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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87권, 영조 32년 2월 1일 기해 3번째기사 1756년 청 건륭(乾隆) 21년

문정공 송시열·문정공 송준길의 문묘 종사를 명하다

임금이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라고 명하였다. 성균 생원(成均生員) 안종철(安宗喆)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멀리 은사(殷師)014) 때부터 이륜(彛倫)이 비로소 퍼졌으나, 삼한(三韓)·삼국(三國)은 모두 이속(夷俗)을 면치 못했으며, 승국(勝國)015) 에 이르러서는 아침에는 금(金)나라를 저녁에는 원(元)나라를 섬기며 오직 강약(强弱)을 살펴 향배(向背)를 결정했습니다. 오직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에 이르러서는 전조(前朝)의 신 정몽주(鄭夢周) 등과 더불어 존주(尊周)의 의(義)를 맨 먼저 세웠고,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어지러움을 안정(安定)시켰으며, 왕업(王業)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 열성(列聖)께서 태조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고, 목릉(穆陵)016) 에 이르러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마침내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인묘(仁廟)의 마음은 곧 목릉의 마음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천지가 무너지고 갈라지는 변란을 만나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이를 계술(繼述)하여 대의(大義)를 밝힐 것을 임무로 삼아 겸손한 말로 어진 이를 불러들여 연(燕)나라 소왕(昭王)의 사업을 기약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학문에 깊은 큰 유자(儒者)로서 연빙(延聘)의 예(禮)에 응해 나온 사람이 바로 우리 두 선정(先正)이 아니겠습니까? 성조(聖祖)의 명철(明哲)하심으로서 반드시 두 선정을 허례(虛禮)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세대를 추앙하여 논하였으니, 두 신하의 어짊이 일대(一代) 제유(諸儒)들의 미칠 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큰 꾀를 세우고 명(命)을 정하여 나라 안을 다스리고 외이(外夷)를 물리치려고 한 것은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법문을 준수하여 털끝만치라도 잡백(雜伯)·가인(假仁)하거나 구차(苟且)·고식(姑息)함이 없었으나, 그 대업(大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늘이 실로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다만 그 강명(講明)하고 병집(秉執)한 것은 아홉 번을 죽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태조께서 존주(尊周)한 공을 미루어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만세의 기강을 바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임하여 내렸던 여덟 자(字)의 훈계에 이르러서는 오직 ‘의(義)’ 한 글자를 생사(生死)의 가계(家計)로 삼았음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천지에 세워도 어긋남이 없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선정(先正)의 평소 학문이자 평소 뜻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우리 열조(烈祖)께서 종주(從周)했던 가전(家傳)·심법(心法)은 두 선정에 힘입어 천명되었던 것입니다. 근래 세강 속말(世降俗末)한 데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이 오히려 명의(名義)를 범할 수 없고 난역(亂逆)을 반드시 토벌해야 할 것을 알아, 옛날에 갑을(甲乙)을 논하던 자들이 선정의 도를 받들어야 함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어 한 사람도 이의(異議)가 없으니, 공렬(功烈)의 큼과 수립(樹立)의 탁월함이 실로 동유(東儒)의 집대성(集大成)이라고 하겠습니다. 왕자(王者)가 일어나 안팎의 믿을 만한 사적을 채방(採訪)한다면 공자·주자《춘추(春秋)》의 통서(統緖)를 두 선정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신하의 도는 다만 동방의 종사(宗師)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천하 만세의 종앙(宗仰)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성묘(聖廟)에 제향(躋享)하는 전례(典禮)에 의심을 둘 수 있겠습니까? 아! 그 땅으로 말하자면 하늘 동쪽의 한 모서리이고, 그 크기로 말하자면 중국의 일개 주현(州縣)이 되지 못하나, 이에 묘연(眇然)한 한낱 몸으로 만세의 강상(綱常)을 임무로 삼았으니, 이는 실로 동방의 큰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선정의 도를 표장(表章)함은 곧 이른바 열조(烈祖)의 뜻을 환히 밝히는 것이니, 이는 신 등이 한 번·두 번 글을 올리고 다섯 번·여섯 번 올리고서도 그만둘 줄을 모르는 바입니다. 아!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오니, 오직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때에 촉감(觸感)되어 감회(感懷)가 일어나 무릇 사절(死節)한 신하에게 사제(賜祭)하여 추도(追悼)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두 신하를 종사(從祀)하는 일만은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소대(昭代)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대조(大朝)께 품(稟)하여 즉시 시행토록 해 주시어 사문(斯文)을 빛내소서."

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大臣)·예관(禮官)·태학 장의(太學掌議)를 소견하고 하유하기를,

"전날 종향의 허락을 아낀 것은 대개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고, 공론이 아니면 할 수 없으며, 기회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소(疏)를 올린 유생을 불러 보고서 비로서 대동(大同)의 논(論)임을 알았는데, 이것이 그때이고 이것이 공론이며 이것이 기회이니, 내가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국시(國是)가 비로소 크게 정해졌고 사림(士林)이 더욱더 빛나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08면
  • 【분류】
    사상(思想) / 인물(人物) / 왕실(王室) / 교육(敎育) / 정론(政論) / 인사(人事)

○上命文正公 宋時烈文正公 宋浚吉從祀文廟。 成均生員安宗喆等上書, 略曰:

惟我東方, 粤自殷師, 彝倫始敍, 而三韓、三國幷不免夷俗, 至於勝國, 朝, 惟視强弱而向背之。 至我太祖大王, 與前朝臣鄭夢周等, 首建尊之義, 回軍靖亂肇造王業。 伊後列聖以太祖之心爲心, 及至穆陵, 至誠事大, 卒被再造之恩。 嗚呼! 仁廟之心, 卽穆陵之心, 而不幸値天地崩坼之變, 竟未能伸其志。 則肆我孝宗大王, 繼述而擔荷之, 卑辭招賢, 必期燕昭之事業。 當此之時, 以邃學宏儒, 出膺延聘之禮者, 非我兩先正乎? 以聖祖則哲之明, 必不爲虛禮於兩先正, 則尙論其世者, 可知兩臣之賢, 非一代諸儒之所及也。 蓋其紆謨定命, 修內攘外者, 一遵朱子之法門, 無一毫雜伯假仁, 苟且姑息, 而若其大業之未成, 則天實使然。 第其所講明而所秉執者, 有九死而不變者, 故嘗推太祖之功, 而追上徽號, 以正萬世之綱。 及其臨歿八字之訓, 則惟以一義字爲生死家計者, 斷然可知。 倘所謂 ‘建天地而不悖, 質鬼神而無疑, 俟百世而不惑’ 者, 非先正素學素志耶? 惟我烈祖從之家傳心法, 實賴兩先正而闡明之。 及至近日之衰末, 人猶知名義之不可犯, 亂逆之必可討, 昔之爲甲乙之論者, 無不知尊先正之道, 而一口無異辭, 則功烈之大樹立之卓, 實爲集東儒之大成。 有王者起而採訪內外, 服之信史, 則不得不以 《春秋》之統, 歸之於兩先正。 然則兩臣之道, 不特爲東方之所宗師, 亦將爲天下萬世之所宗仰。 如是而尙可疑於躋享聖廟之典乎? 嗚呼! 以其地則天東一隅也, 以其大則不能中國之一州縣, 而乃以眇然一身, 播荷萬世之綱常, 此實東方之大幸也。 然則表章先正之道, 卽所以彰明烈祖之志也, 此臣等所以一書再書, 至於五六書而不知止也。 嗚呼! 天運循環, 舊甲重回, 惟我聖明, 撫時興感, 凡厥死節之臣, 無不賜祭而追悼之。 獨於兩臣從祀之擧, 未及施行者, 豈非昭代之欠典乎? 伏願亟稟大朝, 卽賜施行, 以光斯文焉。

是日, 上召見大臣、禮官、太學掌議, 諭曰: "前日之靳許從享者, 蓋非其時則不可爲, 非其公則不可爲, 非其機則不可爲故也。 頃日召見疏儒, 始知爲大同之論, 此其時也, 此其公也, 此其機也, 予所以特允其請者也。" 於是, 國是始大定, 士林益增光。


  •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08면
  • 【분류】
    사상(思想) / 인물(人物) / 왕실(王室) / 교육(敎育) / 정론(政論)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