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이천보가 병판 이창의의 병세를, 좌의정 김상로가 금영의 설치를 아뢰다
임금이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병판 이창의(李昌誼)의 병이 심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 체직을 윤허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금영(禁營)을 나누어 설치하는 일을 힘써 주장하고, 아뢰기를,
"금영의 절목은 비록 미처 모두 만들지 못하였지만, 이 기회에 먼저 대장을 차출하는 것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나 막히는 데가 있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일찍이 조용히 연충(淵衷)에서 생각해 보시기를 앙달(仰達)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대개 두 상신이, 구선행(具善行)이 대장에 합당하다고 천거하였으나, 구선행의 아버지 구성임(具聖任)이 바야흐로 총융사의 직임을 띠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막히는 것으로 여긴 것이었다. 이때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어서 정망(政望)을 장차 들이려고 하는데, 김 상로가 임금에게 두 번째 말하기를,
"병판은 빨리 출사(出仕)할 자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 뜻은 홍상한(洪象漢)을 가리킨 것인데, 임금은 판돈녕 김상성(金尙星)을 병판에 제수하고자 하여 묻기를,
"김상성은 병이 이미 나았는가?"
하였는데, 우참찬 홍봉한(洪鳳漢)이 그가 지팡이를 짚고도 다니지 못한다고 성대하게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렇다면 이창의(李昌誼)의 해직을 윤허한 뜻에 어그러진다."
하고, 드디어 홍상한을 병판으로 삼았다. 수일 뒤에 김상성이 비국 당상으로서 입시하여 전폐(殿陛)를 오르내리며 걸어다니는 것이 어렵지 않으므로, 임금이 자못 주시하였다. 김상로가 또 구성임에게 아직 판돈녕을 제수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추은(推恩)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못 장황하게 아뢰자, 임금이 김상성에게 예조 판서를, 구성임에게 판돈녕을, 홍봉한에게 총융사를, 이의풍(李義豊)에게 어영 대장을, 구선행에게 금위 대장을 제수하고, 특별히 세 장신(將臣)을 불러, 홍봉한에게 하유하기를,
"임진(臨津) 일대는 내가 근심을 잊을 수 있다."
하였는데, 대개 임진이 총영(摠營)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이의풍에게 하유하기를,
"전 어영 대장과 영성군(靈城君)이 과연 잘 지켰으니, 두 장수의 규모는 좋았다."
하니, 이의풍이 대답하기를,
"신이 삼가 한결같이 준행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하였다. 구선행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세 정승의 천거에 따라서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예전에 상자를 열어 비방하는 글을 보인 자가 있었으니176) , 모쪼록 비방을 견디고 해야 한다."
하니, 구선행이 대답하기를,
"신의 영(營)은 새로 설치하였으나, 어영은 이미 규모를 이루었으니, 신도 어영을 표준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는데, 장신이 다른 영의 예를 한결같이 본받는 것은 전혀 주장이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다.
-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43면
- 【분류】인사(人事) / 군사-군정(軍政)
- [註 176]상자를 열어 비방하는 글을 보인 자가 있었으니 : 춘추 시대(春秋時代) 위(魏)나라 문후(文侯) 때의 장수인 악양(樂羊)이 중산(中山)을 칠 때에 그 아들이 중산에 있었는데, 3년이 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는 그 아들이 중산에 있기 때문이라는 비방이 많았으나, 문후가 그를 믿어 마침내 3년 만에 성을 함락시켰음. 이에 악양이 돌아와서 문후에게 보고하자, 문후가 상자에 가득찬 악양을 비방하는 글을 보이니, 악양이 재배(再拜)하고 말하기를, "중산을 격파한 것은 신의 공이 아니라 임금의 공입니다." 하였다는 고사(故事).
○戊辰/上召見大臣。 領議政李天輔言: "兵判李昌誼病甚。" 上許其遞。 左議政金尙魯方力主禁營分設事, 奏曰: "禁營節目雖未盡成, 此際先差大將亦好矣。" 上曰: "方有所思, 而有窒礙處矣。" 尙魯曰: "曾以默運淵衷仰達者, 蓋以此也。" 蓋兩相臣以具善行之可合大將薦之, 而善行之父聖任, 方帶摠戎使, 故以是爲礙也。 時開政有命, 政望將入, 尙魯再言于上曰: "兵判, 宜以速出仕者爲之", 意指洪象漢也, 上欲以判敦寧金尙星除兵判, 問曰: "尙星病已瘳乎?" 右參贊洪鳳漢盛言其扶仗不能行, 上曰: "誠爾則非許解李昌誼之意也。" 遂以洪象漢爲兵判。 後數日, 尙星以備堂入侍, 陞降殿陛, 行步不艱, 上頗注視之。 尙魯又以具聖任未除判敦寧, 尙未推恩, 陳白頗張皇, 上乃除金尙星禮曹判書, 具聖任判敦寧, 洪鳳漢摠戎使, 李義豐御營大將, 具善行禁衛大將, 特召三將臣, 諭洪鳳漢曰: "臨津一帶, 予可忘憂。" 蓋以臨津屬摠營也。 諭李義豐曰: "前御將與靈城君果善爲之守, 兩將規模則好矣。" 義豐對曰: "臣謹當一遵(何)〔行〕 約束矣。" 諭具善行曰: "予以三相之薦而特除, 意非偶然。 古有開篋示謗書者, 須任謗而爲之也。" 善行對曰: "臣營則是新創, 而御營則已成規模, 臣亦當以御營爲準矣。" 將臣之一視他營之例云者, 全沒主張, 人多笑之。
-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43면
- 【분류】인사(人事)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