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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4월 19일 병진 2번째기사 1756년 청 건륭(乾隆) 21년

이종성·홍봉한·원인손을 인견하고 남한 산성의 이정 사목을 정하다

임금이 판부사 이종성(李宗城),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봉한(洪鳳漢), 사정 어사(査正御史) 원인손(元仁孫)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이 종성에게 묻기를,

"남한 산성의 일을 경이 시험삼아 그 편리 여부를 말해 보라."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이번에 남한 산성에 보낸 어사는 무슨 일로 내 보내셨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留守)가 ‘한번 진(鎭)을 나간 이후로 광주가 곧 외공방(外工房)이 되어 여러 가지 폐막(弊瘼)에 손을 대기가 아주 어렵다.’며 어사를 보내 한번 이정(釐正)할 것을 청하였기에 명했던 것이다."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어사 원인손이 신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남한 산성 원역(員役)의 요과(料窠)가 너무 많아 그것을 이정하기 위해 보낼 것을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원역의 요과는 유수가 스스로 이정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 조정이 엄하다면, 어찌 감히 어사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체통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지할 수 없으니, 어사로 하여금 다른 일을 이정토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신은 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신도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뜻은 오로지 어사를 청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단지 요과 때문만이라면 과연 명분(名分)이 작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어사로 하여금 가서 군향(軍餉)을 살펴 보게 한다면 그 명분이 조금 옳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요과는 저절로 그 속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설령 신이 힘을 다해 한다 하더라도 모래를 모아 제방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유수의 지위가 높기 때문에 그 봉직(奉職)하는 바가 끝내 부윤(府尹)만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수어사(守禦使)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영재(營財)를 함부로 쓸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영고(營庫)가 함께 관청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범하여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유수를 혁파하고 부윤을 복구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장신(將臣)의 사체로는 감히 스스로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만약 어사를 보내어 작정해 수를 나누게 한다면 혹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앙달(仰達)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수어사는 상관이 되기 때문에 유수가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어사가 부윤을 겸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으니, 환곡이 날로 모손(耗損)이 되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본부(本府)를 맡았을 때 12만 석이던 것이 6년 사이에 남은 것은 단지 6만 석이라고 하니, 1년에 1만 석이 줄어든 것입니다. 이번에 어사를 보내어 만약 이 일을 이정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신(先臣)이 부윤으로 있을 때는 단지 두 명의 군졸이 주야로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는데, 들으니 그 뒤에 증가하여 5, 6명이 되었다 합니다. 신이 유수가 되었을 때 여섯 개의 촉롱(燭籠)을 말 앞에 늘어 세우는지라 깜짝 놀라 물어보니 ‘훈국(訓局)의 예에 의해 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장대(張大)하게 함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사는 군향(軍餉)을 이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원인손이 말하기를,

"군향의 일은 단지 문서만 봅니까? 아니면 번고(反庫)092) 까지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고하는 것은 어렵다. 군수은(軍需銀)과 별고(別庫)를 직접 적간(摘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이번에 남한 산성 어사의 이른바 이정할 일이란 다음과 같다.

1. 12만 석의 군향이 6년 사이에 겨우 6만석만 남아 있다고 하니, 환곡을 받음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새나간 것이다.

1. 수어사를 광주 유수로 삼은 것은 뜻이 대개 수어사의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균역청(均役廳)에 보태고자 한 것으로, 그때 획급(劃給)한 것이 5백 석에 불과했으니, 마땅히 균역청에 바쳐야 할 것은 곧 4분의 3이 된다. 그뒤 제도(諸道)의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영속미(營屬米) 외에 제반 복정(卜定)093) 을 탕감해 주었는데 이 또한 뒤섞여 들어갔다고 하니, 이미 수어사를 유수로 삼은 본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1천 5백 석의 곡식을 얻었는데 어찌 그래도 부족하여 근 1천 석의 모곡(耗穀)을 청해 얻었고 이미 얻은 뒤에 그 모곡을 혹은 다 써서 도리어 본래의 군향을 썼으니, 이 또한 모축(耗縮)의 한 단서인 것이다.

1. 그때 하교한 것이 어떠하였던가? 그럼에도 무릇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너무 장황(張皇)하게 떠벌렸으니 군향이 날로 줄어들고 용도가 텅빈 것은 전적으로 이에 말미암는 것이다. 어사는 이 세 가지 일에 대해 그 폐단을 궁구하고 혁파할 것을 생각하여 조목별로 나열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에게 이르기를,

"뒷날 전강(殿講)의 일차(日次) 때 경도 모름지기 같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일후에 비국(備局)에서 입시할 때에 원임(原任)도 또한 일체 입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번에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두 영(營)에 대해 번상(番上)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도감군(都監軍)만 장번(長番)을 서게 되었으니, 딱합니다. 금위영·어영청의 군사가 병이 난다면, 도감의 군사만 유독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이홍술(李弘述)이 훈장(訓將)이 되었을 때 금위영·어영청의 번상을 정지시킨 요미(料米)를 훈국(訓局)에 이급(移給)하여 훈국의 번을 갈아드는 군사는 위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에 또한 폐지되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금위영·어영청에서 으레 받는 돈을 훈국에 이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므로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금장(禁將) 구선행(具善行)을 입시하라 명하여 곡절을 하순한 뒤에 이어서 전교를 내려 금위영·어영청 두 영의 여수전(旅需錢)을 초하루가 되기를 기다려 도감에 실어보내어 세 곳의 체직군(替直軍)에게 나누어 주게 하되, 비록 이번 이후에도 두 영의 향군(鄕軍)이 정번(停番)하는 일이 있으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뜻을 정식으로 삼게 하였다. 유신(儒臣) 홍재(洪梓)가 〈《시경》〉의 대명장(大明章)을 읽고 홍준해(洪準海)《시경》의 역박장(棫樸章)의 문의(文義)를 읽기를 마치자, 홍자가 이제 막 북막(北幕)으로부터 오면서 목격한 북민(北民)들이 사망한 정상을 진달하고, 이어 남관(南關) 두 창고의 곡식을 먼저 이획(移劃)해 들여보내어 종자와 양식을 도와 주게 하고, 영남의 곡식을 더 획급(劃給)하여 남관의 이획한 수를 채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때가 늦은 것 같다. 백성의 급함이 이와 같다면, 유신이 올라온 뒤 즉시 마땅히 써서 올려야 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애초 연석(筵席)에서 마땅히 진달했어야 할 것인데, 이제 비로소 진달하였으니 생색을 내는 뜻에서 나온 것 같다. 모두 베푸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마땅히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내 뜻이 이러하므로 유신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21면
  •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인사(人事)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

  • [註 092]
    번고(反庫) : 창고에 쌓여 있는 물건을 인계 인수하던 일. 관청의 물품을 맡은 관리가 전직(轉職)할 때 후임자에게 물건을 하나하나 넘겨 주고 점검하던 것을 말함.
  • [註 093]
    복정(卜定) : 공물(貢物) 이외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상급 관청에서 결정하여 하급 관청으로 하여금 각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납입케 하던 일.

○上召見判府事李宗城廣州留守洪鳳漢、査正御史元仁孫。 上問宗城曰: "南漢事, 卿試言其便否。" 宗城曰: "今番南漢御史, 緣何事出送?" 上曰: "留守以爲 ‘一自出鎭之後, 廣州便作外工房, 諸般弊瘼, 下手極難’, 請遣御史, 一番釐正, 故命之矣。" 宗城曰: "御史元仁孫來見臣以爲, ‘以南漢員役料窠之多濫, 爲其釐正而命送,’ 云。 員役料窠, 留守自可釐正, 若朝廷嚴, 則何敢請御史乎? 國體大傷矣。 然今不可中止, 使御史釐正他事宜矣。" 上曰: "卿言是矣。" 洪鳳漢曰: "大臣以臣爲非, 臣亦自以爲非矣。 初意非專請御史。 而若只爲料窠, 則果名小耳。" 上曰: "若使御史, 往視軍餉, 則其名差可。 而所謂料窠, 可以自入其中矣。" 鳳漢曰: "設令臣盡力爲之, 如聚沙築防。 留守位高, 其所奉職, 終不如府尹矣。 前則守禦使在京, 故不敢濫用營財, 今則營庫同入於官廳, 不得不犯用。 爲今之計, 莫如罷留守復府尹。 將臣事體, 不敢自達, 若送御史, 酌定分數, 則或可救弊, 故仰達矣。" 上曰: "何以則好耶?" 宗城曰: "守禦使爲上官, 故府尹有所畏憚。 今則守禦使兼府尹, 故無所畏憚, 還穀之日就耗損, 亦必以此。 臣曾任本府時爲十二萬石, 六年之間, 所餘只爲六萬石云, 一年減一萬石矣。 今送御史若釐正此事則好矣。 先臣爲府尹時, 只有二(病)〔兵〕 卒晝夜來待, 聞其後增爲五六名。 臣爲留守時, 六燭籠羅立馬前, 驚問之則, 曰, ‘依訓局例爲之。’ 其張大至此矣。" 上曰: "然則御史釐正軍餉可也。" 元仁孫曰: "軍餉事, 只觀文書乎? 抑反庫乎?" 上曰: "反庫則爲難。 軍需銀及別庫, 親摘奸可也。" 仍命書傳敎曰: "今者南漢御史所謂釐正者。 一則十二萬石軍餉, 六年之間, 僅有六萬, 非捧糴不勤, 必也滲泄。 一則守禦使之爲廣州留守, 意蓋省守禦浮費, 以補均廳者, 而其時劃給不過五百石, 則當納均廳者, 卽四分之三。 而其後因諸道監、兵營營屬米外, 諸般卜定蕩滌, 此亦混歸云, 已非守禦使爲留守之本意。 而旣得此一千五百石之穀, 則其何猶爲不足, 請得耗穀近千石, 旣得之後, 其耗或盡, 反用本餉, 此亦耗縮之一端也。 一則其時下敎若何? 而凡諸等事, 過爲張大, 軍餉之日縮, 用度之朽然, 專由於此也。 御史將此三者, 究其弊思其革, 條列以奏。" 上謂宗城曰: "後日殿講日次, 卿須同入。" 又命書傳敎: "日後備局入侍, 原任亦令一體入侍。" 鳳漢曰: "見今御營、禁衛兩營停番, 故都監軍幾於長番, 可矜矣。 禁、御軍病, 則都監軍獨不病乎? 前者李弘述爲訓將時, 請以禁、御停番料米, 移給訓局, 以慰訓局替番之軍矣。 今則此例亦廢, 臣意則禁、御例受之錢, 不可不移給訓局, 故仰達矣。" 上卽命訓將金聖應、禁將具善行入侍, 下詢委折後, 仍下傳敎, 以禁、御兩營旅需錢, 待當朔輸送都監, 分給三處替直軍, 雖此後若有兩營鄕軍停番之事, 則依此施行之意著爲式。 儒臣洪梓《大明章》, 洪準海讀 《或棫章》文義訖, 以新從北幕, 目見北民死亡之狀陳達, 仍請以南關兩庫穀, 先爲移劃入送, 以助種糧, 而加劃嶺南之穀, 以塡南關移劃之數, 上曰: "似已後時矣。 民急誠如此, 則儒臣上來之後, 卽當書進, 否則初筵當陳, 而今始陳達, 似出於生色之意。 盡施之豈不難乎? 君臣之間, 不當有隱, 予意如此, 故對儒臣言之矣。"


  •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21면
  • 【분류】
    왕실(王室)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인사(人事) / 군사-병참(兵站) / 재정-국용(國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