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감사 김상익과 승지 조명정이 진구에 관해 아뢰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상익(金尙翼)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경기좌도 심휼사가 도내(道內)의 분진(分賑)하는 일 때문에 논주(論奏)한 것이 많이 있는데, 경기 백성을 구제하지 못할세라 매우 염려하여 신을 위해 대신 괴로워하였다 합니다. 가령 신이 면대하여 아뢰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마는, 그 한두 가지 논열한 것은 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졸(迂拙)한 소견에는 전혀 살릴 방법이 없어서 늘 생각하기를 흉년에 진구(賑救)를 의논하는 것은 폐기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근래 백급(白給)이라는 명색이 거의 제한이 없으니, 해마다 이어 가기 어려울 걱정이 있을 뿐더러 은혜가 다하면 업신여기게 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재해를 입은 상황을 깊이 헤아리고 굶주린 사람을 정밀히 뽑아 덜 급한 자는 조곡(糶穀)을 주고 급한 자는 진곡(賑穀)을 주어 분배하고 살릴 방법을 세워 쇠약하고 수척하지 않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신이 수령을 엄히 경계하여 정밀히 뽑는 데에 힘쓰게 한 것은 신의 어리석은 소견이 마침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듣건대, 진청(賑廳)의 쌀 3만 석을 받아 낸 뒤에 반은 각 고을에 나누어 주고 반은 아직 구획(區劃)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당초에 국가에서 진미(賑米)를 획급(劃給)한 것은 1만 석에 지나지 않는데, 가장 심한 곳과 그 다음으로 심한 곳을 물론하고 여섯 역(驛)과 다섯 진(鎭)에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참작하여 나누었고, 남은 것은 1천여 석이 있을 뿐인데 봄 순행(巡行) 때가 되거든 친히 살펴서 더 나누어 주려 합니다. 대개 입본(立本)하고 전매(轉賣)하는 사이에도 허다히 견제하는 꼬투리가 없지 않으므로 각 고을에서 이것을 어렵게 여겨 아직 받아 낸 것이 없는 것이고, 진곡을 한꺼번에 나누어 주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신이 비록 쓰기를 아까워할지라도 어찌 차마 굶주린 백성의 입 안의 물건을 계교하여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오직 그 피재(被災)에는 천심(淺深)이 있고 설진(設賑)에는 완급(緩急)이 있으므로 경중(輕重)과 활협(闊狹)에도 절로 한 권형(權衡)이 있으니, 이것으로 신을 흠잡는 것은 그 본의를 잘 모르겠습니다. ‘조절미(租折米)가 거의 무실(無實)하다.’ 한 것으로 말하면 이것은 실로 지난 가을 새로 받아들인 것이 정실(精實)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고, 6두(斗)의 절미(折米)는 불변의 항식(恒式)에 관계되니, 마음대로 가감하는 것은 뒷 폐단에 관계됩니다. 장(壯)·노(老)·약(弱)의 수를 헤아려 진곡을 나누어 주는 데에도 전부터 내려오는 진법(賑法)이 있는데, 더 주는 길을 한번 열면 뒤에 반드시 관례가 될 것입니다. 조금 해가 길어질 때를 기다려서 임시 방편으로 합당한 정사(政事)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신의 본의가 대개 절로 이러하였습니다."
하였다. 조명정(趙明鼎)도 상서하기를,
"지금 김상익의 서본(書本)을 보니 신이 접때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을 끌어대어 안정하기 어려운 꼬투리로 삼았는데, 신은 참으로 의혹합니다. 신이 봉명(奉命)한 날에 곧 도신(道臣)을 보고 진곡에 관하여 말이 미치자, 도신이 ‘국가에서 획급한 피곡(皮穀)이 3만 석인데 이미 나누어 준 것은 1만 3천 석이니 남은 것이 아직 1만 7천 석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다시는 진곡을 염려하지 않았는데, 여러 고을을 잇달아 다니게 되어서는 도로에서 부르짖는 굶주린 백성이 태반은 진곡을 나누어 준 가운데에 들지 않아서 아침저녁 사이에 또한 죽게 된 것을 직접 보고 번번이 수령을 대하여 그 까닭을 힐문하면, ‘순영(巡營)에서 나누어 준 곡식은 수백 석뿐이므로 굶주린 사람을 뽑은 숫자에 이것으로 한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들어가야 할 것인데 빠진 자가 절로 많아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굶주린 백성을 돌보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으니 차마 남의 고난처럼 볼 수 없으므로 과연 진곡을 더 획급하라는 뜻으로 논하여 도신에게 글을 보내고 서계(書啓)에 여쭈었는데, 지금 잘못 끌어댄 것이 이러합니다. 대개 도신의 근심은 해마다 이어가기 어렵다는 데에 있는데 신은 혹 당장 쇠약하고 수척할 것을 염려한 것이며, 도신의 생각은 깊이 헤아리고 천천히 의논하려는 데에 있는데 신은 망령되게 그 늦어서 미치지 못할 것을 근심한 것이니, 이처럼 사람의 소견이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미에는 절로 정법(定法)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면 과연 도신의 말과 같습니다. 신도 어찌 전혀 몰라서 설진(設賑)이라 이름하면서 반이 넘는 빈 껍데기의 피곡(皮穀)으로 수십 만에 가까운 굶주린 백성을 살리려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러한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15면
- 【분류】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戊子/京畿監司金尙翼上書, 略曰:
臣伏聞左道審恤使, 以道內分賑事, 多有論奏, 而深慮畿民之不能濟活, 爲臣代悶云。 假使臣面陳, 亦何加此, 第其一二論列者, 與臣意有異。 迃拙之見, 全無活法, 常以爲荒歲議賑, 雖是不可廢者, 而近來白給名色, 殆無限節, 不但有嗣歲難繼之患, 亦恐歸恩竭易慢之弊。 故深量災形, 精抄飢口, 緩者付糶, 急者付賑, 分排接濟, 使不捐瘠則足矣。 臣之嚴飭守宰, 務主精簡者, 迷見適然耳。 又聞以賑廳米三萬石受出之後, 一半則分俵各邑, 一半則尙無區劃爲言云。 當初朝家之劃給賑米者, 不過一萬石, 無論尤甚之次, 六驛、五鎭, 隨其大小參酌分俵, 所餘者只有一千餘石, 當待春巡欲爲親審加俵。 而蓋立本轉賣之間, 亦不無許多掣肘之端, 各邑以此爲難, 姑無受出者, 而至於賑穀之不爲一時分俵, 臣雖惜費, 豈忍計較於飢民口吻中物而然哉? 惟其被災有淺深, 設賑有緩急, 輕重闊狹, 自有一箇權衡, 則以此病臣者, 恐未詳其本意。 而至於 ‘租折米之近於無實’ 云者, 此實出於昨秋新捧之不能精實, 而六斗折米, 係是不易之恒式, 則擅自加減, 有關後弊。 壯、老、弱之計口分賑, 亦有流來賑法, 一開加給之路, 後必爲例。 稍待日長之時, 宜有權宜之政, 故臣之本意, 蓋自如此。
趙明鼎亦上書曰:
卽見金尙翼書本, 則以臣向日筵奏, 引作難安之端, 臣實訝惑。 臣於奉命之日, 卽見道臣, 語及賑穀, 道臣以 ‘朝家所劃皮穀爲三萬石, 而已分俵者一萬三千石, 餘者尙可爲一萬七千石’ 云。 故臣不復以賑穀爲慮, 及其迤歷列邑, 目見飢民之呼號道路者, 太半不入於分賑中, 朝暮且死, 每對守令, 詰問其所以, 則以爲 ‘巡營所俵之穀, 只是幾百石, 抄飢之數, 不得不以此爲限, 應入而見漏者, 自不免夥然’ 云。 臣旣以恤飢爲責, 則不忍越視, 果以加劃賑給之意, 論移於道臣, 陳稟於書啓, 而今之過引如此。 蓋道臣之憂, 在於嗣歲難繼, 而臣則或慮其目前捐瘠, 道臣之意在於深量徐議, 而臣則妄憂其緩不及事, 若是乎人見之不能同也。 至於折米之自有定法, 果如道臣之言。 臣亦豈全昧, 而名以設賑, 以過半空殼之皮穀, 欲活累十萬近止之飢民? 恐無此理。
王世子竝賜例批。
-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15면
- 【분류】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