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려정에 나가 ‘어제 중용 서’를 간인케 하고, ‘효소전 단양 제문’을 짓다
임금이 거려청(居廬廳)에 나아갔다. ‘어제 중용 서(御製中庸序)’를 입시(入侍)한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써서 간인하게 하였다. ‘효소전 단양 제문(孝昭殿端陽祭文)’을 친히 지어 승지에게 명하여 써서 재사(齋舍) 동쪽에 걸게 하였다.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아! 한 문정(門庭)이 영소전(永昭殿)·경녕전(敬寧殿)·영휘전(永徽殿)이 되었다가, 경자년139) 에 이르러서는 또 효령전(孝寧殿)이 되었고, 갑진년140) 에는 경소전(敬昭殿)이 되었으며, 경술년141) 에는 경휘전(敬徽殿)이 되었었는데, 아! 오늘날은 또 효소전이 되어, 첫째 낭(廊)은 대전(大殿)의 재실(齋室)이 되고 둘째 낭은 동궁의 재실이 되었으며 셋째 낭은 인렬 왕후(仁烈王后) 국휼(國恤) 때에 왕자의 거려청이 되었다. 아! 내가 27세에 용염(龍髥)을 더위잡을 수 없었고 인산(因山)한 뒤 11월에는 여기에 거려청을 하였었는데, 이듬해 8월에 승저(承儲)142) 한 뒤에는 또 동궁 재실에 있었으며, 갑진년 섣달 31세에 또 재전(齋殿)에 있었고, 37세 경술년 7월에는 또 이 전(殿)에 있었으니, 한 사람으로 세 낭에서 거려(居廬)하였다. 아! 나의 지극한 슬픔이 아득함은 바로 이 한 가지 일로써 알 수 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열조(列朝)의 《혼전등록(魂殿謄錄)》이 각사(各司)에 있는 것으로는 선조 대왕은 영모전(永慕殿), 인조 대왕은 영사전(永思殿), 효종 대왕은 경모전(敬慕殿), 현종 대왕은 효경전(孝敬殿), 숙종 대왕은 효령전(孝寧殿), 경종 대왕은 경소전(敬昭殿), 인목 왕후(仁穆王后)는 효사전(孝思殿), 인렬 왕후(仁烈王后)는 숙녕전(肅寧殿), 장렬 왕후(莊烈王后)는 효사전(孝思殿), 인선 왕후(仁宣王后)는 경사전(敬思殿), 명성 왕후(明聖王后)는 영모전(永慕殿), 인경 왕후(仁敬王后)는 영소전(永昭殿), 인현 왕후(仁顯王后)는 경녕전(敬寧殿), 인원 왕후(仁元王后)는 효소전(孝昭殿), 선의 왕후(宣懿王后)는 경휘전(敬徽殿), 정성 왕후(貞聖王后)는 휘령전(徽寧殿)인데, 인묘(仁廟) 이전의 등록은 병자년143) 난리에 유실되어 전하지 아니한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39]경자년 : 1720 숙종 46년.
- [註 140]
갑진년 : 1724 경종 4년.- [註 141]
○癸酉/上御居廬廳。 御製《中庸》序, 命入侍儒臣書印。 親製孝昭殿端陽祭文, 命承旨書揭于齋之東。 其文略曰:
吁嗟! 一門庭爲永昭殿、敬寧殿、永徽殿, 逮于庚子, 又爲孝寧殿, 甲辰爲敬昭殿, 庚戌爲敬徽殿, 嗚呼! 今日又爲孝昭殿, 第一廊爲大殿齋室, 第二廊爲東宮齋室, 第三廊, 仁烈王后國恤時, 爲王子居廬廳。 嗚呼! 予二十七歲, 龍髯莫攀, 因山後十一月, 居廬于此, 翌年八月承儲後, 又處於東宮齋室, 甲辰臘三十一歲, 又處於齋殿, 三十七庚戌七月, 又處於此殿, 以一人居廬三廊。 嗚呼! 予之窮哀冥然, 卽此一事可知矣。"
【史臣曰: 列朝魂殿謄錄之在各司者, 宣祖大王則永慕殿, 仁祖大王則永思殿, 孝宗大王則敬慕殿, 顯宗大王則孝敬殿, 肅宗大王則孝寧殿, 景宗大王則敬昭殿, 仁穆王后則孝思殿, 仁烈王后則肅寧殿, 莊烈王后則孝思殿, 仁宣王后則敬思殿, 明聖王后則永慕殿, 仁敬王后則永昭殿, 仁顯王后則敬寧殿, 仁元王后則孝昭殿, 宣懿王后則敬徽殿, 貞聖王后則徽寧殿, 仁廟以前謄錄, 失於丙子兵火而不傳。】
-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8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