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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96권, 영조 36년 12월 7일 정축 5번째기사 1760년 청 건륭(乾隆) 25년

경현당에서 대사성에게 장의와 색장을 거느리고 오게 하고, 서명응 등과 강토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대사성에게 명하여 장의(掌議)와 색장(色掌)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유생은 누구인가?"

하니, 대사성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김영(金寧)인데, 바로 송명흠(宋明欽)의 제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춘(同春)232)양정재(養正齋) 편액(扁額)을 썼고, 너희 스승의 이름도 들었다. 예전에 송(宋)나라 신종(神宗)사마광(司馬光)의 말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광이 오지 아니하였는데, 내가 비록 정성이 없을지라도 늙은 나이에 세 번 강(講)하는 뜻을 체득하여 빨리 올라오기를 너의 스승으로 하여금 알게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문의(文義)를 끄집어내어 여러 유생들에게 물어 보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학문은 귀함이 이치를 밝히는 데 있다. 옛 사람의 말에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오늘 대사성에게 명하여 너희 들과 더불어 경(經)을 가지고 전석(前席)에서 어려운 곳을 밝혀 내게 하였는데, 대저 이 강설(講說)을 듣고서 나의 박한 덕을 돕게 하려는 것이니, 또한 어찌 국조(國朝)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조명정이, ‘은밀한 것에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莫顯乎隱]’라는 뜻을 유한경(兪漢敬)에게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의 한 마음이 비록 한 몸 가운데 간직하였으나 이치[理]의 지극히 드러난 것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또 네가 바야흐로 이 자리에 들어올 적에 한 생각의 발함이 혹시 조경(躁競)·부효(浮囂)한 뜻이 있었으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네가 스스로 알 것인데, 하물며 기상(氣像)에 나타난 것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는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황순(黃栒)이 군자중용장(君子中庸章)을 강(講)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으로부터 소인(小人)까지 말하였는데, 중간에 어찌하여 일체 현인(賢人)이 빠졌는가?"

하니, 황순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각 그 극(極)을 들어서 그 중간의 허다한 사람을 포괄(包括)한 것이다. 소인(小人)은 어찌하여 중용(中庸)에 반(反)하는가?"

하니, 황순이 말하기를,

"정욕(情慾)이 이성(理性)을 이겨서 그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중용을 말할 수 있다. 이 장(章)은 《대학(大學)》의 전(傳) 1장(章)과 같고, 앞의 1장은 《대학》의 경(經) 1장과 같으니, 알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중관(中官)이 임금 앞에 책을 올리니, 임금이 높은 소리로 몇 차례 꾸짖고 인하여 이르기를,

"예전에 장사숙(張思叔)233) 이 종[僕夫]을 욕설하며 꾸짖으니,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지 아니하는가?’ 하였기에 당시에 마음에 두고 잊지 아니하였다. 아까 중관이 잘못 서권(書卷)을 취한 것에 대하여 어찌 족히 사기(辭氣)를 쓸 것이 되겠는가마는 스스로 소리가 높아짐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하였다. 인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이 혁폐(革弊)를 논한 글이 심히 통쾌하여 제갈 양(諸葛亮)의 기상(氣像)을 그려 내었다."

하였다.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신이 ‘희(羲)·화(和)234) 에 명하였다.’는 일절(一節)에 대하여 그윽이 크게 의심스러움이 있었던 것은, ‘요(堯)임금 때의 ·가 어찌 후세의 역관(曆官)에게 미치지 못하여 동서(東西)로 분주하고 남북(南北)으로 달리면서 이처럼 크게 수고로이 하였겠는가?’ 함이었는데, 《황명역법(皇明曆法)》을 상고한 뒤에 이르러 비로소 밤낮의 길고 짧음은 남북으로써 차(差)가 있고, 절기(節氣)의 이르고 늦음은 동서로써 차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신이 이에 ·를 나누어 명한 것이 곧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야(晝夜)와 절기의 차이를 자세히 진달하라."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북극(北極)이 땅에 나온 것이 매양 2백 50리(里)마다 1도(度)의 차(差)가 있는데, 밤낮의 차가 이로 말미암아 생깁니다. 우리 나라 서울은 북극이 땅에서 38도가 나왔으니 서울 이북으로부터 매양 2백 50리마다 1도를 더하여 삼수(三水)·갑산(甲山) 땅에 이르면 북극이 땅에 나온 것이 꼭 40도가 되는데, 이 땅의 하지(夏至)에는 낮이 가장 길어서 60각(刻)이 되며, 서울 이남에서부터 매양 2백 50리마다 1도를 감하여 강진(康津)·해남(海南) 땅에 이르면 북극이 땅에 나온 것이 30도가 되는데, 이 땅에 하지의 낮이 가장 길어서 45각이 됩니다. 동서 절기(節氣)의 이르고 늦음은 역시 4분(分)으로써 번갈아 서로 가(加)하고 감(減)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역서(曆書)는 서울 3백 리 안에서만 쓸 수 있고 그 밖에는 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에서는 대통역법(大統曆法)을 쓰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본래 대통역법을 썼었는데 숭정(崇禎)235) 연간에 이르러 내각 학사(內閣學士) 서광계(徐光啓)가 새로운 법으로 수정(修正)하여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역서(歷書)에도 주(州)마다 그 주야와 절기를 반드시 나누지 아니하였으면 우리 나라도 어찌 주마다 측험(測驗)할 필요가 있는가?"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중국은 13성(省)으로 주야와 절기를 나누었으니, 우리 나라도 마땅히 8도(道)로써 주야와 절기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심이지(沈履之)가 말하기를,

"신은 사람을 쓰는 방도를 강(講)하였으니, 마땅히 사람을 쓰는 의(義)를 진달하겠습니다."

하자,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은 구구(區區)한 법제(法制)236) 의 말단(末端)으로써 문의(文義)를 부연(敷衍)해 진달하였는데, 이제 상번(上番)이 사람을 쓰는 말을 진달하여 유신(儒臣)의 체통을 깊이 얻었으니, 신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보통 사람의 심정은 다른 사람의 말함이 자기의 말보다 나은 것을 들으면 칭찬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보다 낫다고 말하지 아니하는데, 부제학은 그렇지 아니하다."

하였다. 임금이 심이지에게 묻기를,

"세손(世孫)의 강학(講學)이 많이 진보한 보람이 있는가?"

하니, 심이지가 말하기를,

"신이 ‘인(仁)’자를 물으니, 각하(閣下)가 말하기를,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아름답게 하는 이는 인이 적다.[巧言令色鮮矣仁]」고 하였으니, 그러면 교묘한 말과 아름다운 얼굴빛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인(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인한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한 자는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智者樂水]’는 뜻을 물으니, 답하기를, ‘인지(仁智)란 것은 덕성(德性)이고 동정(動靜)이란 것은 체단(體段)이며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효험(效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문의는 비록 노사 숙유(老師宿儒)라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손이 이미 문구(文彀)에 들어갔으니, 이는 모두 박성원(朴聖源)의 공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산림(山林)의 사람으로는 송명흠(宋明欽)과 같은 이를 강관(講官)으로 삼으면 반드시 유익할 것이다."

하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림의 선비를 청선(淸選)의 직으로 처우하기 때문에 사양하여 이르지 아니합니다. 만약 위종사(衛從司) 등 음관(蔭官)으로 처우하면 어찌 오지 아니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심이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합니다. 비록 음관으로 처우한다 해도 오지 않는다면 어찌 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성상께서 지성으로 불러 오게 하시는 뜻이 있는 까닭에 감동하는 자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계방(桂坊)237) 에 문식(文識)이 있는 사람이 많았는데, 윤봉오(尹鳳五)도 그때 계방의 관리였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서명응은 당시에 이른바 문학의 선비인데, 전석(前席)에서 강토(講討)한 것이 하나는, 동북해(東北海)에 조수(潮水)가 없다는 말이고, 하나는 역법(曆法)의 그릇됨을 논한 것이니, 이것이 과연 국가의 계책에 긴요한 임무와 성학(聖學)의 요도(要道)에 도움이 있겠는가? 한갓 장구(章句)의 학(學)으로 스스로 박흡(博洽)한 변론을 자랑하였으니 그의 본래 실득(實得)의 공부가 없음을 볼 수 있는데 또한 족히 유용한 재목이 되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과학-역법(曆法) / 역사-편사(編史)

  • [註 232]
    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
  • [註 233]
    장사숙(張思叔) : 사숙은 정이(程頤)의 문인 장역(張繹)의 자(字).
  • [註 234]
    희(羲)·화(和) : 요(堯)임금 때 천문(天文)과 역상(曆象)을 맡았던 희씨(羲氏)·화씨(和氏) 두 신하.
  • [註 235]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 [註 236]
    법제(法制) : 역법.
  • [註 237]
    계방(桂坊) :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上御景賢堂, 命大司成率掌議色掌入侍。 上曰: "諸生誰某?" 大司成趙明鼎曰: "金寧, 卽宋明欽之弟子也。" 上曰: "同春養正齋額, 汝師之名, 亦聞之矣。 昔 神宗, 不答司馬光之言, 故不來, 予雖無誠, 須體暮年三講之意, 從速上來, 宜使汝師知之。" 上命大司成, 拈出文義, 問諸生, 上曰: "聖賢之學, 貴在明理。 古人云‘三人行, 必有我師。’ 今日命大司成, 與汝等執經發難於前席, 蓋欲聽此講說, 以補予之涼德, 而亦豈非國朝盛事耶?" 趙明鼎問莫顯乎隱于兪漢敬, 不能對。 上曰: "人之一心, 雖藏於一身之中, 理之至著者孰大乎? 此且汝方入于此席也, 一念之發, 或有躁競浮囂底意, 則不待他人, 汝固自知, 況其見於氣像者, 亦豈無知之者乎?" 黃栒講君子中庸章, 上曰: "自聖人至小人, 而中間, 何爲漏却一切賢人耶?" 不能對。 上曰: "各擧其極, 以包其中之許多人也。 小人何爲反《中庸》乎?" 曰: "情慾勝而然矣。" 上曰: "至此而後, 始言《中庸》。 此章猶《大學》之傳一章, 前一章, 猶《大學》之經一章, 不可不知也。" 時有中官, 進書卷於上前, 上高聲數轉, 仍曰: "昔張思叔, 詬罵僕夫, 程子以爲, ‘何不動心忍性?’ 當時存心不忘。 而俄者中官誤取書卷, 何足費辭氣者, 而予自不覺聲音之高, 動心忍性, 不亦難乎?" 仍命儒臣, 講《聖學輯要》。 上曰: "先正之論革弊文字, 甚痛快, 寫出諸葛亮氣像矣。" 副提學徐命膺曰: "臣於命一節, 竊有大疑者, , 豈不及於後世曆官, 而東西奔走, 南北驅馳, 若是太勞? 及考《皇明曆法》而後, 始知晝夜長短, 以南北而差, 節氣早晩, 以東西而差。 臣於是, 益信分命, 乃是必不可已之事也。" 上曰: "晝夜節氣之差, 試詳陳之。" 命膺曰: "北極出地, 每二百五十里差一度, 而晝夜之差, 由是生焉。 我國京城, 北極出地三十八度, 則自京城以北, 每二百五十里加一度, 以至之地, 則北極出地, 恰爲四十度, 此地之夏至, 晝極長, 爲六十刻, 自京城以南, 每二百五十里減一度, 以至於康津海南之地, 則北極出地, 爲三十度, 此地夏至之晝極長, 爲四十五刻。 東西節氣早晩, 亦以四分, 遞相加減, 故我國曆書, 可用於京城三百里內, 其外不可用矣。" 上曰: "皇不用《大統曆法》耶?" 命膺曰: "皇本用《大統曆法》, 而至崇禎年間, 內閣學士徐光啓, 修正新法, 將欲施行而未果矣。" 上曰: "中國曆書, 亦不必每州分其晝夜節氣, 則我國亦豈可測驗於每州乎?" 命膺曰: "中國以十三省, 分晝夜節氣, 我國亦當以八道分晝夜節氣矣。" 侍讀官沈履之曰: "臣則講用人之道, 當陳用人之義矣。" 命膺曰: "臣以區區法制之末, 敷陳文義, 今上番陳用人之說, 深得儒臣之體, 臣不勝愧恥。" 上曰: "常人之情, 則聞人言之勝於己言, 則非徒不爲之稱譽, 亦未嘗言其勝己, 而副學則不然矣。" 上問沈履之曰: "世孫講學, 有長進之效否?" 履之曰: "臣問仁字, 閣下曰: ‘巧言令色鮮矣仁,’ 然則非巧言令色者仁也。 臣又問仁者樂山, 智者樂水, 答曰: ‘仁智者德性也, 動靜者體段也, 樂山水者效驗也。’ 如此文義, 雖老師宿儒, 亦不及也。" 上曰: "世孫今已入於文彀, 此莫非朴聖源之功也。" 又曰: "山林之人如宋明欽者爲講官, 必有益矣。" 命膺曰: "山林之士, 處之以淸選之職, 故謙挹而不至。 若以衛從司等蔭官處之, 豈有不來之理哉?" 履之曰: "不然。 雖蔭官, 如不可來, 則豈可來乎? 近者聖上, 有至誠招徠之意, 故不無感動者云矣。" 上曰: "予在東宮時, 桂坊多文識之人, 而尹鳳五亦其時桂坊也。"

【史臣曰: "徐命膺, 當世所謂文學之士, 而前席講討, 一則東北海無潮之說也, 一則曆法差謬之論也, 此果有補於國計之緊務, 聖學之要道者乎? 徒以章句之學, 自售博洽之辨, 可見其素無實得工夫, 而抑足爲有用之材乎?"】


  •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과학-역법(曆法)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