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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2월 15일 신축 4번째기사 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양위하려는 뜻을 말하다

임금이 육상궁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효장묘(孝章廟)를 두루 들렀다. 임금이 광화문 앞에 이르러 연(輦)을 멈춘 다음 그곳 백성 가운데 부로(父老)들을 불러 놓고 하교하기를,

"임어한 지 30년이 되었으나 너희들에게 온전한 혜택이나 온전한 정사를 베풀지 못하였는데, 이제부터 우리 백성들을 크게 저버리게 되었다."

하고, 드디어 육상궁으로 나아가 전배하고, 날이 저물 무렵에야 비로소 어가를 돌렸다. 연에 오를 때에 효장묘(孝章廟)를 두루 들리겠다고 명하였는데, 궁문 밖에 이르러 여(輿)를 타고 앉아 소매 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도승지 유복명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꿇어앉아 읽도록 하였다. 그 대의는 ‘자전께 윤허를 얻어 진전(眞殿)에 곡하고 하직한 다음 춘추관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즉시 심도(沁都)325) 로 가서 열성조에서 선위한 고사를 상고해내게 한다.’는 것이었다. 유복명이 꿇어앉아 〈다 읽고〉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고, 어가를 수행한 여러 신하들도 모두 깜짝 놀라 얼굴빛이 질려 말하기를,

"이게 무슨 하교이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군직에 있는 사람과 연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사실 너희들에게 덕을 입힌 일이 없는데 오늘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울었고 군사들도 울었다. 임금이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 지금 뜻을 이루었으니 통쾌하다마는, 선조 때의 일을 추억해 보니 자연히 감회가 생기는구나."

하고, 궁 안으로 빨리 들어가자고 재촉하였다. 승지 이규채와 사관이 여(輿)를 붙잡고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남유용(南有容)을 특별히 동지춘추로 제수하였다. 임금이 궁내로 들어가자, 여러 신하들이 중문(中門) 밖에 엎드려 있었다. 임금이 승전색이나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잇따라 봉서를 내렸는데, 여러 승지들이 내린 족족 도로 거두자, 하교하기를,

"시각을 알리는 북을 치지 말라고 이미 명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금루관(禁漏官)이 시각을 알렸으니, 해당 금루관을 잡아다 곤장을 치도록 하라."

하였다. 병방 승지 이창유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시키는 것은 거북스럽다며 넌지시 여쭙자, 임금이 책망하였다. 그러자 이창유가 매우 두려워하여 곤장을 쳤다. 이뒤로 경루(更漏)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행재소(行在所)가 조용하였다. 여러 승지가 합문에 엎드려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도승지 외에는 모두 물러가라."

하였다. 승지가 이 소식을 왕세자에게 알리자, 왕세자가 허둥대며 호위를 갖추지 않고 소여(小輿)로 나와 부어교(鮒魚橋) 앞에 이르러 승지에게 하령하기를,

"내 지금 대죄하고 있으므로 의장(儀仗)을 설치해서는 안되니, 모두 치우도록 하라."

하고, 소여에서 내려 걸어서 창의궁(彰義宮)으로 갔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세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 지금 막 추운 뜰에 나와 앉아 있으니, 승지는 들어가서 이 뜻을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드디어 합문 밖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삼가 신이 너무나도 불초한 사람으로 외람되게 대리하라는 명을 받들고 나서 주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차마 듣지도 못할 하교를 갑자기 받고 나니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마치 깊은 연못으로 떨어진 것과도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신이 불효하고 무상하여 어젯밤에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신의 죄입니다. 당장이라도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으나 되지를 않습니다. 아! 성상의 계책이 충실하시어 교화가 팔도에 두루 미치었는데, 갑자기 망극한 분부를 내리시니, 마음 속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라도 어찌 차마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릎쓰고 문 밖에 거적 자리를 깔아 놓고 엎드려 우러러 성상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신은 더욱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정원에 내린 하교를 빨리 거두셔서 종사를 중히 하소서. 그러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유복명에게 하교하기를,

"〈왕세자의 상소를〉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유복명이 구두로 전해 아뢰기를,

"왕세자가 상소를 도로 내준다고 하여 허둥대며 어찌할 줄을 몰라 지금 땅에 엎드려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자, 승전색에게 하교하기를,

"왜 이처럼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즉시 들어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구두로 전해 아뢰기를,

"매양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할 하교만 내리시는데 어떻게 감히 물러가겠습니까? 잠시 소견(召見)을 허락하여 달라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구두로 왕세자에게 하교하기를,

"차가운 데에 앉아 있으므로 냉기가 올라올 것이니, 즉시 들어가라."

하자, 왕세자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아뢰기를,

"어찌 감히 이처럼 하교하시는 것을 듣고 물러가겠습니까? 할 수 없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나와 궁으로 돌어갔다. 영부사 김재로가 경재(卿宰)와 여러 조(曹)의 참의들을 거느리고 합문에 나아가 청대를 아뢰니,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낙창군 이탱(李樘)이 여러 종친들을 거느리고 청대를 아뢰었는데, 역시 허락하지 않았고,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70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上展拜毓祥宮, 仍歷臨孝章廟。 上行到光化門前駐輦, 召坊民中父老, 敎曰: "臨御三十年, 無一惠一政之施及於爾等, 自今以後, 大負我民矣。" 遂詣毓祥宮展拜, 日向昏始回鑾。 陞輦時, 命歷臨孝章廟, 至宮門外乘輿而坐, 袖一紙出而授都承旨柳復明, 使跪而讀之。 大意以爲 ‘得允慈聖, 哭辭眞殿, 使春秋館堂、郞, 卽往沁都, 考出列朝傳禪故事’ 也。 復明跪而上之曰: "此何事? 臣等直有死而已。" 隨駕諸臣皆驚愕失色曰: "此何敎也?" 上顧語軍職及挾輦軍兵等曰: "予實無德及汝, 而今日永辭之矣。" 諸臣泣, 軍兵亦泣。 上悽然垂涕曰: "予今遂意, 非不快矣, 追思先朝時事, 自然生感。" 上促入宮內。 承旨李奎采與史官, 攀輿力諫, 不聽。 特授南有容同春秋。 上入宮內, 諸臣伏於中門外。 上以承傳色或司鑰, 連下封書, 諸承旨隨卽還納, 敎曰: "更鼓已命停止, 而禁漏官報更, 當該禁漏官拿入決棍。" 兵房承旨李昌儒, 以替行未安微稟, 上下責敎。 昌儒大懼, 遂棍之。 自此不設更漏, 行在閴然。 諸承旨伏閤請對, 敎曰: "都承旨外, 竝退去。" 承旨以此達于王世子, 王世子焦遑不備陪衛, 以小輿出, 至鮒魚橋前, 令于承旨曰: "余方待罪, 不可設儀仗, 其盡屛之。" 下輿, 步詣彰義宮。 上敎曰: "聞王世子之來, 今方出坐冷庭, 承旨入去, 傳諭此意焉。" 王世子遂詣閤外, 上疏曰:

伏以臣萬萬不肖, 濫承代理之命, 夙夜憂懼矣。 千萬夢想之外, 遽伏承不忍聞之敎, 心膽俱墜, 若隕淵谷, 罔知攸措。 噫! 臣不孝無狀, 昨夜不能感回聖心, 以及今日, 此實臣罪此實臣罪。 當今之時, 雖欲鑽地以入而不可得也 噫! 聖籌方富, 化遍八域, 而奄下罔極之敎, 中心如鑠驚遑震剝。 其雖暫刻, 豈忍退出乎? 敢以冒萬死席藁門外, 仰瀆聖心, 臣尤死罪臣尤死罪。 伏願聖上, 亟收下政院之敎, 以重宗社。 千萬幸甚。

上敎於復明曰: "給之。" 復明口傳啓曰: "王世子以還出上疏, 焦遑罔措, 今方伏地待命矣。" 以承傳色敎曰: "何其如是困我乎? 其卽入去之意傳諭。" 王世子以承傳色口傳啓曰: "下敎之不忍聞每如是, 何敢退去乎? 請暫許召見之意敢啓。" 以承傳色下敎于王世子曰: "方坐寒而冷升, 其卽入去。" 王世子以承傳色啓曰: "何敢聞如是下敎而退去乎? 不得已排闥直入矣。" 王世子排闥而入, 小頃出來, 仍爲還宮。 領府事金在魯率卿宰、諸曹參議, 詣閤陳啓請對, 答以其止之。 洛昌君 率諸宗, 陳啓請對, 亦不許, 凡三啓, 皆不許。


  •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70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