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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7권, 영조 28년 8월 29일 정사 1번째기사 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북평사 남태회를 불러 북도의 흉황에 대해 묻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북평사(北評事) 남태회(南泰會)를 소견하여 북로(北路)의 흉황(凶荒)에 대해 물었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신이 환진(還賑)273) 의 식례(式例) 외에 죽을 쑤어 나누어 먹였는데, 우마(牛馬)의 똥이 섞인 흙 가운데 떨어진 콩을 다투어 주워서 먹었으니, 이로 미루어 매우 참혹함을 알 만합니다. 대저 북관(北關)의 고질적인 폐단은 청차(淸差)가 올 때의 요역(徭役)입니다. 이른바 복정(卜定)274) 한 소[牛]와 보습[犂]과 염석(鹽石) 등의 물건을 모두 백성들에게 책임지워 징수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유산(流散)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영동·영남의 모곡(耗穀)을 덜어내어 몇 해를 한정해서 요역을 방급(防給)한 뒤에라야 다시 생업에 복귀하여 안집(安集)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북관의 해민(海民)을 균청(均廳)에 소속시킨 뒤 순포(純布)로 세금을 바치게 했는데, 해척(海尺)들은 물고기나 미역을 채취하여 덕원(德源)이나 원산(元山)에서 판매(販賣)합니다. 그러므로 돈은 얻기 쉬우나 포(布)는 얻기 어려워서 백성들이 모두 돈으로 바치기를 원하여 신이 떠날 때 일제히 호소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청으로 하여금 백성들이 원하는 것에 따라 받아들이게 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옛 북백(北伯) 황정(黃晸)은 청간(淸簡)하여 잘 다스렸고 진정(賑政)도 또한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새 도신(道臣) 이종백(李宗白)은 그 어미가 늙고 병들어 비록 억지로 부임은 하지만, 실로 오래 있기 어렵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관은 비록 이미 진정을 끝냈다지만, 삼수(三水)·갑산(甲山)에 또 흉년이 들었으니, 이제 겨우 일어난 백성을 서툰 손에 맡길 수는 없다. 전 감사 황정을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6책 77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1면
  • 【분류】
    인사(人事)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註 273]
    환진(還賑) : 환곡으로 진휼한 것.
  • [註 274]
    복정(卜定) : 조정(朝廷)에서 각도(各道)에, 각도에서 각군(各郡)으로 하여금 그 지방의 산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던 일.

○丁巳/藥房入診。 上召見北評事南泰會, 問以北路凶荒。 泰會曰: "臣設粥分饋於還賑式例之外, 而牛馬糞壤中遺菽, 爭拾而食之, 推此可知其孔慘矣。 大抵北關痼弊, 卽差時徭役也。 所謂卜定牛、犁口、鹽石等物, 皆責徵於民, 故民皆流散, 自朝家除出嶺東、南耗穀, 限數年防給徭役, 然後可復業安集矣。 且北關海民付之均廳後, 令以純布納稅, 而海尺採魚、藿, 轉貨於德源元山。 故得錢易而得布難, 民皆願以錢納, 而齊訴於臣行矣。" 上曰: "令均廳, 從民願收捧也。" 都提調金若魯曰: "舊北伯黃晸, 淸簡善治, 賑政亦善。 而新道臣李宗白, 其母老且病, 雖爲强赴, 實難久居云矣。" 上曰: "北關雖已畢賑, 而又歉, 甫起之民, 不可付諸生手。 前監司黃晸仍任。"


  • 【태백산사고본】 56책 77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1면
  • 【분류】
    인사(人事) / 재정(財政)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