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 왕후의 인산 의주
인산 의주(因山儀註)는 이러하였다. 4월 초4일에 인원 왕후의 산릉(山陵)을 명릉의 우강(右岡)으로 정하고, 을좌 신향(乙坐辛向)으로 재혈(裁穴)하였다. 역사(役事)를 4월 16일 사시(巳時)에 시작하여 풀을 베고 흙을 파내는 일은 동월(同月) 19일 사시에 하였으며, 금정(金井)149) 은 6월 13일 묘시(卯時)에 열었는데, 혈(穴)의 깊이는 7척(尺) 4촌(寸)이었다.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였다.】 7월 초10일 묘시에 찬궁(欑宮)을 열고, 발인(發靷)은 동월 11일 축시(丑時)에 하며, 산릉에서 찬궁을 여는 것은 동월 12일 축시에 하고, 하현궁(下玄宮)은 동일 묘시에 하였다. 하루 전에 임금이 몸소 견전(遣奠)을 거행하고 드디어 발인할 때 섭통례(攝通禮)가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좌(座)에서 내려 여(轝)에 올릴 것을 계청(啓請)하니, 내시(內侍)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를 그 뒤에 두었다. 빈전(殯殿)의 문 밖에 이르러 섭통례가 여에서 내려 연(輦)에 올릴 것을 계청하고, 섭통례는 또 재궁(梓宮) 앞에 나아가 순(輴)에 나갈 것을 계청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여재궁관(舁梓宮官)150) 과 내시(內侍)를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순에 올려서 외문(外門) 밖에 이르러 대여(大轝)에 올리니, 의위(儀衛)의 도종(導從)은 의식대로 하였다. 탁(鐸)을 잡은 자가 탁을 흔드니, 궁인(宮人)이 말을 타고 곡하며 따르고 승지 두 사람도 따라갔다. 영가(靈駕)가 출발하려고 하자 임금이 소여(素輿)를 타고 왕세자가 뒤를 따랐다. 영가가 종묘(宗廟) 앞길에 이르자, 여사(轝士)가 대여를 돌려 북향(北向)하고 욕석(褥席)에 안치하였으며, 조금 뒤에 출발하였다. 혼백련(魂帛輦)에 이르러서도 역시 똑같이 하였다. 대가(大駕)가 종묘 앞길에 이르자 임금이 여에서 내려 걸어 지나가서는 다시 여를 탔다. 영가가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서는 강(杠)을 바꾸어 문밖으로 나갔고 다시 강을 바꾸어 노제소(路祭所)에 이르렀다. 임금이 여에서 내려 악차(幄次)에 들어가고 왕세자는 막차(幕次)에 들어갔으며, 내시는 혼백함을 받들어 장전(帳殿) 가운데에 들어가 안치하였다. 영가가 잠시 머무르니, 도성(都城)에 머물러 있던 백관(百官)이 향불을 피워 노제(路祭)를 의식대로 올렸다. 왕세자가 봉사위(奉辭位)에 나아가 곡하고 애통함을 다하였다. 영가가 출발하니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연에 올라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렀다. 영가가 잠시 머무르고,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고 장전 가운데 들어가 안치하였다. 임금이 여에서 내려 악차에 들어가니,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올렸다. 영가가 출발하여 경릉(敬陵)151) 앞길에 이르자 혼백련과 영가와 그리고 대가가 잠시 머물렀다가 오르고 내리는 절차를 모두 종묘 앞길에서 거행한 의식과 같이 하였다. 명릉에 이르러 임금이 연에서 내려 여에 올랐다. 좌의정이 여재궁관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윤여(輪轝)의 위에서 찬궁 안에 있는 탑상(榻上)에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안치하였다. 내시가 혼백함을 받들어 영좌(靈座)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를 그 뒤에 놓았다. 내시가 그 앞에 향안(香案)을 설치하고 명정(銘旌)을 영좌의 우측에 설치하였으며, 또 시책보(諡冊寶)와 애책(哀冊) 및 평상시에 쓰던 책보(冊寶)를 영좌의 왼쪽에 놓았고 영침(靈寢)을 재궁의 동쪽에 설치하였다. 대가가 홍살문[紅箭門]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악차로 들어가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장(杖)을 두고는 홍살문 안에 있는 판위(版位)에 들어가서 부복(俯伏)하여 곡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이어서 찬궁을 봉심(奉審)하고 또 능에 올라가서 봉심하고는 악차(幄次)에 들어갔다. 이날 임금이 친히 천전(遷奠)152) 을 거행하였는데 방상시(方相氏)153) 가 먼저 퇴광(退壙) 위에 이르러 창으로 4방의 구석을 쳤다. 섭통례가 영좌 앞에 나아가서 여에 올릴 것을 계청하고, 길유궁(吉帷宮)에 나아가서 여에서 내려 좌(座)에 올릴 것을 계청하니, 내시가 혼백함을 재궁 앞에 안치하였다. 섭통례가 받들어 영좌에 나아가서 순에 올려 현궁으로 나아가기를 계청하니, 좌의정이 여재궁관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윤여 위에서 순에 올렸다. 담사(擔士)가 순을 받들어 왼쪽으로 돌아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장차 현궁에 나아갈 때 궁인이 모두 곡하였다.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장(杖)을 짚고 곡을 하며 봉사위에 이르니,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이 모두 곡하면서 따랐다. 순(輴)이 수도각(隧道閣)에 이르자 임금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좌의정이 여재궁관을 거느리고 윤여로 재궁을 받들어 소금저(素錦褚)를 덮고는 윤여 위에서 퇴광의 산륜(散輪) 위에 안치한 다음 소금저를 벗기고 해과(解裹)하는 것을 봉심하였다. 녹로(轆轤)154) 를 사용하여 퇴광 안에 있는 윤여 위에 안치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다시 관의(棺衣)와 명정을 정리하였다. 임금이 전옥백위(傳玉帛位)에 나아가자 봉애책관(奉哀冊官)이 애책을 받들어 근시(近侍)에게 꿇어앉아 주었고, 근시는 꿇어앉아서 올리니, 임금이 그것을 받아 영의정에게 전하였다. 【이때 영의정이 병으로 따라오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이 대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북향하고, 꿇어앉아 받아서 퇴광의 서쪽에 바쳤다. 봉옥백관(奉玉帛官)이 옥백을 받들어 근시에게 꿇어앉아 주매 근시가 꿇어앉아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받아서 좌의정에게 주었다. 좌의정이 북향하여 꿇어앉아 받아서 애책의 남쪽에 바쳤다. 임금이 봉사위로 돌아오니,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홍상한(洪象漢)이 보불삽(黼黻翣)과 화삽(畵翣)을 재궁의 양쪽 곁에 세웠다.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애통함을 다한 뒤에 사배하니, 백관이 모두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하였다. 임금이 악차로 돌아가자 집의(執義) 박창윤(朴昌潤)이 봉폐(封閉)155) 를 감독하고, 우의정이 흙 아홉 삽을 덮은 다음 지석(誌石)을 내렸다.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영위(靈位)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우주궤(虞主櫃)를 받들어 향탕(香湯)으로 신주를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은 뒤, 임금이 최복을 갖추고 장(杖)을 두고는 손을 씻고 탁자 앞에 올라와서 서향(西向)하여 서고 친히 전면(前面)을 썼다. 내시가 우주(虞主)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혼백함은 그 뒤에 두었다. 유사가 예찬(禮饌)을 올리니, 상식(尙食)156) 이 영좌 앞에 진설하고는 향(香)을 피우고 술을 따랐다. 전언(典言)157) 이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자,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한 다음 악차로 돌아왔다. 임금이 장(杖)을 짚고 사릉위(辭陵位)에 나아가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한 후 홍살문 밖 악차로 나갔다. 내시가 우주궤를 받들어 연(輦)에 안치하고, 혼백함을 그 뒤에 두었다. 섭통례가 진발(進發)할 것을 계청하니 의장(儀仗)이 차례로 앞에서 인도하였다.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지영위(祗迎位)에 나아가니, 우주련(虞主輦)이 이르렀다. 임금이 국궁(鞠躬)하고 드디어 연에 올라서 경릉(敬陵) 앞길에 이르렀다. 우주련과 대가(大駕)가 잠시 머물렀는데, 오르고 내리는 절차를 의식대로 하였다. 주정소에 이르러 내시가 우주궤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임금은 연에서 내려 악차에 들어갔다. 유사가 예찬을 올렸는데, 모두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하였다. 섭통례가 영좌 앞에 나아가 좌에서 내려 연에 오를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악차에서 나와 연에 오른 뒤에 드디어 진발하였다. 왕세자가 성문(城門) 밖의 모화관(慕華館)에 나와서 신련(神輦)을 공경히 맞아 부복하여 곡하고 애통함을 다하였으며, 종묘 앞길에 이르자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애통함을 극진히 하였다. 우주련과 대가가 잠시 머물러 오르고 내리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임금이 신련을 따라 건복문(建福門)에 들어가서 효소전(孝昭殿) 뜰 위에 이르자, 내시가 우주궤를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니, 임금이 초우제(初虞祭)를 의식대로 몸소 거행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5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49]금정(金井) : 묘(墓)를 쓰기 위해 판 구덩이. 또는 금정기(金井機)의 줄임말.
- [註 150]
여재궁관(舁梓宮官) : 관을 마주드는 임시직.- [註 151]
경릉(敬陵) : 덕종(德宗)과 소혜 왕후의 능.- [註 152]
천전(遷奠) : 발인하기 위하여 영구를 옮길 때 올리는 제전.- [註 153]
방상시(方相氏) : 구나(驅儺) 때 악귀를 쫓는 나자(儺者)의 하나. 황금빛의 네 눈과 방울이 달린 곰가죽을 씌운 탈을 쓰고 붉은 웃옷에 검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었는데, 장례(葬禮) 때에는 광중(壙中)의 악귀를 쫓는 데 썼음.- [註 154]
녹로(轆轤) : 고패.- [註 155]
○因山儀註:
四月初四日, 定仁元王后山陵於明陵右岡, 以乙坐辛向裁穴。 始役四月十六日巳時, 斬草破土同月十九日巳時, 開金井六月十三日卯時, 穴深七尺四寸。 【用營造尺。】 啓欑宮七月初十日卯時, 發靷同月十一日丑時, 山陵啓欑宮同月十二日丑時, 下玄宮同日卯時。 前一日, 上親行遣奠, 遂發靷, 攝通禮進靈座前, 啓請降座陞轝, 內侍捧魂帛函, 安腰轝, 虞主櫃置其後。 至殯殿門外, 攝通禮啓請降轝陞輦, 攝通禮又進梓宮前, 啓請詣輴, 左議政金尙魯帥舁梓宮官及內侍, 奉梓宮陞輴, 至外門外, 陞大轝, 儀衛導從如式。 執鐸者振鐸, 宮人乘馬哭從, 承旨二員隨行。 靈駕將發, 上乘素輿, 王世子隨後。 靈駕至宗廟前路, 轝士回大轝北向, 安於褥席, 少頃進發。 魂帛輦至, 亦如之。 大駕至宗廟前路, 上降輿步過, 復乘輿。 靈駕至崇禮門內, 改杠出門外, 又改杠至路祭所。 上降輿入幄次, 王世子入幕次, 內侍奉魂帛函, 入安於帳殿中。 靈駕少駐, 留都百官進香, 路祭如儀。 王世子就奉辭位, 哭盡哀。 靈駕進發, 上出次乘輦, 至晝停所。 靈駕少駐, 內侍奉魂帛函, 入安於帳殿中。 上降輿入幄次, 攸司進禮饌如朝夕奠。 靈駕進發, 至敬陵前路, 魂帛輦、靈駕及大駕少駐, 陞降竝如宗廟前路之儀。 至明陵, 上降輦乘輿。 左議政率舁梓宮官, 奉梓宮, 從輪轝上, 進安於欑宮內榻上南首。 內侍奉魂帛函, 安於靈座, 虞主櫃置其後。 內侍設香案於其前, 設銘旌於靈座之右, 又設諡冊寶、哀冊及平時冊寶於靈座之左、設靈寢於梓宮之東。 大駕至紅箭門外, 降輿入幄次, 具衰服去杖, 入就紅箭門內版位, 俯伏哭四拜。 仍奉審欑宮, 又上陵奉審, 入幄次。 是日, 上親行遷奠, 方相氏先至退壙上, 以戈擊四隅。 攝通禮進靈座前, 啓請乘輿, 詣吉帷宮, 啓請降輿陞座, 內侍奉魂帛函, 安於靈座。 攝通禮進梓宮前, 啓請陞輴, 卽玄宮, 左議政帥舁梓宮官, 奉梓宮, 從輪輿上陞輴。 擔士奉輴左回北首, 將卽玄宮, 宮人皆哭。 上出次杖哭, 至奉辭位, 文武百官皆哭從。 輴至隧道閣, 上入小次。 左議政帥舁梓宮官, 以輪輿奉梓宮, 覆以素錦褚, 從輪輿上, 進安於退壙散輪上, 去素錦褚, 奉審解裹。 用轆轤, 安退壙內輪輿上, 右議政申晩, 再整棺衣銘旌。 上就傳玉帛位, 奉哀冊官, 奉哀冊跪授近侍, 近侍跪進, 上受之, 傳于領議政。 【時領議政病未從, 左議政代行。】 左議政金尙魯北向跪受, 奠之於退壙之西。 奉玉帛官奉玉帛, 跪授近侍, 近侍跪進, 上受之, 傳于左議政。 左議政北向跪受, 奠於哀冊之南。 上還就奉辭位, 國葬都監提調洪象漢, 黻黼翣及畫翣於梓宮兩旁。 上俯伏哭, 盡哀四拜, 百官皆俯伏哭四拜。 上還幄次, 執義朴昌潤監閉, 右議政覆土九鍤, 下誌石。 上出次詣靈位前跪, 奉虞主櫃, 以香湯浴主, 拭以巾, 上具衰服去杖, 盥手陞詣卓前西向立, 親題前面。 內侍奉虞主, 安於靈座, 魂帛函置其後。 有司進禮饌, 尙食入設於靈座前, 上香酌酒。 典言跪讀祝文, 上俯伏哭四拜, 還幄次。 上杖出詣辭陵位, 俯伏哭四拜, 出就紅門外幄次。 內侍奉虞主櫃, 安於輦, 魂帛函置其後。 攝通禮啓請進發, 儀仗以次前引。 上出次, 就祗迎位, 虞主輦至。 上鞠躬遂乘輦, 至敬陵前路。 虞主輦及大駕少駐, 陞降如儀。 至晝停所, 內侍奉虞主櫃, 安於靈座, 上降輦入幄次。 有司進禮饌, 竝如朝夕奠。 攝通禮進靈座前, 啓請降座乘輦, 上出次, 乘輦遂進發。 王世子出就城門外慕華館, 祗迎神輦, 俯伏哭盡哀, 至宗廟前路, 上俯伏哭極哀。 虞主輦及大駕少駐, 陞降如儀。 上隨神輦, 入建福門, 至孝昭殿階上, 內侍奉虞主櫃, 安於靈座, 上親行初虞祭如儀。
-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56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