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음각에서 대신을 인견하여 정방·정심의 일을 논의하고 정방을 남해현에 정배하다
임금이 석음각(惜陰閣)에 나아가서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정심(鄭杺)이 만약 누가 사주(使嗾)하였다고 하면 그 일이 반드시 만연(蔓延)함에 이를 것이니, 어찌 민망스럽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고, 우의정 민백상(閔百祥)이 말하기를,
"정심은 자못 글을 알고 정방(鄭枋)은 명경과(明經科) 출신인데, 정방과 친족이 되며 또 같이 사니 정심의 글씨를 빌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듯하며, 사실(私室)에서 상의하여 계초(啓草)하는 것은 선배(先輩)도 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형극(荊棘)이 한번 열리게 되면 후일의 폐단이 고민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당(秋堂)161) 의 뜻도 경 등의 뜻과 같은데 부리(府吏)의 앞에서 묻지 말고 바로 입대(入對)를 요구하는 것이 가한데 이를 하지 아니하여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었으니, 경 등도 부리(府吏)의 앞에서 묻지 말고 진품(陳稟)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밤이 깊은 뒤에 비로소 듣고 알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정심이 과연 이를 한 것을 알았으나 정방이 미처 가져오지 아니한 때문에 부리(府吏)가 그 뒤에 와서 바쳤는데, 정방의 뜻은 이창수(李昌壽)를 쫓아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승지 김선행(金善行)이 말하기를,
"종반(宗班)의 소장(疏章)에는 외조(外朝)에서 연명(聯名)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을해년162) 《선원보(璿源譜)》를 간행할 때 서종급(徐宗伋)도 참여하지 아니하였고 이창수도 이 예(例)에 의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방이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이로써 핵문(覈問)하면 후일의 폐단을 돌아봄이 마땅하기 때문에 정방을 놓아 두고 부리(府吏)에게 물은 것이다. 계제(階梯)가 이미 정심에게 이르렀으니 처음에는 엄하게 처치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정심에게 물어서 만약 바로 공초(供招)하지 아니하며 신문(訊問)에 이르면 또한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므로 사문(査問)의 명령을 특별히 정지하고 남해현(南海縣)에 정배(定配)하며, 정방은 지엽(枝葉)이므로 단지 시종안(侍從案)에만 제거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6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上御惜陰閣, 引見大臣。 領議政金尙魯曰: "鄭杺若以爲誰某所嗾云, 則其事必至蔓延, 豈不可悶乎?" 右議政閔百祥曰: "杺頗識文, 枋則明經科也, 與枋爲親族, 而又爲同居, 則杺之倩筆, 似非異事, 而私室相議啓草, 先輩之所不免也。 荊棘一開, 後弊可悶。" 上曰: "秋堂之意, 亦如卿等, 而不問府吏之前, 直爲求對可也, 而不此之爲, 輕重倒置, 卿等亦於不問府吏之前, 陳稟可矣。" 尙魯曰: "臣於夜深後始聞知。" 上曰: "今知鄭杺果爲之, 而鄭枋未及持來, 故府吏追後來納, 鄭枋之意, 非欲逐李昌壽也。" 承旨金善行曰: "宗班疏章, 外朝不爲聯名, 故乙亥璿譜之刊也, 徐宗伋亦不參疏, 李昌壽亦依此例。" 上曰: "枋雖無狀, 以此覈問, 後弊宜顧, 故捨枋而問于府吏。 階梯已至於鄭杺, 初欲嚴處, 更思之, 問於杺, 若不直招, 以至於訊問, 則亦關後弊, 特寢査問之命, 定配南海縣, 枋則枝葉, 只除侍從案。"
- 【태백산사고본】 66책 9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46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