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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91권, 영조 34년 1월 17일 갑진 2번째기사 1758년 청 건륭(乾隆) 23년

화순 옹주의 상에 왕림하다. 예조 판서 이익정이 정려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임금이 화순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청대(請對)하여 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다. 임금이 환궁(還宮)한 뒤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 앉아서 자식의 죽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거듭 타일러서 약을 먹기를 권하니, 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시니 어찌 억지로 마시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하고, 조금씩 두 차례 마시고는 곧 도로 토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을지라도 중심이 이미 정해졌으니, 차마 목에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하기로, 내가 그 고집을 알았으나, 본심이 연약하므로 사람들의 강권을 입어 점차로 마실 것을 바랐는데, 마침내 어버이의 뜻을 순종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이로써 운명(殞命)하였으니, 정절(貞節)은 있으나 효에는 모자란 듯하다. 그날 바로 죽었으면 내가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마는, 열흘을 먹지 아니하니 내 마음에 괴로움이 많았다. 아까 예조 판서가 정려하는 은전을 실시하라고 청하였는데, 그 청함은 잘못이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자손에게 법을 주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뒤에 폐단됨이 없지 아니하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오나, 우뚝한 정절을 없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세(百世)에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정절에 있고 정려에 있지 아니한데,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후세에 폐단을 끼치지 아니하려고 한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왕림하였을 적에, 그가 시호(諡號)로써 그 지아비의 명칭을 바꾸고 싶어하여 내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었는데, 시호를 내리던 날에 죽었으니, 시호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임종(臨終) 때를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마음 아파하는 바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귀주(貴主)의 열행(烈行)은 이미 사람의 입에 전파되어 있으며, 또한 장차 사첩(史牒)에 전해질 것인데, 어찌 구구한 작설(綽楔)035) 의 표함을 기다리겠는가? 더구나 ‘아비가 자식을 정려할 수 없다’는 하교는, 위대하신 왕의 말씀이 넓고 공정하여 더욱 만세의 법이 될 만하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 【분류】
    왕실(王室) / 인물(人物)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

○上臨和順翁主喪, 禮曹判書李益炡請對, 請旌翁主閭。 上還宮後謂左議政金尙魯曰: "以子而不從父言, 竟至餓死, 於孝有歉矣。 坐而視死, 非父之道, 故予申申諭之, 勸其服藥, 則渠笑而對曰, ‘聖敎至此, 豈不强飮乎?’ 小飮二次, 卽爲還吐曰, ‘雖奉聖敎, 中心已定, 不忍下咽矣’, 予知其固執, 而然本心軟弱, 庶幾被人强勸, 漸次飮之矣, 終不思順承親志, 竟以此殞命, 貞則有之, 似欠於孝矣。 其日卽死, 則予何恨焉, 而十日不食, 多苦予心矣。 俄者禮判請施旌閭之典, 而其請非矣。 爲父而旌其子之閭, 非貽謨之道, 亦不無爲弊於後也。" 尙魯曰: "聖敎至當, 而卓爾之節, 不可使泯滅也。" 上曰: "百世不泯者在節, 而不在旌閭, 予在君師之位, 不欲貽後世之弊也。" 又敎曰: "予之往臨也, 渠欲以諡號, 易其夫之名, 予已心許矣, 宣諡之日卽逝, 其若有待於宣諡者。 然而屬纊之時, 未能分明知了, 此予所痛者也。"

【史臣曰: 貴主烈行, 旣已播在人口, 亦將垂諸史牒, 顧何待區區(棹)〔綽〕 楔之表哉? 況父不可旌子之敎, 大哉王言, 廓然公正, 尤可爲萬世法矣。】


  •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 【분류】
    왕실(王室) / 인물(人物)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