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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91권, 영조 34년 1월 17일 갑진 1번째기사 1758년 청 건륭(乾隆) 23년

화순 옹주의 졸기

화순 옹주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바로 임금의 첫째 딸인데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동복 누이동생[同母妹]이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시집가서 비로소 궐문을 나갔는데, 심히 부도(婦道)를 가졌고 정숙(貞淑)하고 유순함을 겸비(兼備)하였다. 평소에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복식(服飾)에 화려하고 사치함을 쓰지 않았으며, 도위(都尉)와 더불어 서로 경계하고 힘써서 항상 깨끗하고 삼감으로써 몸을 가지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진 도위와 착한 옹주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도위가 졸하자, 옹주가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그 집에 친히 거둥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곧 토하니, 임금이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돌아왔는데, 이에 이르러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되어 마침내 자진(自盡)하였다. 정렬(貞烈)하다. 그 절조(節操)여! 이는 천고(千古)의 왕희(王姬) 중에 있지 아니한 바이다. 조정에 받들어 위로하고 정후(庭候)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인(婦人)의 도(道)는 정(貞) 하나일 뿐이다. 세상에 붕성지통(崩城之痛)032) 을 당한 자가 누구나 목숨을 끊어 따라가서 그 소원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지라, 하루아침에 목숨을 결단하여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는 이는 대개 적다. 그러나 정부(貞婦)·열녀(烈女)가 마음의 상처가 크고 슬픔이 심한 즈음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자인(自引)033) 하는 것은 혹시 쉽게 할 수 있지만, 어찌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끊고 한 번 죽음을 맹세하여 마침내 능히 성취하였으니, 그 절조가 옹주와 같은 이가 있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비록 군부(君父)의 엄하고 친함으로서도 능히 감동해 돌이킬 수 없었으니, 진실로 순수하고 굳세며, 지극히 바른 기개(氣槪)가 분육(賁育)034) 이라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할 바가 있지 아니하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이는 진실로 여항(閭巷)의 필부(匹婦)도 어려운 바인데, 이제 왕실의 귀주(貴主)에게서 보게 되니 더욱 우뚝하지 아니한가? 아! 지극한 행실과 순수한 덕은 진실로 우리 성후(聖后)께서 전수(傳授)하신 심법(心法)이므로, 귀주가 평일에 귀에 젖고 눈에 밴 것을 또한 남편에게 옮겼던 것이다. 아! 정렬하도다. 아! 아름답도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 [註 032]
    붕성지통(崩城之痛) : 남편이 죽은 애통.
  • [註 033]
    자인(自引) : 자살.
  • [註 034]
    분육(賁育) :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

○甲辰/和順翁主卒。 主卽上之第一女, 而孝章世子同母妹也。 下嫁于月城尉 金漢藎, 始出閤, 甚得婦道, 貞柔兼備。 雅尙儉約, 服飾不用華侈, 與都尉交相儆勉, 常以淸愼自持, 人謂賢都尉淑翁主可以儷美云, 及都尉卒, 主決意下從, 勺水不入口。 上聞之, 親幸其第, 勸進糜餌, 主承命一呷, 旋卽哇之, 上知其志不可回, 嗟歎而還, 至是絶粒積十四日, 竟以自盡。 烈哉, 其操! 此千古王姬之所未有也。 朝廷奉慰庭候,

【史臣曰: 婦人之道, 貞一而已。 世之遭崩城之痛者, 孰不欲殞身下從, 以遂其願, 而死生亦大矣, 其能判一朝之命, 視之如歸者蓋尠矣。 然貞婦、烈媛, 當其創(臣)〔巨〕 慟甚之際, 卽地自引, 容或易辦, 而豈有經旬絶粒, 矢以一死, 卒能成就, 其節操如翁主者哉? 當是時雖以君父之嚴且親, 而亦莫能感回焉, 苟非純剛至正之氣, 有賁育所不能奪者能如是乎? 此固閭巷匹婦之所難, 而乃見於天家貴主, 尤豈不卓然矣乎? 嗚呼! 至行純德, 實我聖后傳授心法, 故貴主平日所濡染者, 亦移之於所天。 嗚呼, 烈哉! 嗚呼, 懿哉!】


  • 【태백산사고본】 64책 9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6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