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 현감 이경옥이 올린 본군 잔민의 유망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는 상서
영춘 현감(永春縣監) 이경옥(李敬玉)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본현(本縣)의 환곡(還穀) 회안(會案)을 취하여 보니 두 창고에 회부(會付)한 영진(營賑)의 각곡(各穀)이 합해서 1만 4천 49석인데 을해년068) 이후에 회부곡(會付穀)의 미봉(未捧)이 3천 3백 72석 영(零)이 되고 미봉(未捧)을 이봉(已捧)으로 한 것이 2천 4백 90석 영이어서 통합하여 5천 8백 62석 영이 됩니다. 이것은 2천 3백여 호(戶)의 전성시(全盛時)에 분급(分給)한 것인데, 여러 번 참혹한 흉년을 겪으면서 백성이 흩어지고 도망하여 거의 다되었으므로 미봉한 수(數)가 이토록 많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놀라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급히 장적(帳籍) 및 전후(前後)로 분급(分給)하고 봉상(捧上)한 질책(秩冊)을 상고하여 그 진위(眞僞)를 사정(査正)한 즉 전가 몰사(全家沒死)와 물고(物故)된 자가 3백 48호였고 도망하고 유린(流離)된 자가 5백 4호인데, 위의 8백 52호의 2년 동안 받지 못한 곡식이 3천 6백 74석이니 이는 이미 지적(指的)하여 받아들일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 나머지 6백 98호에 받지 못한 것도 또한 2천 1백 88석인데, 비록 현재 살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혹은 집이 허물어져서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하거나 혹은 바가지를 들고 도로(道路)에서 걸식을 하는 자가 그 절반을 넘으니, 받기 어려운 폐단이 유망(流亡)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군폐(軍弊)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자못 심한 바가 있습니다. 을해년과 병자년069) 이래로 민호(民戶)가 날로 줄어들어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고 작년과 금년에 돌아와서 모인 것을 통계(通計)하면 겨우 1천 2백 50여 호인데, 여기에서 공천(公賤)과 사천(私賤)·군교(軍校)·역속(驛屬)·수첩 군관(守堞軍官)·선무 마병(選武馬兵)과 잔독(殘獨) 9백 호를 제외하면 응역(應役)할 수 있는 나머지 홋수는 겨우 3백 호를 지날 뿐입니다. 이리하여 모든 상납(上納)할 미포(米布) 및 각 고을의 보인(保人)과 다른 고을에서 옮겨온 군병을 합하면 5백 90명이 되는데, 해마다 죽고 흩어지는 자가 또한 자그마치 2백 60여 명에 이릅니다. 이 3백 호의 백성으로써 6백 명에 가까운 군액(軍額)을 충당하기란 곧 밀가루가 없는 수제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형세로 보아 아직은 장차 민호(民戶)가 차츰차츰 돌아와 모이기를 기다려서 오랜 세월을 끌어 가면서 그 궐액(闕額)을 보충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정(事情)이 위에 통하지 않고 과령(課令)을 어기기 어려우므로 마침내는 이웃과 친족에게 나누어 징수(徵收)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에 온 고을 백성들이 걱정하고 한탄하여 초상과 난리를 만난 것처럼 하여 소를 팔고 땅을 팔아 목전(目前)에 시급한 것만 면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외로운 잔민(殘民)들이 모두 짐을 꾸려 사방으로 흩어질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목전의 폐단을 구제할 방도로는 유맹(流氓)을 불러 모아 옛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환곡(還穀)의 포흠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온 경내(境內)에 안돈(安頓)될 날이 없을 것이요 수포(收布)를 멈추지 아니하면 돌아온 백성들이 도로 흩어질 형세에 있습니다. 6천 석의 받지 못한 것과 3백 군(軍)의 궐액(闕額)은 외면으로 보아 가볍게 의논할 것이 없을 듯하나 포흠을 받아들이고 궐액을 보충하기가 어려움이 위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만일 저하께서 민정(民情)의 궁고(窮苦)함을 진찰(軫察)하신다면 신의 이 글을 내리시어 묘당(廟堂)에 널리 물어서 좋은 방안에 따라 지교(指敎)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5책 9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1면
- 【분류】재정-창고(倉庫) / 호구-호구(戶口) / 구휼(救恤) / 군사-군역(軍役)
○庚申/永春縣監李敬玉, 上書略曰:
"臣取見本縣還穀會案, 則兩倉會付營賑各穀, 合爲一萬四千四十九石零, 而乙亥以後, 會付未捧, 爲三千三百七十二石零, 以未捧爲已捧者, 二千四百九十石零, 統以爲五千八百六十二石零矣。 此則二千三百餘戶, 全盛時所分給, 而屢經慘凶, 民人之散亡殆盡, 未捧之數, 至於此多, 臣不勝其驚心。 亟考帳籍及前後分給捧上秩冊, 査正其眞僞, 則合歿物故者, 三百四十八戶, 逃亡流離者, 五百四戶, 右八百五十二戶二年所未捧之穀, 爲三千六百七十四石零, 此旣無指的可捧之處。 其餘六百九十八戶之未捧者, 亦二千一百八十八石零, 雖曰時存, 或家破而爲人傭雇, 或持瓢而丐乞道路者, 亦過其半, 難捧之弊, 無異流亡。 而至於軍弊, 則殆有甚焉。 乙丙以來, 民戶日縮, 存者無幾, 通計昨今年還集, 則僅爲一千二百五十餘戶, 而除公私賤軍校驛屬守牒選武馬兵殘獨九百戶, 則餘戶應役, 僅過三百。 而諸上納米布, 及各邑保人, 他邑移來軍, 合爲五百九十名, 逐年死散者, 亦至二百六十餘名之多。 以三百戶之民, 充近六百之軍額, 卽何異於無麪之不托乎? 勢將姑待民戶之稍稍還集, 磨以歲月, 以補其闕。 而事情莫達, 課令難違, 終未免分徵於隣族。 一境嗷嗷, 如逢喪亂, 賣牛鬻土, 以解目前之急。 而孑遺殘民, 擧將荷擔而思散, 目下救弊之方, 莫先於招集流氓, 以復其初。 逋糴不除, 則闔境無安頓之日, 收布不停, 則來民有還散之勢。 六千石之未捧, 三百軍之闕額, 以外面觀之, 似不可輕議, 而徵逋充額之難, 如上所陳。 倘邸下, 軫察民情之窮苦, 下臣此書, 博詢廟堂, 從長指敎。" 王世子答曰: "令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65책 9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1면
- 【분류】재정-창고(倉庫) / 호구-호구(戶口) / 구휼(救恤) / 군사-군역(軍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