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이담이 올린 이경옥·이수훈 등을 파면하라는 상서
교리(校理) 이담(李潭)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관(瀛館)216) 의 선임은 그 법이 지극히 엄격한데, 신사운(申思運)은 천박하고 우둔하며, 안표(安杓)는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혹은 대신(大臣)의 족당(族黨)이라 하고, 혹은 문형(文衡)의 가까운 인친(姻親)이라고 하여 이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경옥(李敬玉)·이수훈(李壽勛)·이기건(李耆建)은 본래 지벌(地閥)과 명망이 없는데다가, 비굴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곧 온 세상에서 함께 알고 있는 바인데도, 느닷없이 함부로 이에 참여하여, 고석(顧惜)217) 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홍억(洪檍) 같이 문명(文名)과 재예(才藝)가 있는 몇 사람에 비하여 볼 때에는 본래 자신이 아주 뒤떨어지는데도 또 관록(館錄)218) 에 참여하여, 아무 이유도 없이 발탁되었고, 그 연좌된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불과 연전(年前)의 한 글에서는 ‘이는 장려할 만하므로 죄를 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바로 혐의스러움을 무릅쓰고 권점(圈點)할 때를 당하여 반드시 사람을 뽑고나서야 겨우 그만둡니다. 바로 이러한 한 가지 일에서 그 사사로운 뜻을 함부로 행하고 사람을 취사(取舍)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신이 삼가 보건대, 대신(大臣)들의 차본(箚本)과 여러 신하들의 입대(入對)하는 글에서 ‘참하록(參下錄)에서 권점(圈點)을 무산시킨 일’을 가지고 각자 변명만 하고 모착(模捉)219) 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러한 권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 나라의 체면에 있어서 죄를 경감(輕勘)한 것을 말로써 물어보고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서는, 권점에 참여한 여러 당상(堂上)을 견책하고 파면하는 벌(罰)을 마땅히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우의정 신만(申晩)이 이담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기를,
"이담의 처분을 이미 하교하였다. 경들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더구나 영상(領相)이 이를 듣고서 괴로워하니, 경의 번민이 우상(右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담은 이미 경을 배척할 뜻이 없었는데 더욱이 어찌하여 시애(撕捱)220) 를 고집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가?"
하고, 이어서 명소(命召)를 전하고 면유(面諭)한 다음에 이어서 함께 같이 오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담은 내가 일찍이 그 사람됨을 가상히 여겼는데, 그는 반드시 직언(直言)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담을 소견하고 원서(原書)를 읽고서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그가 논한 여러 사람들을 물어보니, 이담이 역력(歷歷)히 탄핵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이담을 좌천시켜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하고, 이석표(李錫杓)가 외방(外方)에 임명되었을 적에 말을 준 전례를 준용하여 또한 그에게 말을 주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성상께서 탕평(蕩平)의 정치를 힘써 시행하여 노론(老論)·소론(小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당(黨)을 다 같이 하나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세도(世道) 정치의 책임은 오로지 노론에 있었다. 만약 정치가 능히 화평하고 공정하면 족히 건극(建極)의 성화(聖化)를 도울 것인데, 자기들 안에서 또 각기 분열되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어떤 자는 말하기를, ‘동인은 남인 중에서도 북인이므로 서로 경알(傾軋)한다.’라고 하는데, 조종부(趙宗溥)·조영순(趙榮順)이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한 것은 남인이 동인을 공격한 것이며, 박지원(朴志源)이 홍계희(洪啓禧)를 탄핵하고 이형륙(李亨陸)·이후(李)를 탄핵한 것은 동인이 남인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이천보·남유용(南有容)이 도당록(都堂錄)221) 의 전선(銓選)을 주관하였기 때문이다. ‘동인이 많이 참여하였다.’ ‘남인이 혹은 빠졌다.’라고 하다가 마침내 이담의 글이 제출되게 되어 혐의와 원망이 더욱 생겼다. 아! 당을 물리치고 당을 만드는 것이 어느 때에 그칠 수가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64책 9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9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註 216]영관(瀛館) : 홍문관.
- [註 217]
고석(顧惜) : 자중(自重).- [註 218]
관록(館錄) : 홍문관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제1차 선거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의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관록이라 함. 홍문록(弘文錄)·본관록(本館錄).- [註 219]
모착(模捉) : 진상을 포착함.- [註 220]
시애(撕捱) :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워 승강이 함.- [註 221]
도당록(都堂錄) : 의정부(議政府)에서 홍문관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선임하기 위한 제2차 추천 기록. 의정(議政)·이조 판서(吏曹判書)·참찬(參贊)·참의(參議) 등이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사람 가운데서 뽑음.○癸巳/校理李潭上書, 略曰:
瀛館之選, 其法至嚴, 申思運之闒茸, 安杓之愚騃, 或以大臣之族黨, 或以文衡之切姻而參焉。 李敬玉、李壽勛、李蓍建之素乏地望, 鄙屈無恥, 卽擧世所共知, 而闖然亂參, 無所顧惜。 至如洪檍之文華才藝, 比數人本自逈別, 而又參館錄, 無端見拔, 原其所坐。 不過年前一書, 則 ‘是可奬也, 不可罪也’, 今乃冒嫌當圈, 必拔乃已。 卽此一事, 可見其私意橫流, 取舍不公。 且臣伏見大臣箚本, 諸臣對章, 以 ‘參下錄散點事’, 各自卞明, 終沒模捉, 然則不知是圈從何以生歟? 其在國體, 不可以問備薄勘而止。 臣以爲參圈諸堂, 宜施譴罷之罰也。
領議政李天輔、右議政申晩因李潭上書, 胥命金吾門外, 上遣史官傳諭曰: "李潭處分, 業已下敎, 卿等何若此? 況領相聞之苦矣, 爲卿悶焉, 至於右揆。 潭旣無意斥, 尤何撕捱?" 仍傳命召, 有面諭, 仍爲偕來。 上曰: "李潭, 予嘗嘉其爲人, 必直言也。" 召見李潭, 命讀奏原書。 下詢所論諸人, 潭歷歷劾奏。 上以潭斥補報恩縣監, 援李錫杓補外時給馬例, 亦命給馬。
【史臣曰:聖上力行蕩平之政, 使老、少、南、北之黨同歸于一。 而世道之責, 專在老黨。 苟能和平公正, 則足以仰贊建極之聖化, 而豈意自中又各分裂? 有曰 ‘東黨南黨、中北黨, 互相傾軋’, 趙宗溥、趙榮順之劾李天輔, 以南擊東也。 朴志源之劾洪啓禧, 李亨逵之劾李
, 以東擊南也。 是以李天輔、南有容之主選堂錄也, 曰東者多參, 曰南者或漏, 終致李潭之書出, 嫌怨轉生, 噫! 祛黨生黨, 何時可已?】
- 【태백산사고본】 64책 92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9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註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