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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87권, 영조 32년 2월 15일 계축 1번째기사 1756년 청 건륭(乾隆) 21년

명정전에서 반포한 송시열·송준길을 종향하고 반포한 교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대개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을 14일 사시(巳時)에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했기 때문이었다.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많은 선비를 내어 문왕(文王)을 편안케 하니 청아(靑莪)026) 는 누조(累朝)의 교화를 흡족케 하였고, 양현(兩賢)을 높여 부자(夫子)께 종향함에 조두(俎豆)는 온 나라의 의논을 채택한 것이로다. 이에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을 드날려, 사방(四方)에서 모두 보고 듣게 하노라. 생각건대 세교(世敎)를 부식(扶植)함은, 단지 오도(吾道)를 표장(表章)함에 있도다. 전철(前哲)을 계승하고 후생(後生)을 열어준 공(功)을 본떠 융숭히 포상하는 전례(典禮)를 극진히 하였고, 후학(後學)이 본받을 바탕을 열어 작흥(作興)의 아름다움을 밝혔노라. 아! 성조(聖祖)께서 문치(文治)를 크게 펼치시매, 대현(大賢)이 한 세상에 함께 났도다. 선정(先正) 문정공 송시열은 우뚝 솟은 기상과 바다를 담을 만한 흉회(胸懷)를 가졌으니, 문로(門路)는 정대했고 연원(淵源)은 깊어 지극한 가르침을 일찍이 함장(函丈)027) 에게서 이어받았고, 규모는 크고 문리가 조밀하여 성법(成法)은 한결같이 고정(考亭)028) 을 기준으로 삼았다.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변환(變換)을 겪었어도 평소의 지조는 이험(夷險)에 변치 않았으며, 춘추(春秋)의 존양(尊攘)하는 의리를 맡음에 촌심(寸心)은 오직 강상(綱常)을 밝혔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계합(契合)에 의탁하였으니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이요, 빈사(賓師)의 높은 자리에 처했으니, 이윤(伊尹)029) ·여망(呂望)030) 과 백중지간(伯仲之間)이었다. 경륜(經綸)은 사학(斯學)을 벗어나지 않아 왕도(王道)·패도(覇道)의 구분을 환히 알았고, 전례(典禮)는 제가(諸家)의 것을 절충(折衷)했으니 피사(詖辭)·음사(淫辭)를 확연히 쪼개었다. 뒷사람을 열어 줌에 있어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대유(大儒)로서 심의(深衣)031) 의 전(傳)함을 받았고, 통서(統緖)가 소전(紹前)에 더욱 빛나니 온 세상이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았다. 재주는 왕자(王者)를 보좌했고, 학문은 성인(聖人)의 무리가 되었다. 또한 선정 문정공 송준길은 누항(陋巷)에 오는 봄이나 염계(濂溪)에 개인 달과 같았다. 자질(資質)이 금정(金精)·옥윤(玉潤)과 같아 사림(士林)이 모두 스승으로 추앙하였고 출처(出處)는 기린이 나타나고 봉황이 숨듯 하여 여자와 어린애도 또한 상서로운 줄을 알았다. 복설(復雪)을 스스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종당(宗黨)에서 덕을 같이하는 어진 이를 얻었고, 강설(講說)은 자신의 말을 암송하듯 하였으니 빈석(賓席)에서는 임금의 마음을 모두 계옥(啓沃)하는 책임을 다하였다. 순수한 한 덩어리 화기(和氣)가 어린 곳에 훌륭한 재질(才質)이 9분(分)은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예(禮)를 도타이 하고 풍속에 모범을 보인 것이 실로 수신·제가에 근본을 두었으니 은택이 후세에 끼쳤으며,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도(道)를 호위한 것은 격물(格物)을 궁구(窮究)한 데에 힘입었으니 사문(斯文)에 공이 컸도다. 안정(安定)032) 의 4조(條)는 인재를 가르쳐 각각 성취에 이르게 했고, 속수(涑水)033) 의 한결같은 정성은 자신을 단속하여 평생에 다 쓰지 못했노라. 이는 명세(命世)의 자태로 승당(升堂)의 반열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아! 하남(河南)양정(兩程)034) 이 나온 것은 송나라의 덕이 아름답고 밝을 때였고, 낙민(洛閩)035) 의 일파가 전해짐은 주학(周學)의 진실됨에 의지하였다. 그 글을 외고 그 세대를 논하매 고금이 서로 부합됨을 알겠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스승에게 도를 배웠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도다. 대개 그 충실한 광휘(光輝)의 아름다움은 언어나 문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조예(造詣)가 모두 지극히 고명(高明)한 데 이르렀으니 문(文)으로 넓히고 예(禮)로 요약하였고, 공화(功化)가 오래도록 민멸되지 않았으니 살아서는 영화로우며 죽어서는 슬퍼했노라. 조가(朝家)의 이증(貤贈)이 비록 융숭하다 할지라도 어진 이를 포상하는 상전(常典)에 불과하고, 향사(鄕社)의 연사(禋祀)를 거의 두루 행했으나 어찌 덕을 사모하는 깊은 정성에 걸맞는다 하겠는가? 이에 현관(賢關)의 연장(連章)이 있어, 곧 성묘(聖廟)의 제향(躋享)을 청했도다. 한번 허락을 아낀 지 이미 3기(紀)가 지났으니 대개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요, 공의(公議)가 정해짐은 백년을 기다리지 않아 과연 다같이 호소함을 보게 되었다. 보묵(寶墨)은 원우(院宇)의 게판(揭板)에 빛나니 존상(尊尙)은 선조(先朝) 때부터 시작되었고, 훌륭한 제기(祭器)를 상무(庠廡)에 진설한 것이 엄연하니 숭봉(崇奉)함은 마치 이날을 기다린 듯하다. 온 나라가 고무(鼓舞)함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요, 사도(斯道)를 주장함이 나에게 달려 있다. 이에 문정공 송시열·문정공 송준길을 문묘의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종사(從祀)하노라. 아! 예의(禮儀)가 이루어지니 달과 별이 밝았고, 반서(班序)에 질서가 있으니 금신(衿紳)이 용동(聳動)하는도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향사(享祀)함을 얻으니 누구인들 보고 느끼는 마음이 없겠는가? 유풍(流風)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새로운 교화를 지음을 기다려 보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마땅히 모두 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 제학 남유용(南有容)이 지어 올렸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10면
  • 【분류】
    왕실(王室) / 사상(思想)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교육(敎育) / 어문학(語文學)

  • [註 026]
    청아(靑莪) : 청아는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靑靑者莪)에 나온 ‘다북쑥이 무성하다’는 것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임.
  • [註 027]
    함장(函丈) : 스승.
  • [註 028]
    고정(考亭) : 주자(朱子).
  • [註 029]
    이윤(伊尹) :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고,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음.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음.
  • [註 030]
    여망(呂望) : 본성은 강씨(姜氏)이며 이름은 상(尙)으로, 그 선조를 여(呂) 땅에 봉했으므로 여씨(呂氏)가 되었음. 위수(渭水) 가에 숨어 낚시질로 소일했는데, 주나라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태공(太公)이 그대 만나기를 바란 지 오래이다."라고 했으므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칭호하였음. 후에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그 공적으로 제(齊)나라에 봉해졌음.
  • [註 031]
    심의(深衣) : 선비의 웃옷. 흰 베로 소매는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선(線)을 두르는데, 위는 사시(四時)를 상징하여 4폭으로 하고, 아래는 1년 열두 달을 상징하여 12폭으로 만들었다 함.
  • [註 032]
    안정(安定) : 호원(胡瑗)의 호.
  • [註 033]
    속수(涑水) : 사마광(司馬光)의 호.
  • [註 034]
    양정(兩程) : 정호·정이.
  • [註 035]
    낙민(洛閩) : 정자(程子:정호(程顥)와 정이(程頣))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자(朱子:주희(朱熹)는 민중(閩中)) 사람이므로 일컬음.

○癸丑/上御明政殿, 親臨頒敎。 蓋以文正公 宋時烈文正公 宋浚吉, 十四日巳時, 從享文廟故也。

王若曰。 生多士以寧文王, 菁莪洽累朝之化, 尊兩賢以從夫子, 俎豆采一國之論。 玆颺十行之絲綸, 俾聳四方之瞻聽。 予惟世敎之扶植, 亶在吾道之表章。 象前哲繼開之功, 克盡褒隆之典, 啓後學矜式之地, 丕闡作興之休。 粤聖祖誕敷文治, 而大賢竝生一世。 有若先正文正公 宋時烈, 壁立氣像, 海涵胸懷, 門路正而淵源深, 至訓早襲於函丈, 規模大而文理密, 成法一準於考亭。 閱陰陽消長之機, 素履不渝於夷險, 任春秋尊攘之義, 寸心獨炳於綱常。 托明良之契, 則君民, 處賓師之尊, 則伯仲。 經綸不外於斯學, 洞然王、覇之分, 典禮折中於諸家, 廓如詖、淫之闢。 敎誨不倦於牖後, 大儒受深衣之傳, 統緖益光於紹前, 擧世寓高山之仰。 才則王者之佐, 學爲聖人之徒。 亦粤先正文正公 宋浚吉, 陋巷春生, 濂溪月霽, 資質若金精、玉潤, 士林咸推以師, 出處如麟見鳳藏, 婦孺亦知爲瑞。 復雪自成家計, 宗黨得同德之賢, 講說如誦己言, 賓席盡沃心之責。 粹然一團氣和處, 展也九分人地頭。 敦禮範俗, 實本於修、齊, 澤流後世, 闢邪衛道, 式資於窮格, 功大斯文。 安定之四條, 誨人才各臻於成就, 涑水之一誠, 律己用不盡於平生。 是謂命世之姿, 無愧升堂之列。 嗚呼! 河南兩程之出, 際德之休明, 一派之傳, 賴周學之眞的。 誦其書論其世, 知古今之相符, 生同時道同師, 亦天意之非偶。 蓋其充實光輝之美, 有非言語文字所殫。 造詣俱極於高明, 博以文而約以禮, 功化不泯於久遠, 生也榮而死也哀。 朝家之貤贈雖隆, 不過褒賢之常典, 鄕社之禋祀殆遍, 曷稱慕德之深誠? 肆陰有賢關之連章, 乃請聖廟之躋享。 一兪之靳已經三紀, 蓋出愼重之思, 公議之定不待百年, 果見僉同之籲。 寶墨耀院宇之揭, 尊尙粤自先朝, 華籩儼庠廡之陳, 崇奉若待是日。 鼓舞一邦之由此, 主張斯道之在予。 玆以文正公 宋時烈文正公 宋浚吉, 從祀于文廟東、西廡。 於戲! 禮儀成而月星明, 班序秩而衿紳聳。 大德必得祀, 孰無觀感之心? 流風尙有存, 佇見作新之化。 故玆敎示, 想宜知悉。 【藝文提學南有容製進。】


  •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10면
  • 【분류】
    왕실(王室) / 사상(思想)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교육(敎育) / 어문학(語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