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영조실록89권, 영조 33년 5월 26일 병진 3번째기사 1757년 청 건륭(乾隆) 22년

부사직 정간이 올린 복제에 대한 상서

부사직 정간(鄭榦)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의례(儀禮)를 살펴보건대, 참최(斬衰)에는 관구(管屨)를, 자최(齊衰)에는 소구(疏屨)를, 부장기(不杖朞)에는 마구(麻屨)를 자최 3월(齊衰三月)과 대공(大功)에는 승구(繩屢)를 신고, 소공(小功)과 시마(緦麻)는 복(服)이 가벼워서 그 신의 이름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관구·소구·마구·승구는 복(服)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지만, 최복에는 진실로 신[屨]이 없을 수 없으므로, 신은 그 등급을 뒤섞이게 하여 어지럽힐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경자년096)갑진년097) 두 해의 의주(儀註)에는 모두 관구를 착용하였으니, 상하(上下)의 복이 모두 참최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술년098) 에는 성상의 복은 자최 3년이 되고, 종친과 문무 백관의 복은 부장기가 되니, 성상께서는 소구를 신었어야 마땅하고, 신하들은 마구를 신었어야 마땅한데, 종친과 문무 백관이 동일하게 소구를 착용하였으니, 진실로 변별(辨別)하는 데 부족하였습니다. 금년에 신하의 복은 경술년과 같이 부장기이므로, 마땅히 마구를 착용해야 하는데, 예조에서 행회(行會)하여 종친과 문무 백관에게는 최복을 입게 하면서 원래 신의 이름을 빠뜨리고 백피화(白皮靴)를 대신 신도록 하였으니, 백피화란 바로 공복(公服)에 착용하는 것입니다. 경술년의 소구를 비록 상하의 복에 뒤섞어 착용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후한 편을 따르는 뜻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분은 성모(聖母)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복제(服制)인데, 그 신의 이름을 빠뜨려서 시마복(緦麻服)이나 소공복(小功服)과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미안(未安)한 일입니다. 위에서는 최질(衰絰)을 입고, 아래에서는 공복에 착용하는 백피화를 신는다면, 어찌 심하게 뒤섞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대체로 유사(有司)의 신하가 《오례의(五禮儀)》를 준용(遵用)하였지만 줄어든 것이 그렇지 않음이 있어서입니다. 대저 《오례의》에 참최 이하는 모두 백피화를 착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최복이란 바로 생포(生布)로 감싼 모자와 띠를 착용하고, 생포로 된 단령의(團領衣)를 입는 것이니, 바로 선정신 서경덕(徐敬德)이 말한 장포(長布)의 옷은 서인(庶人)에 가깝다는 것으로서, 공복을 조금 변절(變節)시켜서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비록 최복이라고 말하지만 곧 공복이니, 백피화를 신게 하는 것 또한 저절로 서로 알맞을 것입니다. 경자년 이후로 방상(方喪)099) 의 제도는 오로지 주 자 복의(朱子服議)를 적용하여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 천고(天古)의 고루(固陋)함을 씻고 관질(冠絰)과 의상(衣裳)을 모두 고제(古制)를 준용하였으면, 어찌 유독 신[屨]만은 그 복(服)에 맞는 마구(麻屨)를 버리고 예경(禮經)에도 드러나지 않는 백피화를 착용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또 삼가 생각하건대, 존귀(尊貴)함도 같고 복도 같은데, 경술년에는 구(屢)를 착용하게 하였으니, 어찌 전례에 익숙하지 못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변경시킬 의도가 있어서입니까? 어찌하여 앞뒤가 자못 다른 것입니까? 구라는 물건이 비록 미미한 것이지만, 그것을 착용함에 있어서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고운 것을 가만히 보아넘길 수 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최복이 예제(禮制)에 맞지 않으면 차라리 최복을 입지 않아야 한다.’ 하였으니, 비록 복제(服制)로써 결단하더라도 제도가 예제에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개정해야 할 바를 생각지 않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영종(寧宗) 때에 유사(有司)가 흑사[漆紗]와 천황(淺黃)으로 된 복을 잘못 착용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계빈(啓殯)과 발인(發靷)에 복제(服制)를 변경하는 절차로 인하여 다시 초상(初喪)의 복을 착용함으로써 이미 지나간 잘못을 추후에 고칠 것을 청하니, 영종이 조칙(詔勅)을 내려 그대로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잘못된 전례를 고친 하나의 큰 증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신의 이 글을 가지고 위로 대조(大朝)께 계품(啓稟) 하시고, 아래로 대신과 유신에게 하문하셔서 발인하는 날에 이르러 백피화를 버리고 마구를 착용하신다면, 방상(方喪)하는 제도가 순수하여 한결같이 바른 데로 돌아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구차한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50면
  • 【분류】
    정론(政論) / 의생활(衣生活) /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

  • [註 096]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 [註 097]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 [註 098]
    경술년 : 1730 영조 6년.
  • [註 099]
    방상(方喪) : 임금이 죽으면 신하는 자기 어버이가 죽은 것에 준하는 마음으로 3년 동안 상을 지켜야 한다는 것.

○副司直鄭榦上書, 略曰:

臣謹按儀禮, 斬衰菅屨, 齊衰疏屨, 不杖朞麻屨, 齊衰三月與大功同繩屨, 小功、緦輕沒其屨名。 蓋菅、疏、麻、繩, 隨服漸殺, 衰固不可無屨, 屨不可錯亂其等殺也明矣。 是以庚子甲辰兩年儀註, 皆用菅屨, 上下服俱是斬衰故也。 庚戌則上服爲齊衰三年, 宗親、文武百官之服爲不杖朞, 上服宜疏屨, 下服宜用麻屨, 而宗親、文武百官同用疏屨, 實欠別白也。 今年臣服, 與庚戌同是不杖朞, 宜用麻屨, 而儀曹行會, 宗親、文武百官衰服, 元沒屨號, 代以白皮靴, 白皮靴者, 卽公服所著也。 庚戌疏屨, 雖混同上下服而猶歸從厚之義。 今爲二聖母服朞, 何等重制, 而沒其屨號, 與緦、小功無異, 固已未安。 而上襲衰絰, 下着公服之皮靴, 豈非斑駁之甚乎? 此蓋有司之臣遵用《五禮儀》, 而煞有不然者。 夫《五禮儀》斬衰以下, 俱用白皮靴。 然其所謂衰服, 乃生布裹帽、帶, 生布團領衣, 卽先正臣徐敬德所謂 ‘長布之衣, 近於庶人’ 者, 而不過以公服稍示變節而已。 雖曰衰服, 便是公服, 則承以白皮靴, 亦自相稱。 而庚子以後方喪之制, 專用。 《朱子服議》, 一洗以來千古之陋, 冠絰、衣裳悉用古制, 則何獨於屨, 反捨其服所稱之麻屨, 而乃用《禮經》不現之皮靴耶? 且伏念尊同服同, 而庚戌用屨, 今年用靴, 豈未諳已例耶? 抑有意變更耶? 何前後之殊異也? 屨之爲物雖微, 而其所爲用則不輕, 寧可約綽看過耶? 曰, "衰與其不當物, 寧無衰服," 雖以服制爲斷, 制不當物, 則盍思所以釐正乎? 昔 寧宗時, 有司誤用漆紗、淺黃之服, 朱子請因啓殯、發靷變制之節, 復用初喪之服, 追改旣往之失, 寧宗詔從之。 此實改謬例之一大證也。 伏乞邸下, 將臣此章, 上稟大朝, 下詢大臣及儒臣, 及今發靷之日, 去皮靴著麻屨, 則方喪之制粹然一歸於正, 無因循苟且之弊矣。

王世子答曰: "令該曹稟處。"


  • 【태백산사고본】 63책 89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50면
  • 【분류】
    정론(政論) / 의생활(衣生活) / 왕실(王室)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