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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 2월 21일 정미 3번째기사 1753년 청 건륭(乾隆) 18년

금천군의 읍내를 옮기는 문제와 성의 보수, 균역청의 업무에 관해 의논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금천군(金川郡)읍내(邑內)는 수토(水土)가 매우 나빠서 도신(道臣)이 고금교(古金郊)로 읍을 옮기게 해줄 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고금교청성령(靑城嶺)의 직로(直路)에 있으므로 관방(關防)에 해가 되지 않으니, 옮기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군려(軍旅)와는 다른데 어찌하여 원량(元良)에게 품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관방에 관계된 것이니 어찌 대조께 여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읍을 옮기는 것은 진실로 중대하고 곤란한 일이지만 대신의 진달이 이러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도신(道臣)이 또 강령(康翎)으로 고을을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지리가 좋지 않다고 말을 하니, 이것은 시행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리로 말을 한 것은 잘못이다. 황해 감사를 중추하라."

하였다. 춘방(春坊)에 처음 의망(擬望)할 때에는 두 당상이 함께 의논하여 하게 했는데, 대신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선천(宣川)동림(東林)은 왼쪽으로 좌현(左峴)대로(大路)를 압도하고 있고 오른쪽으로 청강평(淸江坪)과 여러 곳에서 만나는 길목을 끼고 있으니, 참으로 관서(關西) 직로(直路)의 제일의 관방(關防)입니다. 때문에 고려 때 이곳에 성을 쌓고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했습니다.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이 곳에 성을 쌓을 것을 명하였으나 사역(事役)이 호대(浩大)하여 단지 서림(西林)에만 쌓고 동림(東林)에는 쌓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그대로 구지(舊址)에다 성을 쌓고서 동림의 안산(案山) 좌현의 노상(路上)에 있는 원봉(圓峰)과 노하(路下)에 있는 난봉(鸞峰)서남(西南)전도산(傳道山)이 네 곳에는 각기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위급한 시기에 힘이 될 수 있는 방도를 삼아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의주 부윤 남태기(南泰耆)백마 산성(白馬山城)을 더 쌓아서 군향(軍餉)·재화(財貨)를 저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그 성의가 매우 돈독합니다. 그러나 본부(本府)의 군액(軍額)이 매우 적어서 위급한 시기에 방어할 수가 없으니 본부의 마군(馬軍)·보군(步軍) 가운데 병영(兵營)에 예속된 자들은 경보(警報)가 있어도 병영에 영부(領付)하지 말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원이 본부를 도와 지키게 할 것을 정식으로 삼아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균역청을 선혜청에 합속(合屬)시켰는데 허다한 전곡(錢穀)과 문부(文簿)를 한 사람의 음랑(蔭郞)이 혼자서 조관(照管)하기는 어려우니, 의당 낭관 한 사람을 더 차출하여 상평 낭청과 함께 구관(句管)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균역청·상진청(常賑廳)의 양랑(兩郞)을 물론하고 아울러 겸하여 업무를 살피게 하는 것을 한결같이 호조의 판적색(版籍色) 양랑의 예와 같게 하는 것이 매우 온편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균역청의 전조(錢條)는 그래도 지탱해 갈 수가 있습니다만 미조(米條)에 이르러서는 각도(各道)의 결역(結役)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두 돈으로 바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군문(軍門)의 허다한 향미(餉米)를 실로 추이(推移)하여 급대(給代)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돈을 곧바로 군문에 획급한다면 또 끝없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지금 이를 변통시키는 데는 단지 한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선혜청의 공가(貢價)를 종전에 마련한 것은 영남은 5분(分) 안에 3분은 쌀, 1분은 포목, 1분은 돈으로 내게 되어 있고, 호남은 6분 안에 4분은 쌀, 1분은 포목, 1분은 돈으로 내게 되어 있고, 호서는 5분 안에 4분은 쌀, 1분은 또 이를 3분하여 2분은 포목, 1분은 돈으로 내게 되어 있습니다. 기타 여러 청(廳)에도 모두 항정(恒定)된 법규가 있는데 포목과 돈은 공인(貢人)에게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만 쌀에 이르러서는 참혹한 흉년이 아닌 때를 제외하고는 그 값이 2, 3냥에 불과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이로움을 잃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선혜청에서는 한결같이 원래 정한 분수(分數)에 따라서 마련한 뒤에 쌀은 균역청에서 공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전(結錢)으로 환급(換給)하되 해청(該廳)의 쌀 1석(石)의 본가(本價)에서 태가(駄價)와 잡비(雜費)를 제하고 3냥 7전으로 할 것을 영구히 항규(恒規)로 삼게 하며, 비록 미곡(米穀)이 지극히 천할 때라도 혹시 감할 수 없게 하소서. 만약 쌀이 귀할 때를 당할 경우에는 백성들이 반드시 원치 않을 것입니다만 또한 강제로 하지 않도록 할 것으로 항식(恒式)을 정한다면 공인(貢人)이 혜택을 입는 것이 이미 그다지 적지 않고 균역청의 미조도 또한 구간스러움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율도량형(律度量衡)을 같게 하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 가장 중대한 것인데 근래 각 아문(衙門)의 두곡(斗斛)이 각기 같지 않습니다. 비국(備局)에서 신칙하여 선혜청의 곡자(斛子)와 서로 비준(比準)하도록 엄중히 과조(科條)를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호조에 만들어 둔 동곡(銅斛)을 경외(京外)로 하여금 교준(較準)하게 하면 되는 것이니, 특별히 신칙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한결같이 동곡을 따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해서(海西) 은여결(隱餘結)의 대미(大米)·소미(小米)·콩을 배로 운송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호조에서 작전(作錢)하게 하는 예에 따라 작전하게 함으로써 민폐를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사옹원(司饔院)에 어부(漁夫)를 출급(出給)할 것으로 하명하였습니다만, 듣건대 천신(薦新)에 드는 백어(白魚)가 5백 개(箇)이고 공상(供上)에 드는 생해(生蟹)가 수천 개라고 하니, 청컨대 선혜청에서 마련하여 진공(進貢)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일이 올바르게 된다."

하였다. 이천보·김상로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의 마음에 억울함이 있어도 감히 극력 청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천리와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떻게 굳게 거절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경 등을 부르려고 하였었으나 혐의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부르지 않았었다. 이렇게 한다면 송현궁(松峴宮) 밖으로 가는 수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7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80면
  • 【분류】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도량형(度量衡)

○內局入侍。 左議政李天輔曰: "金川郡邑內, 水土甚惡, 道臣狀請移邑於古金郊古金郊靑城嶺直路, 不害於關防, 許移似好矣。" 上曰: "此事異於軍旅, 何不稟于元良乎?" 天輔曰: "此事旣係關防, 何可不稟於大朝乎?" 上曰: "移邑固重難, 而大臣所達如此, 依施。" 天輔曰: "道臣又請康翎移邑, 而以地理不好爲言, 此則宜勿施矣。" 上曰: "以地理爲言非矣。 海伯重推。" 命春坊初擬時, 兩堂同議, 因大臣所奏也。 右議政金尙魯曰: "宣川之東林, 左壓左峴之大路, 右挾淸江坪衆會之路, 誠關西直路之第一關防。 故勝國時築城于此, 設置防禦使。 頃年朝家命築此城, 而事役浩大, 只築西林, 不築東林。 請令道臣, 趁今春夏, 仍於舊址築城, 而東林案山左峴之路上圓峰、路下鸞峰及西南之傳道山四處, 各設墩臺, 以爲緩急得力之地焉。" 允之。 尙魯請劃給巡營別餉木一百同, 允之。 尙魯曰: "義州府尹南泰耆, 添築白馬山城, 以爲軍餉、貨財留置之計, 其誠意篤至矣。 但本府軍額甚零少, 不足以緩急捍禦, 本府馬、步軍之屬於兵營者, 有警勿爲領付兵營, 使之全數協守本府, 定式施行似好矣。" 允之。 禮曹判書洪鳳漢曰: "均役廳合屬於宣惠廳, 而許多錢穀、文簿, 難以一蔭郞獨令照管, 宜加出一郞, 與常平郞廳, 同爲句管。 勿論均廳、常賑廳兩郞竝爲兼察, 一如戶曹版籍色兩郞之例, 則甚便矣。" 允之。 鳳漢又曰: "均廳錢條, 猶可支過, 而至於米條, 則各道結役之民, 皆願納錢, 故軍門許多餉米, 實難推移給代。 若以錢直劃於軍門, 則又有無限弊端。 卽今變通, 只有一策。 惠廳貢價, 從前磨鍊者, 嶺南則五分內三分米一分木一分錢, 湖南則六分內四分米一分木一分錢, 湖西則五分內四分米一分則又爲三分, 二分木一分錢。 其他諸廳, 亦皆有恒定之規, 木、錢則貢人有所利, 至於米則除非慘凶, 價不過二三兩之故, 民皆失利。 自今爲始, 惠廳一從元定分數而磨鍊之後, 米則自均廳依貢人所願, 換給結錢, 而該廳米一石本價, 除駄價、雜費, 以三兩七錢永作恒規, 雖米穀至賤之時, 不得或減。 若當米貴之時, 則民必不願, 亦不强之, 以此定式, 則貢人之蒙惠, 旣甚不少, 均廳之米條, 亦免苟簡矣。" 允之。 鳳漢曰: "同律度量衡, 王政之大者, 而近來各衙門斗斛, 各自不同。 自備局申飭, 與惠廳斛子相準, 嚴立科條則好矣。" 尙魯曰: "戶曹造置銅斛, 使京外較準, 不必別爲申飭。 只令一從銅斛宜矣。" 允之。 鳳漢曰: "海西隱餘結大、小米、太, 難以船運, 請依戶曹作錢例作錢, 俾除民弊。" 允之。 鳳漢曰: "司饔院漁夫出給事, 命下矣, 聞薦新白魚爲五百箇, 供上生蟹爲數千箇, 請自惠廳, 磨鍊作貢。" 上曰: "如此則事面正矣。" 天輔尙魯等曰: "臣等有抑鬱, 而不敢力請者, 此是天理、人情之不容已。 殿下豈可牢拒乎?" 上曰: "予頃日欲召卿等而有嫌故未果召矣。 如是則往松峴宮之外, 無他道矣。"


  • 【태백산사고본】 57책 79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80면
  • 【분류】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도량형(度量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