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부녀의 다리를 금하고 당하 조관은 녹포를 입도록 하다
임금이 비국의 여러 당상을 불러 보았다. 중외(中外)의 부녀(婦女)들의 다리[髢髻]를 금하고 쪽[後髻]으로 대신하게 하며, 조신(朝臣) 중에 당하관(堂下官)의 시복(時服)은 홍포(紅袍)를 착용하지 말고 구제(舊制)대로 청록색(靑綠色)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부녀들의 다리를 쓰는 사치(奢侈)가 날로 심하여져서 다리 한 꼭지의 값이 간혹 수백금(數百金)에 이르니, 임금이 오래 전부터 고치려고 하여 여러 번 정신(廷臣)에게 묻고, 시험을 치는 선비들에게 책문(策問)으로 시제(試題)까지 내었으나, 끝내 정론(定論)이 없었다. 당하 조관(堂下朝官)의 구제(舊制)는 녹포(綠袍)를 착용하였는데, 임진 왜란(壬辰倭亂)·병자 호란(丙子胡亂) 뒤에 홍포(紅袍)로 변하였으니, 화인(華人)들은 군신(君臣)이 같은 복장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풍속이 이를 숭상하였고 또 선홍색(鮮紅色)을 귀히 여겼으니 사치스러움이 점차 번지게 되었다. 임금이 두 가지를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사치스러운 풍속을 누르고 옛 제도를 닦기 위하여서는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고 아무도 이론(異論)이 없었다. 임금이 이에 친히 윤음(綸音)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옛사람이 다리를 높였다는 기롱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궁중(宮中)에 이런 제도가 없었으니 궁중에서 높은 다리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곧 국인(國人)들이 높은 다리를 좋아한 것이었다. 습속(習俗)이 갈수록 사치스러운 데로 흘러 다리 한 꼭지의 비용이 자못 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는 열 집의 재산보다 많으니, 이는 곧 여말(麗末)의 퇴폐(頹廢)한 풍습이다. 옛날에 명부(命婦)가 입궐할 때에는 모두 궁중의 양식을 따랐는데, 지금은 혼동하여 한 투식(套式)이 되었고 다리를 올리는 데 이르러서 극단에 달하였다. 지금부터 다리를 변경하여 쪽을 만들어 궁중 양식을 착용하고, 상천인(常賤人)은 다리를 그대로 사용하라. 명부(命婦)나 사족(士族)의 예복(禮服)에도 역시 금주(金珠) 및 용봉차(龍鳳釵)를 금하여 사치를 억누르고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는 의도를 보이는 것으로써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알리는 바이다. 사족의 부녀로 하여금 다시는 다리를 얹지 말게 하며, 당하관의 융복(戎服) 외에는 녹포(綠袍)를 착용하여 모두 구전(舊典)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2면
- 【분류】의생활(衣生活)
○甲戌/上召見備局諸堂。 命禁中外婦女髢䯻, 代以後䯻, 朝臣堂下官時服, 勿用紅袍, 依舊制從靑緣色。 是時, 婦女髢䯻, 侈靡日甚, 一䯻之費, 或至數百金, 上久欲矯之, 屢詢廷臣, 至發策試士, 而終無定論。 堂下朝官, 舊制用綠袍, 自壬、丙亂後變爲紅袍, 華人以君臣同服譏之。 俗尙, 又以鮮紅爲貴, 轉加侈費。 上以二者不可不變也, 復詢諸臣, 皆以爲抑奢風修舊章, 莫善於此, 咸無異論。 上乃親製綸音, 曰:
古人有高䯻之譏, 而我國則闕中無此制, 非宮中之好高䯻, 卽國人之好高䯻也。 習俗轉益侈靡, 一䯻之費, 殆過漢 文十家之産, 此卽麗末陋風也。 昔日命婦之入闕, 皆從宮樣, 今則混爲一套, 至於加䯻而極矣。 自今變髢䯻, 用後䯻着宮樣, 常賤人則仍用髢。 髻命婦、士族禮服, 亦禁金珠及龍鳳釵, 以示抑奢侈正名分之意, 頒諭中外。 使士族婦女, 勿復加髢, 堂下官戎服外, 着綠袍, 一遵舊典。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2면
- 【분류】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