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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84권, 영조 31년 5월 6일 기묘 1번째기사 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내사복에 나가 친국한 윤혜의 공초. 윤혜·김요채 등을 효수하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역적 윤혜(尹惠)가 복주(伏誅)되었다. 윤혜의 문서에 열성(列聖)의 어휘(御諱)가 한 종이에 나란히 쓰여 있는 것이 있어 임금이 놀라고 통분해 그 까닭을 국문하니, 윤혜가 공초하기를,

"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상고하느라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주장(朱杖)으로 때리게 하였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간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 때문에 자세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게 해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느슨하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즉시 보여(步輿)를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가서 종묘를 지나 가마에서 내려 엎드려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부덕(不德)으로 인해서 욕이 종묘에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

하니, 대신과 여러 재상들이 같은 말로 간절하게 간하니, 이에 가마에 올라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러 구경하는 부로(父老)들에게 유시하기를,

"임어한 지 30년에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는데, 올해에 재차 남문(南門)에 임어하니 내가 너희들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하고, 마침내 숭례문(崇禮門)의 누각에 나아가 갑주(甲胄)를 입고 대취타(大吹打)하면서 다시 윤혜를 형신하였다. 윤혜가 공초하기를,

"흉서는 심정연(沈鼎衍)이 짓고 신이 썼습니다."

하고,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지만(遲晩)하였다. 백관을 차례대로 서도록 명하고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으로 하여금 효수(梟首)하여 헌괵(獻馘)하게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이는 바로 원범(元犯)이기 때문에 6월에 군사를 일으키는 뜻을 써서 몸에 갑주를 입었으나, 내가 어찌 즐거이 하는 것이겠는가?"

하니,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죄인에게 형을 시행하는 것은 유사(有司)의 일일 뿐인데 지존(至尊)으로서 어찌 친히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상을 치고 말하기를,

"이종성은 나를 감형(監刑)하는 도사(都事)라 하는가?"

하고, 충주목(忠州牧)에 부처(付處)하라 명하였다. 즉시 헌괵하지 않은 것으로써 훈련 대장 김성응을 잡아다 곤장을 치고 면천군(沔川郡)에 부처하고,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총융사 정찬술(鄭纘述)을 어영 대장으로, 통제사 이장오(李章吾)를 총융사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이미 크게 노한데다가 또 아주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을 깃대 끝에다 매달도록 명하여 백관에게 여러 차례 조리 돌리게 하고 유사하기를,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생각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리라."

하였는데, 승지 채제공(蔡濟恭), 교리 홍명한(洪名漢) 등이 간하니, 중지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는데 경루(更漏)164) 가 다하도록 취타는 오히려 그치지 않았었다. 날이 샐 무렵에야 임금이 비로소 소차를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주를 입은 채 환궁하였다. 이날 죄인 김요채(金耀采)김요백(金耀白)윤혜와 함께 동시에 효시되었는데, 김요채김요백은 바로 김일경의 종손이다. 처음에는 김일경이 출계(出繼)하였기 때문에 본생(本生)의 지친(至親)이 연좌(緣坐)되는 데 들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정연이 고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종손이 실로 흉서를 주관하였고, 또 역적 김일경의 지친 중에 성을 바꾸어 망명(亡命)한 자가 많습니다."

하니, 이에 수색해 체포하기를 명하였다. 김요채김요백이 먼저 붙잡혀 왔는데, 한차례 형추(刑推)한 후에 모두 효시하였다. 윤혜의 형 윤근(尹懃)윤신(尹悥)윤취상(尹就商)의 서종자(庶從子) 윤경(尹憼) 역시 국문을 받다가 장폐(杖斃)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84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75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인사(人事) / 가족(家族)

  • [註 164]
    경루(更漏) : 밤 시간을 알리는 누수(漏水).

○己卯/上御內司僕, 親鞫, 逆賊尹惠伏誅。 文書, 有以列聖御諱列錄於一紙者, 上驚痛, 鞫問其故, 供: "渠子作名時, 考書之矣。" 上震怒, 命以朱杖交撞之, 嚙舌不言。 領府事金在魯諫曰: "殿下每急之故, 不得情節之詳矣。" 上曰: "急之猶不吐實, 況可緩之乎?" 卽乘步輿, 出宣仁門宗廟下, 轎伏而泣曰: "由予不德, 辱及宗廟, 予何生爲?" 大臣、諸宰同辭苦諫, 乃乘輿至廣通橋, 諭觀光父老曰: "臨御卅載, 德不及民, 今年再臨南門, 予愧見汝曹耳。" 遂御崇禮門樓, 具甲冑大吹打, 更刑訊供: "凶書, 作而臣書。" 大逆不道遲晩。 命百官序立, 使訓鍊大將金聖應, 梟首獻馘。 上泣曰: "此乃元犯, 故用六月興師之義, 躬擐甲冑, 予豈樂爲哉?" 判府事李宗城奏曰: "罪人行刑, 有司事耳, 以至尊豈可臨視此等事耶?" 上怒甚, 拍案曰: "李宗城以予爲監刑都事耶?" 命忠州牧付處。 以不卽獻馘, 拿棍訓鍊大將金聖應, 付處沔川郡, 以御營大將洪鳳漢代之。 摠戎使鄭纉述爲御營大將, 統制使李章吾爲摠戎使。 時, 上旣盛怒, 且頗醉, 命以首級懸于旗竿, 徇百官數匝, 諭以 ‘有懷心者出伏’, 承旨蔡濟恭校理洪名漢等諫之, 乃止。 上起入小次醉臥, 更漏將盡, 吹打猶不止。 向曙, 上始出次, 止吹打, 仍以甲冑還宮。 是日, 罪人金耀采金耀白, 與同時梟示, 一鏡從孫也。 初, 一鏡以出繼之故, 本生至親, 不入緣坐, 至是鼎衍告以 ‘賊從孫, 實主凶書, 且逆至親, 多有變姓亡命者’, 乃命一竝搜捕。 耀采耀白先就拿, 刑推一次後竝梟示。 之兄就商庶從子, 亦被鞫杖斃。


  • 【태백산사고본】 60책 84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75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인사(人事) / 가족(家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