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의 지문 외에는 자지를 쓰도록 하다
하교하기를,
"예전부터 능지(陵誌)는 으레 석각(石刻)으로 하였으나, 인쇄하여 반포하는 즈음에 설만(褻慢)한 폐단이 많이 있는 것이 불경(不敬)한 첫째이고, 대내(大內)에 들인 뒤에 세월이 오래되면 먼지를 묻히는 것이 불경한 둘째이며, 운반해 가져가는 즈음에 민폐를 많이 끼치는 것이 셋째이고, 광중(壙中)에 묻을 때에도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 넷째이다. 혹 막중한 일에 어찌 민폐를 돌보겠느냐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다. 국초(國初)에는 산릉의 사방석(四方石)에 모두 전편(全片)을 썼었는데, 우리 태종 대왕께서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산릉 때에 친히 능소(陵所)에 거둥하여 두 조각으로 만들고 이것으로 교훈을 전하시니, 지금까지 준용(遵用)하고 있다. 《오례의(五禮儀)》에 능(陵)은 석장(石葬)으로 하게 되어 있으나, 그 뒤에 회(灰)로 돌을 대신하였다. 이것은 모두 깊고 원대한 뜻이고 검약을 숭상하는 덕이니, 어찌 마땅히 조종을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구원(久遠)한 도리에 있어서 석지(石誌)가 자지(磁誌)만 못하고,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뜻은 있어도 하유하지 못하였다. 요즈음 고장(古藏) 가운데에서 또 자지 두 조각을 얻었는데, 곧 영릉(寧陵)의 지문(誌文)이었다. 이미 그 뜻이 있었고 또 이 지(誌)를 얻었으니, 지시해서 가르치신 듯하다. 명하여 등록(謄錄)을 상고하게 하였더니, 여주의 영릉(寧陵)에는 대개 석지와 자지 둘을 썼는데, 그때의 하교 가운데에 이미 자지를 쓰라고 하신 것이 있으니, 석각은 버금가는 하교이여야 할 듯하다. 이것으로 우러러 생각하면, 일이 선릉(先陵)에 관계되므로 갑자기 자지를 쓰지 않고 특별히 양본(兩本)을 쓰신 듯하다. 아! 몇 해 뒤에 이 자지를 대내에서 얻고 일기(日記)를 다시 수찬(修撰)한 뒤에 오히려 이 하교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뒤로는 일이 선릉(先陵)에 관계되는 지문(誌文) 외에는 영구히 자지를 쓰고 이것으로 정식(定式)하도록 하라. 아! 이번 하교는 열성(列聖)의 검덕(儉德)을 준수하여 후세에 영구히 전하는 것이니, 뒤의 사왕(嗣王)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3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敎曰: "自古陵誌, 例用石刻, 而印布之際, 多有褻慢之弊, 不敬一也, 內入之後, 歲月寢久, 埋於塵埃, 不敬二也, 運取之際, 多貽民弊三也, 藏壙之際, 又將勞民四也。 或曰莫重之事, 豈恤民弊, 此有不然。 國初山陵四方石, 皆用全片, 惟我太宗大王, 於元敬王后山陵時, 親幸陵所, 作爲二片, 以此垂訓, 尙今遵用。 《五禮儀》, 陵用石葬, 而其後以灰代石。 此皆深遠之意, 崇儉之德也, 豈非當法祖宗者乎? 況久遠之道, 石誌不如磁誌, 而其來已久, 有志未諭。 近者古藏中, 又得磁誌二片, 卽寧陵誌文也。 旣有其志, 又得此誌, 其若指敎。 命考謄錄, 則驪州 寧陵蓋用石與磁兩誌, 而其時下敎中有旣用磁誌, 石刻則似當爲次之敎。 以此仰惟, 則似是事關先陵, 故不爲遽用磁誌, 而特用兩本也。 噫! 幾年之後, 得此磁誌於大內, 更修日記之後, 猶有此敎, 是豈偶然也? 此後則事關先陵外誌文, 永用磁誌, 以此定式。 噫! 今玆之敎, 遵列聖之儉德, 垂後世以永久, 後之嗣王, 何敢違焉。"
-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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