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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86권, 영조 31년 10월 13일 계축 2번째기사 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찬집 당상이 입시하자 《천의소감》의 내용에 대해 말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찬집 당상(纂輯堂上)도 같이 입시하였다. 제조(提調) 이철보(李喆輔)내자시(內資寺)의 정조(正朝) 조반주(早飯酒)와 단오(端午)에 새로 달인 향온(香醞)과 명일(名日)의 물선주(物膳酒)와 제석(除夕)의 방포주(放砲酒)의 존폐를 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東朝)에 올리는 것 외에는 모두 혁파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찬집하는 책 가운데에 공사(供辭)를 넣는다면 감란록(戡亂錄)과 다름이 없다. 찬수하는 뜻은 대개 그릇된 것을 점점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무신년378) 의 일에 대하여 너무 관대함을 주장하였는데, 지금 한 역적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만연(蔓延)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즐겨서 하는 일이겠는가? 내가 어렸을 때에 파리채[蠅拂子]를 쓰기 좋아하였는데, 지금은 차마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 비록 하나의 미물(微物)이라도 차마 죽일 수 없는데, 더구나 사람을 죽여서 법을 바르게 함을 어찌 즐겨서 하는 것이겠는가? 책자의 법의(法意)는 신중하여 떳떳한 마음이 있는 자가 보면 모두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되는데, 한번 이 가운데에 들어가면 실로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렵다. 근년에 이위보(李渭輔)박상검(朴尙儉)의 일로써 이태좌(李台佐)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굳게 지키는 것이 많아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에게도 지켰는데, 경 등이 알고 있는가? 내가 진정시키지 않았으면 어느 경지에까지 이를지 모를 일이다."

하였다. 임금이 책자를 열람하다가 석렬(石烈)필정(必貞)의 일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를 쓴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찬수 당상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밤을 새워서 체포되었으니, 어찌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 판금오(判金吾)는 누구인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강현(姜鋧)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현이태좌가 어찌 같이하였겠는가?"

하매, 찬수 당상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정신(李正臣)도 옥사(獄事)를 다루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의현(李宜顯)이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을 청하였으며, 정수기(鄭壽期)도 또한 국문(鞫問)에 참여하였는데, 신이 모두 책 가운데서 뽑아버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묵세(墨世)에게는 매우 잔인하였다. 백망(白望)의 4촌이라 하여 반드시 얽어 넣으려 하여 장폐(杖斃)하기에 이르렀다. 이의연(李義淵)의 일을 어찌 기록하였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가 기록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연경묘(景廟)를 위할 마음이 없었는데, 홍계희의 이러한 곳들은 매우 잘못이다. 이봉명(李鳳鳴)은 비록 사람은 한미(寒微)하나 곧 소장(疏章)을 처음 발단(發端)한 사람이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유응환(柳應煥)의 소장과 같은 것도 모두 실렸다면, 방만규(方萬規)의 소장도 또한 넣어야 하겠는가? 이는 대개 이광좌(李光佐)를 끌어들이려는 뜻이지마는, 이광좌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과 같이 취급함은 옳은 일인가?"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이광좌는 비록 조태구·유봉휘와는 다르나, 어찌 기록할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책자를 두루 열람하고 어필(御筆)로 깎고 지우며 말하기를,

"가을의 숙살(肅殺)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봄의 따스함이 있는 것이니, 살리는 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박필주(朴弼周)의 수차(手箚)는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의 글을 어찌 이들 문자에 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명리가 말하기를,

"이광좌의 말에 ‘연명 차자(聯名箚子)는 정상은 반역(反逆)이 아닌 듯하나, 마음은 반역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윤(伊尹)의 고사(故事)379) 에 비겨서 말하기를, ‘이러한 마음이 있으면 옳거니와 이러한 마음이 없으면 반역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광좌를 어떻게 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이광좌가 대리(代理)의 일에 대하여 끝내 꺼림칙한 뜻이 있었으니, 싣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의리를 밝히려 하는데, 이로 인하여 또 허다한 사람을 영구히 막아놓는다면 이것이 어찌 처음의 마음이겠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의(聖意)가 이에 미치시니,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광좌에 이르러서는 전혀 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관직을 추삭(追削)하는 것만도 또한 일률(一律)인데, 어찌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같은 죄벌을 준 뒤에라야 마음에 흡족하겠는가?"

하였다. 이천보원경하조명리가 말하기를,

"신 등도 또한 그 죄율(罪律)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파헤치지 않을 수 없는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광좌를 애석히 여기겠는가? 일찍이 관일(貫日)의 충성으로써 말하였는데 지금 와서 극적(劇賊)의 죄를 더한다면, 앞뒤의 일이 어찌 크게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오로지 나의 원량(元良)과 원손(元孫)을 위하여 깊이 논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광좌에게는 실로 인심을 선동한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광좌와주(窩主)380) 로 삼아 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단 말인가?"

하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교(聖敎) 가운데 ‘와주’ 두 자(字)가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생 천자(門生天子)381) 의 말을 또 어찌 수록(收錄)하였는가?"

하고, 옥음(玉音)이 목이 메어 울먹이며 말하기를,

"경 등이 이런 문자를 억지로 실어서 나에게 욕이 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하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교가 이러하시니, 신 등의 아픈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8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99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출판-서책(書冊) / 재정-진상(進上)

  • [註 378]
    무신년 : 1728 영조 4년.
  • [註 379]
    이윤(伊尹)의 고사(故事) :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이윤이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음.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음.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舞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음.
  • [註 380]
    와주(窩主) : 소굴의 우두머리.
  • [註 381]
    문생 천자(門生天子) : 당(唐)나라 말엽에 환관(宦官)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황제를 폐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였는데, 환관이 황제 보기를 시험관이 문생(門生)을 보듯한다고 하여 생긴 말임.

○藥房入診, 纂輯堂上同爲入侍。 提調李喆輔以內資寺正朝早飯酒、端午新煮香醞、名日物膳酒、除夕放砲酒存罷爲稟, 上曰: "東朝所進外, 一倂革罷。" 上曰: "纂輯冊中若入供辭, 無異《勘亂錄〔戡亂錄〕。 纂修之意, 蓋欲使詿誤者漸少也。 予於戊申, 太持寬緩, 今因一賊蔓延至此, 是豈樂爲哉? 予幼時好用蠅拂子, 今則不忍更用。 雖一微物不忍殺之, 況殺人正法, 豈樂爲也哉? 冊子法意愼重, 有秉彝之心者見之, 皆當髮竪, 而一入此中, 誠難爲人。 頃年李渭輔尙儉事, 至及李台佐, 豈不怪異乎? 予多固守處, 於守之, 卿等知之乎? 予不鎭之, 不知當至何境乎?" 上覽至石烈必貞事, 上曰: "書此何意。" 纂修堂上趙明履曰: "經夜就捕, 豈不可疑乎?" 上曰: "其時判金吾誰也?" 明履曰: "姜鋧矣。" 上曰: "姜鋧李台佐, 豈可同爲乎?" 纂修堂上元景夏曰: "李正臣亦按獄, 而故相臣閔鎭遠李宜顯知其冤請放, 鄭壽期亦參鞫, 而臣皆拔之於冊中矣。" 上曰: "墨世甚殘忍。 以白望之四寸, 必欲構織, 至於杖斃矣。 李義淵事, 何以錄之?" 景夏曰: "洪啓禧錄之矣。" 上曰: "義淵無爲景廟之心, 啓禧此等處極非矣。 李鳳鳴雖人微, 乃是首發之疏, 似不可不錄之。 而如柳應煥之疏, 若皆載入, 則方萬規之疏, 亦將入之耶? 此蓋欲引入李光佐之意, 而光佐之同歸等, 其可乎?" 領議政李天輔曰: "光佐雖異於, 豈無可錄之事乎?" 上歷覽冊子, 以御筆刪抹曰: "秋殺之後, 必有春舒, 宜用活法也。" 景夏曰: "朴弼周之手箚, 不可不錄之矣。" 上曰: "山野之書, 何必載之於此等文字耶?" 明履曰: "光佐以爲, ‘聯箚, 迹似非逆, 心 則爲逆’ 云, 而又比之於伊尹故事曰:, ‘有是心則可也, 無是心則逆也’, 光佐焉可拔也?" 景夏曰: "光佐於代理事, 終有未愜之意, 不可不載矣。" 上曰: "予欲爲闡義理, 而因此若又永塞許多人, 則是豈初心乎?" 天輔曰: "聖意及此, 敢不奉承? 而至於光佐, 不可全沒也。" 上曰: "追削其職, 亦是一律, 何必與同罪, 然後快於心耶?" 天輔景夏明履曰: "臣等亦非欲加其罪律, 不可不劈破其根腦故也。" 上曰: "予豈愛惜光佐? 而嘗以貫日之忠言之, 今乃加以劇賊之罪, 則前後事豈不大異乎? 必爲我元良與元孫, 勿爲深論也。" 天輔曰: "光佐實有風動人心之罪矣。" 上曰: "然則以光佐爲窩主, 立論似好耶?" 天輔曰: "聖敎中窩主二字好矣。" 上曰: "門生天子之說, 又何入錄耶?" 玉音仍嗚咽曰: "卿等强載此等文字, 貽辱於予, 何哉?" 天輔曰: "聖敎如此, 臣等痛心益切矣。"


  • 【태백산사고본】 61책 8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99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출판-서책(書冊) / 재정-진상(進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