓禧建均役議, 上, 命天輔直備邊司, 與啓禧議均役事, 天輔竟不應命。 李存中尙魯兄弟, 坐斥不用, 天輔曰, ‘李存中豈可棄乎?’ 乃擧爲承文副提調。 洪鳳漢貴震朝廷, 諸大臣欲與同升, 獨天輔以爲不可, 上, 命卜相, 天輔終不卜鳳漢天輔退居六化亭, 以疾卒, 年六十四。 居官謹潔, 及旣卒, 斂無一衣, 士大夫皆稱其廉。 而急於功名, 疏請調停, 附於趙顯命, 大得吹噓, 卒登台府, 時人以此短之。 上, 下隱卒傳敎, 令該署擇送柩材, 凡事依他大臣例擧行, 仍給三年月俸, 令承旨致弔。


  • 【태백산사고본】 67책 9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6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