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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8월 21일 경진 4번째기사 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영접 도감 당상, 유신을 인견하고 칙사의 치제 준비를 논의하다

임금이 영접 도감(迎接都監) 당상과 유신(儒臣)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치제(致祭)할 때에 저 사람들을 삼문(三門) 밖에 세워 놓고 제상(祭床)·향상(香床)·홍초장(紅綃帳)을 문밖에 설치하는 것이 옳겠다."

하매, 이종백(李宗白)이 말하기를,

"제상은 삼문 밖의 홍초장 사이에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혼전(魂殿)을 보고싶어 하더라도 다만 장막을 들어서 보이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겠다. 삼도 습의(三度習儀)도 모두 설장(設帳)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과거(科擧)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묻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경자년194) 이전에는 3년의 복제(服制)가 회복되지 아니하여 포모(布帽)에 각(角)이 없고 수(垂)가 있었으므로 문무(文武)의 창방(唱榜)할 때에도 포모를 착용하였었는데, 경자년 이후에는 복제가 잘 갖추어져서 마대(麻帶)를 없애고 포각대(布角帶)를 착용하였으나 포수(布垂)는 그냥 있었다. 경술년에 이르러 포모에 각이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한 뒤에는 문무의 창방에 있어서 마땅히 포로 싼 복두(幞頭)와 포로 싼 야자대(也字帶)를 착용함이 마땅하였으나 경술년에 모각(帽角)이 있은 후로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지금 이 한 가지 일로 비교하여 보건대, 3년 내에는 여러 신하들의 복제가 다하기 전에 만일 소과(小科)가 있으면 마땅히 포로 싼 연건(軟巾)과 포삼(布衫)에 백도대(白絛帶)를 착용함이 마땅했으니, 이로써 보건대, 포로 싼 복두와 야자대를 착용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어찌 잡과(雜科)의 방방(放榜)과 차이가 없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창방할 때에는 포로 싼 복두와 야자대로써 거행하라. 이를 인연하여 생각해 보니, 3년 내에 여러 신하들의 복제가 끝난 뒤에 진현(進見)할 때에는 마땅히 천담복(淺淡服)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과의 창방이 있게 되면 길복(吉服)을 입어야 하는가, 천담복을 입어야 하는가? 의조(儀曹)195) 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명년(明年)에 원량(元良)의 심제(心制)196) 뒤에 여러 신하들은 천담으로 진현하지마는 내외 시인(內外侍人)의 복색은 임금을 따라야 할 것인가, 원량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것은 임오년197) 과는 차이가 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의논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관복(官服)의 일로 인하여 항상 안타까운 것이 있는데, 녹사(錄事)가 사람은 비록 미천하나 역시 의관(衣冠)을 한 사람이다. 하물며 출사(出仕)한 날짜를 계산하여 수직(授職)함에 있어서 의관의 제도는 마땅히 옛것을 따라야 하는데, 옛날에는 모대(帽帶)를 착용한 녹사가 있고 뿔이 있는 평정건(平頂巾)과 도대를 착용한 녹사가 있었는데, 근년(近年) 이래로 반행(班行)198) 에 모대를 착용한 녹사는 있어도 평정건을 쓴 자는 하나도 없으니, 이 역시 세도(世道)의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의정부와 중추부(中樞府)로 하여금 고제(古制)를 회복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59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선발(選拔) / 외교(外交) / 의생활(衣生活)

  • [註 194]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註 195]
    의조(儀曹) : 예조.
  • [註 196]
    심제(心制) : 대상(大祥) 때부터 담제(禫祭)까지 입는 복.
  • [註 197]
    임오년 : 1702 숙종 28년.
  • [註 198]
    반행(班行) : 반열(班列).

○上引見迎接都監堂上及儒臣。 上曰: "勅使致祭時, 立彼人於三門外, 祭床、香床、紅綃帳, 設於門外可也。" 李宗白曰: "祭床則設於三門外紅綃帳之間宜矣。" 上曰: "彼雖欲見魂殿, 只擧帳而勿令入可也。 三度習儀, 亦皆設帳焉。" 上問科擧服色, 命書傳敎曰:

庚子以前, 三年之制未復, 布帽無角有垂, 故文武唱榜亦用布帽, 而庚子以後服制大備, 除麻帶用布角帶, 而布垂則猶存矣。 至於庚戌布帽有角, 若此之後文武唱榜, 宜用布裹幞頭與布裹也字帶, 而庚戌帽角後未遑。 今以一事比焉, 三年之內諸臣服盡之前, 若有小科, 宜用布裹軟巾布衫白條帶, 以此觀之, 用布裹幞頭、也字帶無疑矣。 何與雜科放榜無間乎? 自今唱榜, 以布裹幞頭、也字帶擧行。 因此思之, 三年內諸臣服盡後, 進見時當服淺淡服。 而若有大科唱榜, 則從吉乎從淺淡服乎? 令儀曹考前例以奏。

上又曰: "明年元良心制之後, 諸臣以淺淡服進見, 而內外侍人服色, 從上乎從元良乎? 此與壬午有間。 令禮官議大臣。" 又敎曰: "今因官服事, 恒有慨然者, 錄事人雖微, 亦衣冠之人。 況計仕授職, 衣冠之制其宜遵古, 而昔則有帽帶錄事, 有有角平頂巾絛帶錄事矣, 近年以來, 班行有帽帶錄事, 而無一平頂巾者, 此亦觀世道之一端。 令政府、樞府復古制。"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59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선발(選拔) / 외교(外交)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