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소감》의 찬수자들을 인견하고 경종의 승하에 대해 직접 진술하다
임금이 〈《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수(纂修)를 맡은 여러 신하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찬수 당상(纂修堂上)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찬집(纂輯)할 때에 아래에서 감히 조사(措辭)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위에서 지휘하는 하교가 있어야만 신 등이 비로소 찬출(撰出)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어린 임금을 세워서 제멋대로 흉억(胸臆)을 자행(恣行)함은 환시(宦侍)들이 이롭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므로 들은즉 목묘(穆廟)350) 께서 처음 대내(大內)에 들어오셨을 때에 이 무리들이 역시 불만스러운 빛이 있었다 한다. 내가 동위(銅闈)351) 로 들어오자 박상검(朴尙儉)의 무리가 처음에 나에게 빌붙으려 하였다. 그때 대계(臺啓)에 목내선(睦來善)의 복관(復官)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박상검이 나에게 떠보려고 말하기를, ‘위에서 어찌 「빨리 정지하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황형(皇兄)352) 은 갑술년353) 부터 성후(聖后)354) 께 이른 아침과 깊은 밤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간혹 대조(大朝)께 책벌(責罰)을 받을 경우 반드시 바지를 걷고 뵈었었다."
하고, 임금이 한동안 목이 메어 울다가 말하기를,
"황형이 성후께 효도를 하였으니, 자성(慈聖)355) 께도 어찌 차이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가 말하기를,
"이 부분은 아래에서 말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어제(御製)가 있어야만 의란(疑亂)을 깨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부르는 대로 받아 쓰라.’ 하고, 찬수를 맡은 여러 신하에게 하유(下諭)하였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아! 여러 역적들이 망측한 말로 나를 핍박한 것은 하늘이 아시고 조종(祖宗)의 영령이 굽어보시며, 황형이 자세히 아신다. 비록 가슴은 쓰리나 나에게 누(累)가 되겠는가? 다만 말이 동조(東朝)에 핍박이 된 것은 사람의 아들이 된 자로서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으니, 죽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좋을 성싶다. 황형의 지효 지우(至孝至友)의 덕에 누를 끼침에 있어서는 자제(子弟)가 된 자로서 마땅히 눈을 크게 뜨고 가려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스스로 집성(輯成)함이 마땅하니, 어찌 여러 신하를 기다리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아 목이 메인다. 대략을 조목조목 다음에 나열하여 찬수하는 신하에게 붙인다. 아! 우리 황형의 지효(至孝)는 7세에 성후(聖后)를 섬김에 있어 이른 아침이나 깊은 밤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후께서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입시하였을 때에, ‘세자(世子)가 나를 섬김은 소생(所生)보다 낫다.’는 하교까지 계셨고, 임오년(任午年)356) 에 미쳐서는 이와 같은 지극한 효성으로 자성(慈聖)을 섬겼으니, 자성의 지극한 사랑과 황형의 지극한 효성으로 화기(和氣)가 금중(禁中)에 가득하여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칭송하였으니, 이는 바로 사람들이 헐뜯고 이간(離間)할 수 없는 경우인 것이다. 아! 슬프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폐일(吠日)357) ·석천(射天)358) 의 마음을 품고 교문(敎文) 가운데 감히 음참(陰慘)하고 망측한 행배(行盃)359) 등의 말로써 무신년360) 의 역란(逆亂)을 빚어냈으니,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대역(大逆)이다. 그리고 금번의 역적 신치운(申致雲)의 게장[蟹醬]에 관한 초사(招辭)에 있어서는 더욱이 가슴이 선득하고 뼈가 시려서 차마 들을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이는 역적 김일경의 교문에 비길 일이 아닌데, 이 일은 전혀 알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신치운을 정형(正刑)361) 에 처한 뒤에 울며 우리 자성께 아뢰었는데, 자성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황형께서 〈게장을〉 진어(進御)한 것이 동조(東朝)에서 보낸 것이 아니요, 곧 어주(御廚)에서 공진(供進)한 것임을 알았다. 우리 황형의 예척(禮陟)362) 은 그후 5일 만에 있었는데, ‘무식한 시인(侍人)이 지나치게 진어하였다.’는 말로써 효경(梟獍)363) 의 무리가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여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핍박하였다. 이천해(李天海)가 앞에서 창론(倡論)하였고 신치운이 뒤에서 결말을 지었으니, 금번의 일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를 알았겠는가? 아! 비단 나의 마음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 황형도 반드시 저승에서 송구해 하고 슬퍼하실 것이다. 지금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과연 사람의 자식이 된 도리라 하겠으며 사람의 아우가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 황형이 어찌 한갓 우리 두 성후(聖后)께만 지효로 섬기셨겠는가? 계술(繼述)하는 효성은 백왕(百王)을 뛰어넘었다. 아! 경자년364) 이전은 불령(不逞)의 무리가 소인(小人)의 마음으로써 성인(聖人)의 마음을 억측(臆測)하여 감히 ‘그 시기가 있다.’고 하였는데, 경자년 이후 우리 황형께서는 선왕(先王)의 뜻과 일을 계술하여 정사(政事)나 명령에 하나도 변경한 것이 없었으니, 지극하고 위대하시다. 그리고 초년의 세초(歲抄)365) 에 부첨(付籤)366) 한 것은 황형이 뜻을 두었던 바가 아니라 옛날에도 이런 일은 있었는데, 그때에 고집스럽게 다투는 일이 있었으므로 감히 역적 박상검(朴尙儉)으로 인하여 ‘빨리 정지하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하교를 얻어내려 하였는데, 이는 박상검이 필정(必貞)과 교결(交結)하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그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공성(孔聖)께서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를 것이다. [履霜堅氷至]367) ’라고 한 바로서, 이는 내가 역적 박상검의 말을 몸소 들은 것이다. 이들은 효경의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박상검·필정과 은밀히 체결하여 먼저 윤지술(尹志述)을 제거하였다. 아! 우리 황형의 지인 성덕(至仁盛德)으로서 결코 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니, 바로 가정 황제(嘉靖皇帝)368) 가 ‘황형(皇兄)369) 의 본뜻이 아니다.’라고 한 하교와 같은 것이다.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황형께서〉 승하하시니, 못하는 짓이 없는 효경의 마음으로써 우리 황형의 계술하는 대효(大孝)를 은밀히 가리우고는 감히 우리 자성께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로 국책(國策)을 결정하신 일을 원망하고 망측한 말을 조작하여 전하고 또 전해서, 신치운은 그 부도(不道)의 말을 토로하였고 심악(沈)은 그 부도의 마음을 드러내었으니, 분통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분통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불러 쓰는 일이 이에 이르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 두 조목은 30년 동안 하유(下諭)하려다가 차마 하지 못한 일이다. 여러 신하가 나를 위하여 분명히 밝히려고 하는데 내가 만약 차마 못하는 마음만을 지켜서 찬수가 끝나기 전에 하유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낯으로 삼조(三朝)370) 에 우리 자성을 뵈오며, 또한 무슨 낯으로 우리 황형께 돌아가 뵙겠는가? 지금 이 하유는 간략하고 곡진한 것이니, 아! 찬수하는 신하들은 윤문(潤文)하여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8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97면
- 【분류】출판-서책(書冊)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변란(變亂)
- [註 350]목묘(穆廟) : 선조(宣祖).
- [註 351]
동위(銅闈) : 동궁(東宮)의 문이란 뜻으로, 여기에서는 왕세제(王世弟)를 뜻함.- [註 352]
황형(皇兄) : 경종을 가리킴.- [註 353]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354]
성후(聖后) : 인현 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가리킴.- [註 355]
자성(慈聖) : 인원 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를 가리킴.- [註 356]
임오년(任午年) : 1702 숙종 28년.- [註 357]
폐일(吠日) : 중국 촉(蜀) 땅에는 산이 높고 안개가 짙어서 해를 보는 일이 드물므로 개가 해를 보고 괴상히 짖는다는 뜻으로, 식견(識見)이 좁은 사람이 남의 훌륭한 말이나 좋은 행동을 보고 놀라 괴상히 여겨 도리어 이것을 비방함을 비유한 말임.- [註 358]
석천(射天) : 옛날 은(殷)나라 무을(武乙)이 무도(無道)하여 인형(人形)을 만들어 ‘천신(天神)’이라고 하면서 그와 장기[博]를 두되 사람을 시켜 대행(代行)하게 하고는 천신이 이기지 못할 경우 곧 욕을 보이겠다 하면서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우러러 보고 쏘아 맞히면서 하늘을 맞혔다고 한 고사(故事).- [註 359]
행배(行盃) : 한(漢)나라 때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내인 곽현(霍顯)이 태후(太后)로 하여금 술을 장만하게 하고는 이어 천자(天子)를 폐하려고 도모한 일을 말함.- [註 360]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361]
정형(正刑) : 사형.- [註 362]
예척(禮陟) : 승하(昇遐).- [註 363]
효경(梟獍)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獍)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 [註 364]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365]
세초(歲抄) : 양전(兩銓:이조와 병조)에서 6월과 12월에 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기록해서 올려 서용(敍用)하기를 기다리는 것.- [註 366]
부첨(付籤) : 고칠 곳이나 부정확한 곳, 또는 문서(文書)·서적(書籍) 등 참고로 할 부분 따위에 종이 쪽지를 붙이는 일.- [註 367]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를 것이다. [履霜堅氷至] : 이는 서리가 내리면 차가운 얼음이 이른다는 뜻으로, 일의 조짐을 보고 미리 그 화(禍)를 경계하라는 말임.- [註 368]
가정 황제(嘉靖皇帝) : 가정은 명(明)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註 369]
황형(皇兄) : 명나라 무종(武宗)을 가리킴.- [註 370]
삼조(三朝) : 하루에 아침·점심·저녁 세 번 문안하는 일.○上命纂修諸臣入侍。 纂修堂上趙明履曰: "纂輯之際, 自下有不敢措辭者, 必待上指敎, 然後臣等始可撰出矣。" 上曰: "夫立幼主恣胸臆, 宦侍所利。 故聞穆廟初入大內, 此輩亦有不滿之色矣。 予之入銅闈也, 尙儉輩初欲附於我。 其時臺啓請還收睦來善復官, 則尙儉嘗試於予曰, ‘上胡不以亟停勿煩爲答耶?’ 皇兄自甲戌, 於聖后夙夜不離, 或受責罰於大朝, 必捲袴以示矣。" 上因嗚咽良久曰: "皇兄旣孝於聖后, 於慈聖亦豈間然?" 諸臣曰: "此段難以下語, 必有御製, 可以劈破疑亂。" 上因呼寫, 諭纂修諸臣, 文曰:
噫! 諸逆之罔測語逼於予者, 蒼穹昭昭, 陟降下臨, 皇兄俯燭。 其雖痛心, 何累於予? 但語逼東朝者, 爲人子者痛隕欲溘然無知。 其貽累於皇兄至孝至友之德者, 爲子弟者, 其當張目而辨。 此二事, 當自輯成, 何待諸臣? 而思之及此, 心隕嗚咽。 條列大略于左, 以付纂修之臣焉。 噫! 我皇兄之至孝, 七歲事聖后, 夙宵不離。 聖后於故判書閔鎭厚兄弟入侍也, 至有 ‘世子事我, 愈於所生’ 之敎, 及壬午, 以此至孝事慈聖, 慈聖之至愛、皇兄之至孝, 和氣藹然於禁中, 左右侍人莫不欽誦, 此正人無間言者。 而噫嘻痛矣! 逆鏡以射日之心, 敎文中敢以陰慘罔測行杯等說, 釀成戊申之逆亂, 此已亘古所無之大逆。 而至夫今番逆賊致雲蟹醬之招, 尤爲心寒骨冷, 有不忍聞, 噫嘻痛矣! 此非逆鏡敎文之比, 玆事漠無所知。 故正法致雲後, 涕泣入奏我慈聖, 而聞慈聖下敎乃知其時 皇兄所進御者, 非東朝所送, 乃御廚供進也。 我皇兄禮陟, 在於越五日, 而以 ‘無識侍人過進’ 之說, 梟獍之輩故諱事實, 變幻做作, 語逼不敢言之地。 天海倡之於前, 致雲結之於後, 非今番何以知此? 噫! 非徒予心之痛迫, 我皇兄亦必悚慼于冥冥。 今不洞言, 其可謂爲人子之道, 爲人弟之道乎? 噫! 皇兄豈徒事我兩聖后至孝也? 繼述之孝, 度越百王。 噫! 庚子以前, 不逞之徒, 以小人之腹, 度聖人之心, 敢曰自有其時, 庚子以後, 我皇兄繼述先王之志事, 於政於令, 一無更焉, 至哉大哉。 而初年歲抄付籤, 非皇兄之有意, 昔年亦有是事, 而其時有爭執之事, 故敢因逆儉欲得 ‘亟停勿煩’ 之敎, 此在儉、貞交結之前, 故其計莫售。 此正孔聖所謂履霜堅氷至, 而是則予親聽逆儉之言者也。 此輩不耐梟獍之心, 陰結儉、貞, 先除尹志述。 噫! 以我皇兄至仁盛德, 決不爲此, 正若嘉靖皇帝, ‘非皇兄本意’ 之敎也。 計不能售, 而仙馭上賓, 以梟獍無所不至之心, 陰翳我皇兄繼述之大孝, 敢怨我慈聖諺敎定策之事, 做作罔測之說, 傳之又傳, 致雲吐其不道之說, 露其不道之心, 可勝痛哉, 可勝痛哉? 呼寫及此, 心焉欲墜。 此二條, 卅載欲諭不忍者。 諸臣欲爲予痛辨, 予若徒守不忍之心, 不諭於纂修工訖之前, 其何顔三朝我慈聖, 亦將何顔歸拜我皇兄? 今者此諭, 略而盡矣, 咨纂修之臣, 其潤成焉。
- 【태백산사고본】 61책 8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97면
- 【분류】출판-서책(書冊)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변란(變亂)
- [註 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