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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85권, 영조 31년 9월 8일 기묘 4번째기사 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명년 정월부터 경외에서 술을 빚지 말라는 전교

명년 정월부터 경외(京外)에서 술빚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하우(夏禹)가 비록 의적(儀狄)304) 을 소원하게 대하였으나 그가 만든 술은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술을 달게 먹고 즐겨 마시는 경계가 있었지만 하(夏)나라 말기에는 걸(桀)이 있게 되었다. 아! 성품(性品)을 해치고 몸을 상하게 하는 물건임은 단지 전철(前轍)이 밝을 뿐만 아니라 경외에서 곡식을 소모하고 싸우다 살인(殺人)을 하는 것도 모두 이 술에 말미암은 것이다. 전후로 금주(禁酒)하자는 청을 매양 오활하다 하여 듣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게 마련인데, 나라에서는 쓰고 민간에만 금하다면 어찌 근본이 먼저하고 말단이 나중에 하는 뜻이겠는가? 봄·여름에 영(令)을 하지 않다가 가을·겨울의 영(令)을 갑자기 행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여 술동이와 술항아리를 반드시 개울에 쏟아버리고 말 것이다. 술이 비록 좋지 않은 것이나 이 역시 하늘이 낸 물건이 아니겠으며, 우리 백성들이 고생해서 생산한 곡식이 아니겠는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세력이 있는 자는 요행히 면하고 세력이 없는 자만 붙잡히게 되니 어찌 내 뜻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술의 폐단을 익히 알면서 어찌 금하고자 하지 않으랴만 태상(太常)305) 에서 현주(玄酒)를 쓰기 전에는 참으로 금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단(紋緞)은 비록 금했으나 술은 금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금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서 금하랴. 시험삼아 내주방(內酒房)의 술독을 보니, 색이 칠흑(漆黑)과 같아 까마귀나 까치 역시 앉지 않고 있었다. 아! 질그릇이 오히려 이러한데 연한 피부와 창자이겠는가? 갑자기 좋은 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예주(醴酒)가 그것인데, 아! 예주가 어찌 현주보다 낫지 않겠는가? 먼저 이런 뜻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세초(歲初)부터는 위에서는 왕공(王公)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제사와 연례(宴禮)에는 예주만 쓰고 홍로(紅露)·백로(白露)와 기타 술이라 이름한 것도 모두 엄히 금하고 범한 자는 중히 다스리겠다. 내주방(內酒房)과 내자시(內資寺)·종묘(宗廟)에 봉진(封進)하는 것은 예주로 진헌하고, 대전(大殿) 이하는 날짜나 명일(名日)을 물론하고 고묘(告廟)한 후부터는 일체 아울러서 봉진하지 말라. 호군(犒軍)과 농민(農民)은 다름이 있어 공자(孔子)가 향인(鄕人)의 사제(蜡祭)306) 에 대해〈《예기(禮記)》에서〉 말하기를, ‘한 번 당기고 한 번 늦추는 것이 문무의 도이다. [一張一弛 文武之道]’라고 하였다. 군문(軍門)의 호궤(饋饋)에는 단지 탁주(濁洒)만을 쓰고, 농민들의 보리술과 탁주 역시 금하지 말아야 한다. 이 윤음(綸音)을 중외(中外)에 반포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주(醴酒)를 쓰도록 명한 것은 제사와 연례(宴禮)를 중히 여기고 그 맛이 담백한 것을 취한 것이나 후일에 맵고 독하게 하는 폐단으로 유행함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어찌 금주하는 뜻이 있겠는가? 일체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때에 형조 판서 이후(李)가 흉년인 것으로써 동궁(東宮)에게 외방에서 술 빚는 것을 금할 것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듣고서 말하기를,

"나라의 정령(正令) 이 경외(京外)를 어찌 다르게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93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식생활(食生活)

  • [註 304]
    의적(儀狄) : 처음으로 술을 만든 사람.
  • [註 305]
    태상(太常) : 봉상시(奉常寺).
  • [註 306]
    사제(蜡祭) : 12월에 지내는 제사. 납제(臘祭).

○命自明年正月, 禁京外釀酒。 敎曰: "昔夏禹雖疏儀狄, 不去其酒, 故雖有甘酒嗜飮之戒, 末有。 噫! 伐性之斧, 戕身之物, 非但前轍昭昭, 京外耗穀, 鬪鬨殺人, 皆由於此。 前後禁酒之請, 每謂迂闊而不聽。 何則凡事有本有末, 用於國而禁於民, 豈先本後末之意乎? 春夏不令, 而秋冬之令忽行, 則小民懼法, 甕酒罌酤, 必將灌於川渠。 酒雖無狀, 此非天物乎, 其非我元元粒粒辛苦之穀乎? 非徒此也。 有勢者倖免, 無勢者被執, 豈予意哉? 雖然酒弊知之熟矣, 豈不欲禁也, 而太常用玄酒之前, 誠難禁也。 故紋緞雖禁, 酒則勿問, 及今不禁, 更待何時? 試看內酒房瓦子, 色若漆黑, 烏鵲亦不坐。 噫! 土瓦猶然, 況軟膚軟腸乎? 忽得良策, 乃醴酒也。 吁嗟! 醴酒豈不勝於玄酒乎? 先將此意告于太廟, 其自歲初, 上自王公, 下至匹庶, 祭祀宴禮只用醴酒, 紅露、白露、其他以酒爲名者竝嚴禁, 犯者重繩。 內酒房、內資寺、宗廟所封者, 以醴進獻, 大殿以下, 勿論日次名日, 自告廟後, 一竝勿封。 犒軍、農民有異焉, 孔子謂鄕人蜡曰, ‘一弛一張, 文武之道。’ 軍門犒饋, 則只用濁酒, 農人麥酒、濁酒亦勿禁。 以此綸音, 頒布中外。" 又敎曰: "命用醴酒, 重其祭宴, 取其味淡, 而後不無流於辛烈之弊, 若此豈禁酒之意哉? 一體嚴飭。" 時刑曹判書 , 以歲荒, 奏東宮禁外方釀酒, 上聞之曰: "國之政令, 京外何異?" 遂有是敎。


  •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93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식생활(食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