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소 세손을 장사지내다
의소 세손(懿昭世孫)을 장사지냈다. 하루 전에 대전관(代奠官)이 계빈전(啓殯奠)을 행하였다. 참찬 홍상한(洪象漢)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참찬 홍상한이 삼가 길신(吉辰)에 찬도(欑塗)를 열겠습니다."
하였다. 선공감의 관원이 올라가서 찬도를 걷으니 참찬이 수건으로 재실을 닦고 관의(棺衣)를 씌웠다. 조전(祖奠)의 시각이 이르자 조전을 행하고 해시(亥時)에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견전을 마치자 독애책관(讀哀冊官) 한광조(韓光肇)가 책안(冊案) 앞에 나아가 애책문을 읽기를,
"유세차(維歲次) 임신(壬申) 3월 초4일 을축(乙丑)에 의소 세손이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에서 졸하시어 석 달이 지난 5월 신유삭(辛酉朔) 12일 임신(壬申)에 양주(楊州) 안현(鞍峴)의 남쪽 기슭에 옮겨 가려하니 예에 따른 것입니다. 소역(素帟)이 열리고, 단조(丹旐)가 펄럭이니, 공축(工祝)159) 은 조전(祖奠)을 거두며 분분하게 울고, 지발(池綍)160) 은 길을 조심하며 멀리 가도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손성(孫星)이 갑자기 떨어짐을 슬퍼하시고, 소저(少邸)가 영영 적막해짐을 슬퍼했도다. 이에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자취을 선양하게 하였다. 그 사(辭)는 이러하다.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돌보사, 신손(神孫)이 태어났도다. 상서로운 빛 하늘에 빛나고, 복록도 번성하였네. 총명한 재질과 온화한 기상이요, 별빛 같은 눈동자에 일월의 이마였다오. 삼전(三殿)의 기특한 사랑이요, 양궁(兩宮)161) 의 지극한 즐거움이었네. 아롱진 건책(巾幘)을 쓰고 책을 받아서 동궁까지 조작거리며 걸었고, 겨우 두 살이 되자 손가락으로 사방을 가리켰네. 글자는 얼마를 분간했는고 하니, 예순하고도 아홉자라.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면 눈물을 흘렸고 밥그릇을 열면 손으로 지범거리기도 하였다. 옥음(玉音)이 조금만 들리면 얼굴빛 쭝긋하고 기뻐 날뛰었으니, 천부의 효성은 민·증(閔曾)162) 과도 짝할 수 있었다오. 질박함을 취하고 호화로움을 싫어함은, 본질을 소중히 여기는 덕성이었네. 종사의 태산 반석같으리라고 팔도의 백성들 목을 늘이고 눈을 비비며 기대했는데, 어쩌자고 하늘은 아득하여 필경엔 신도(神道)도 변덕이 많구려! 빨리 굴러가는 상여(喪轝)는 막을 길 없고, 아득한 진경(眞境)에 노니는 것 따를 수 없구나. 아! 슬프도다. 난초의 새싹처럼 일찍이 무성했고, 기린의 새끼라고 다투어 칭송하였네. 자손의 계책 세워 감싸주시고, 기뻐함은 함이 농손(含飴弄孫)163) 하였지. 비록 열병에 걸려 끌기는 했어도 바로 나아 회복되리라고 기대했건만, 유부(兪跗)164) 는 의술을 다했어도 효험이 없이, 문득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도다. 아! 슬프도다. 조각 난간 처량하고 비단 장막 적막한데, 부앙간(俯仰間)에 진적(陳跡)을 이루니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슬픔만 돋구는구나. 생각건대 맑은 음성 귀에 쟁쟁하고, 잘생긴 그 얼굴 눈에 삼삼하도다. 구중 궁궐에 슬픔은 한이 없고, 많은 사람들의 눈물 움켜만 낸다. 아! 슬프도다. 울창한 새 묘역은 궁궐과 아주 가까우니, 영령이 앎이 있거든 조석으로 조알(朝謁)할지어다. 성상의 슬픈 회포 위로해 준다면, 이승과 저승이 어찌 다름이 있을손가. 현실(玄室)의 문이 닫치니 끝없는 밤이요, 궤연(几筵)은 엄숙한데 높은 산만 둘렸구나. 아! 슬프도다. 고금의 북망산(北邙山)에는 수요(壽夭)가 함께 가는데, 휘황한 옥돌들 천세에 꽃다우리라. 지극한 정회 은하수를 쏟은 듯, 글자마다 눈물지며 참고서 읽네. 아! 영명(令名)은 갔으나, 사책속에 길이 남으리로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책을 함에다 도로 넣고 드디어 발인하였다. 여재실관(舁梓室官)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상여를 밀자, 섭익례(攝翊禮)가 천담복 차림으로 꿇어앉아 수레에 올리라고 찬청(贊請)하니 교명책인(敎命冊印)·시책인(諡冊印)·애책(哀冊)을 각각 요여(腰轝)에 올려놓고 향로(香爐)·향합(香盒)을 향정(香亭)에 올려놓았으며, 혼백함(魂帛函)을 요여에 안치하고 신주함(神主函)을 그 뒤에 놓았다. 섭익례가 나아가 재실 앞에 이르러 꿇어앉아 상여 앞으로 나오라고 찬청하니, 내시(內侍)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뜰을 내려 서자 참찬(參贊)이 천담복 차림으로 여재실관과 내시를 인솔하고 윤여(輪輿)로 재실을 받들어 뜰을 내려와서 소금저(素錦褚)로 덮었다. 섭익례가 꿇어앉아 상여에 올리라고 찬청하고, 외문(外門) 밖에 이르러 섭익례가 꿇어앉아 수레에 올리라고 찬청하였으며, 또 꿇어앉아 출발(出發)하라고 찬청하였다. 혼백여·요여·우보(羽葆)165) ·명정 및 삽(翣)이 차례로 늘어서니, 승지는 천담복을 입고, 강서원(講書院)과 위종사(衛從司)의 관원은 최복(衰服)을 입고 걸어서 뒤를 따랐다.【판전(板廛)의 병문(屛門)166) 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고 수행하였다.】 종묘의 앞길에 이르자 여사(舁士)들이 줄을 늦추어 메니 섭익례가 꿇어앉아 출발하기를 찬청하였고, 창덕궁의 앞길에 이르러 또 그렇게 하였다. 숭례문(崇禮門) 밖 노제(路祭) 자리에 이르러 노제를 지냈는데 노제가 끝나자 백관은 하직하였고, 배종(陪從)하는 여러 관원은 차례를 지어 배종하였다. 묘소에 이르러 영장궁(靈帳宮)에 재실을 봉안하고 조전(朝奠)과 상식(上食)을 올렸다. 천전(遷奠)을 행하자 참찬 홍상한(洪象漢)이 꿇어앉아 찬도(欑塗)를 열겠다고 아뢰니 섭익례가 수레에 올리라고 찬청하고 또 상여에 올리라고 찬청하였다. 연도(羡道)의 남쪽 봉사위(奉辭位)에 이르러서는 녹로(轆轤)167) 를 써서 재실을 받들어 내렸다. 참찬 홍상한이 여재실관 등을 인솔하고 재실을 받들어 현실(玄室)의 대관(大棺) 안에 북쪽으로 머리가 향하게 하여 안치하였다. 참찬이 내시를 데리고 관의(棺衣)와 명정(銘旌)을 재차 손보아 평평하고 바르게 하고 도감의 제조가 그 수하(手下)를 데리고 보삽(黼翣)과 불삽(黻翣)·화삽(畵翣)을 재실의 양 곁에 꽂고 현실을 폐쇄하였다. 참찬과 지평 박사눌(朴師訥)이 함께 폐쇄한 것을 살피고 박사눌이 봉함에 쓰기를 근봉(謹封)이라 하고 참찬이 흙 아홉 삽(鍤)을 덮고 이어 회(灰)를 다져 채웠다. 또 애책(哀冊)을 퇴광(退壙)의 서쪽에 꿇어앉아 바치고 하사한 옥백함(玉帛函)을 역시 꿇어앉아 애책의 남쪽에 바쳤다. 도감 제조가 수하를 데리고 명기(名器)와 복완(服玩) 등 갖가지 기구(器具)를 받들어 차례로 진열하고 작공(作工)을 거느리고 계속하여 일을 마쳤으며, 지석(誌石)을 내려놓자 뭇 관원이 곡하며 재배하고 하직하였다.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우리 세손의 유휘(幼諱)는 창흥(昌興)이니, 이는 백일에 명명(命名)한 것이다. 나의 즉조(卽祚) 26년 경오(庚午) 8월 27일 축시(丑時)에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하였는데, 날 때에 붉은 빛이 하늘까지 뻗쳤었으며 곧 빈궁(嬪宮) 홍씨(洪氏) 소생이다. 외조는 참판 홍봉한(洪鳳漢)이니 영안위(永安尉)168) 의 현손이다. 이듬해 신미(辛未) 5월 13일에 세손으로 봉하여 오장복(五章服)을 입히고 숭문당(崇文堂)에서 품에 안고 예를 행하였다. 날 때부터 석대(碩大)하였고 의젓하기가 어른같았다. 책봉할 때에 다시 명명하기를 정(琔)이라 하고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기거하였다. 임신년 3월 초4일 묘시(卯時)에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薨逝)하니 나이 겨우 세 살이다. 아! 슬프도다. 이것이 우리 세손의 생졸(生卒)이다.
아! 세 살짜리 어린이에게 어떻게 행록(行錄)을 기술하겠으며 시호가 있고 지문(誌文)이 있겠는가? 그러나 행록이 없으면 어떻게 징신이 되겠는가?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기술하려니 간장이 찢기는 듯하다. 기왕 시말을 기술하였으니 행의(行誼)를 기록해야 하겠는데, 아! 내 어찌 차마 세 살짜리 손자에게 한 마디인들 과장할 수 있겠느냐? 다만 그 대강만 기록하련다. 두 살되던 겨울부터 능히 글자를 알았다. 옛사람도 여섯 살에야 비로소 방위의 이름을 가르쳤는데 겨우 두살에 이미 사방을 가리키면 그 곳을 대답하였고, 글자 수를 아는 것을 시자(侍者)더러 기록하게 하였더니 곧 예순하고도 아홉 자였다. 또 이(李) 자를 가리키면 스스로를 가리켰는데 이는 우리 성을 말한 뜻이다. 내가 무엇을 먹을 때면 와서 밥상 오른쪽에 서서 손으로 복개를 열곤 하였다. 작년 겨울에 효순(孝純)의 초상으로 며칠을 못보았더니 나의 말만 하면 바로 눈물을 머금었고 또 나의 소리만 들으면 아무리 멀고 가늘게 들려도 반드시 귀담아 듣고 좋아하였으니, 이는 바로 천부의 효성인 것이다. 모든 아이의 성미는 화사함을 좋아하는데 항상 투박하고 질실(質實)한 것을 취하였으니, 이로써 양지(良知)의 효성과 또 그 총명함을 〈알 수 있었다.〉 병이 한 번 나자 달포를 끌었는데 마침내 고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빛같은 눈망울과 또렷한 음성을 어디에서 다시 보고 들을 것인가?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몸소 행록을 짓고 이어 지문을 지었으며 재실(梓室)의 상(上) 자와 묘표(墓表)의 앞, 뒷면을 모두 손수 썼다. 【행록은 현실과 본묘(本廟)에 간직하였고, 지석은 혼유석(魂遊石) 밑에 간직하였다.】 모든 의물(儀物)은 반드시 제도보다 낮추게 하였으니, 뒷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손자를 위하여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게 하려 함이다. 4월 12일에 의소(懿昭)로 시호를 내렸고 5월 12일에 양주(楊州)의 안현(鞍峴) 남록(南麓) 사향원(巳向原)에 장사지냈다. 때는 황명(皇明)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3임신(三壬申)169) 모춘(暮春)에 나의 양지(良知)한 현손(賢孫)을 위하여 슬피 울면서 기록한다."
하였다. 현실을 닫기를 기다려 제주관(題主官)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가 올라가서 탁자 앞에 나아가 먼저 함중(陷中)170) 에 쓰기를, ‘조선국 왕세손 휘 정 신주(朝鮮國王世孫諱琔神主)’라고 쓰고 다음 앞 면에 쓰기를, ‘의소 세손 신주(懿昭世孫神主)’라고 썼다. 쓰기를 마치자 입주전(立主奠)을 올리고 이어 반우(返虞)하였다. 【모두 《상례보편(喪禮補編)》의 의식에 따른 것이다.】 봉묘(封墓)의 제도는 전면의 높이가 6척 3촌 3푼이고, 후면의 높이가 5척 7촌 3푼이며, 좌우의 높이가 6척 2푼이고, 직경이 19척, 둘레가 57척이다. 표석을 세우고 전면에 쓰기를, ‘조선 의소 세손지묘(朝鮮懿昭世孫之墓)’라고 하였는데, 어필(御筆)이다. 후면의 어제문(御製文)에 이르기를,
"나의 즉조 26년 경오 8월 27일에 탄생하여 임신 3월 초4일에 졸하니, 아! 나이 겨우 세 살이다. 5월 12일에 양주의 안현 남록 사향원에 장사지냈다. 아! 이것이 우리 세손의 생졸이다. 전면의 대자(大字)와 후면의 음기(陰記)를 모두 손수 썼다. 모든 의물을 수효도 줄이고 제도도 줄였으니 뒷사람으로 하여금 내 손자를 위하여 묘를 보고 눈물을 흘리게 함이다."
하였다. 임금이 양(揚)이 없는 흑사(黑紗)의 철릭[貼裏]을 갖추어 입고 수레에 올라 명정문(明政門)을 나서니 백관은 평상시의 청융복(靑戎服) 차림으로 칼만 차고 시위하기를 평상시의 의식대로 하였다. 임금이 선인문(宣仁門) 앞길에 이르러 선전관을 불러 하교하기를,
"거동할 때에는 길가 곡식을 밟기가 쉬우니, 구경 나온 백성들이나 시위하는 군병들이 짓밟지 말라는 뜻으로 이 두 영기(令旗)를 가지고 금위영의 도감에게 분부하여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의소(懿昭)의 묘소에 이르러 막차(幕次)에 들어가 최복으로 갈아입고 곡림(哭臨)하고, 오시(午時)에는 광혈(壙穴)에 임하여 재실을 내려놓은 것을 보고 또 곡림한 뒤에 대차(大次)로 돌아와 흑사의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수레에 올라 재궁(齋宮) 밖에 나가 대사간 조재민(趙載敏)을 탈고신(奪告身)하라고 명하고 지평 박사눌(朴師訥)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 앞날 임금이 광혈(壙穴)에 임하여 한 번 곡하고 오겠다는 하교를 내리자 모든 승지가 청대하니 임금이 거듭 엄한 하교를 내려 모든 승지와 제품(提稟)한 중관(中官)을 중추하게 하고 심지어 법가(法駕)171) 를 가로막은 것은 군율(軍律)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꾸짖었으나 양사에서는 미처 청대하지 못하였었다. 이날 임금이 묘소에서 회가(回駕)하려 하는데 대사간 조재민이 비로소 청대하자 임금이 까닭을 물으니, 조재민이 말하기를,
"몸소 광혈(壙穴)에 임하는 것은 제왕가(帝王家)의 상례(常禮) 밖입니다. 직책이 대각(臺閣)에 있으니 어찌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대각의 체통을 위해서 왔단말이냐?"
하고, 기장 현감(機張縣監)에 보직(補職)하라고 명하고 재촉하여 숙명(肅命)하게 하였다. 조 재민이 승지에게 묻기를,
"숙명 단자는 직접 올려야 하는가?"
하니, 임금이 거만하다 하고 기장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지평 박사눌이 앞으로 나오자 임금이 그가 서서 아뢰고 땅에 부복하지 않았다 하여 중추하라 하였다. 박사눌이 겨우 대간(大諫) 두 자를 말하자마자, 임금이 그가 추고를 당하고도 인피하지 않는다 하고 체직을 명하였다. 임금이 말에 오르자 박사눌이 미처 융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조복 차림으로 맞으니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가 뒤미처 그만두라 하고, 다시 조재민에게는 탈고신 삼등(奪告身三等)172) 하라 명하였으며, 박사눌에게는 파직하라 명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들어가서 말하기를,
"중관이 만일 승지의 구대(求對)를 품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와 아래가 서로 막히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조재민과 박사눌을 구해(救解)하니, 모두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4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59]공축(工祝) : 양무(良巫).
- [註 160]
지발(池綍) : 지(池)는 관의 장식, 발(綍)은 관을 끄는 큰 줄.- [註 161]
양궁(兩宮) : 동궁과 빈궁.- [註 162]
민·증(閔曾) : 민자건(閔子蹇)·증삼(曾參).- [註 163]
함이 농손(含飴弄孫) : 엿을 먹고 손자를 희롱하며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는 것. 후한(後漢)의 마 왕후(馬皇后)가 "나는 단지 엿을 머금고 손자나 희롱하며, 다시 정사에 관여하지 아니하겠다."고 한 데서 나온 말.- [註 164]
유부(兪跗) : 상고의 양의(良醫).- [註 165]
우보(羽葆) : 일산.- [註 166]
병문(屛門) : 목어귀.- [註 167]
녹로(轆轤) : 도르래.- [註 168]
영안위(永安尉) : 홍주원(洪柱元).- [註 169]
3임신(三壬申) : 1752 영조 28년.- [註 170]
함중(陷中) : 죽은 사람의 성명·별호·관직 등을 적기 위하여 신주(神主) 뒤쪽의 면을 긴 네모로 우묵하게 깎아 파낸 부분.- [註 171]
법가(法駕) : 거동할 때의 어가.- [註 172]
탈고신 삼등(奪告身三等) : 벼슬 3등급을 낮추고 본래의 사령장을 빼앗음.○壬申/葬懿昭世孫。 前一日, 代奠官行啓殯奠。 參贊洪象漢跪白曰: "參贊洪象漢, 謹以吉辰啓欑塗。" 繕工監官陞撤欑塗, 參贊以巾拂拭梓室, 覆以棺衣。 祖奠時至, 行祖奠, 亥時行遣奠。 訖, 讀哀冊官韓光肇詣冊案前, 讀哀冊文曰:
維歲次壬申三月初四日乙丑, 懿昭世孫卒于昌慶宮之通明殿, 越三月五月辛酉朔十二日壬申, 將遷于楊州鞍峴之南麓, 禮也。 素帟初啓, 丹旐載颺, 工祝撤祖而紛泣, 池綍戒途而長往。 惟我主上殿下, 悼孫星之遽淪, 悲少邸之永閴。 爰命詞臣, 俾揚徽躅。 其辭曰, ‘天眷大東, 篤生神孫。 祥光耀霄, 祿道祉繁。 聰哲溫文, 星眸日角。 三殿奇愛, 兩宮至樂。 章幘受冊, 接武少陽, 甫及周歲, 指對四方。 辨字維幾, 六十有九。 曠省而涕, 啓餐于手。 玉音微聆, 色聳喜騰。 本然之孝, 克邁閔、曾。 取樸厭華, 尙質之德。 宗祊磐泰, 八域延拭, 胡穹昊之窅漠, 竟神理之多違。 颷輪逝之難遏, 渺眞遊之莫追。 嗚呼哀哉! 蘭蓀夙茂, 麟騶競頌。 謨貽燕翼, 懽洽含弄。 縱嬰疢而彌留, 期勿藥而遄復, 兪技窮而罔效, 奄沖齡之不淑。 嗚呼哀哉! 雕檻兮凄凄, 繐帳兮寂寂, 俯仰成陳, 觸境增盡。 想朗音而在耳, 緬岐姿而森目。 恫無涯於重宸, 矧衆洟之盈掬。 嗚呼哀哉! 有菀新岡, 密邇天闕, 英靈不昧, 晨夕朝謁。 慰聖懷之哀傷, 詎有間於幽顯? 玄扃掩而厚夜, 象設儼而擐巚。 嗚呼哀哉! 今古丘原, 脩短同歸, 煌煌琬琰, 千禩芳菲。 寫至情於雲漢, 淚字字而忍讀。 嗟! 令名之永終, 庶不泯於汗竹。 嗚呼哀哉!
訖, 以冊還置於函, 遂發靷。 舁梓室官以淺淡服進輴, 攝翊禮以淺淡服跪, 贊請陞輿, 以敎命冊印、諡冊印、哀冊, 各置於腰轝, 香爐、香盒置於香亭, 魂帛函安於腰轝, 神主函置其後。 攝翊禮進, 當梓室前跪, 贊請詣輴, 內侍奉銘旌降階, 參贊以淺淡服, 帥舁梓室官及內侍, 以輪輿奉梓室, 降階, 覆以素錦褚。 攝翊禮跪, 贊請陞輴, 至外門外, 攝翊禮跪, 贊請陞輿, 又跪贊請進發。 魂帛輿、腰輿、羽葆、銘旌及翣以次陳列, 承旨淺淡服, 講書院、衛從司官衰服步從。 【至板廛屛門, 乘馬隨行。】 至宗廟前路, 舁士弛擔, 攝翊禮跪, 贊請進發, 至昌德宮前路, 亦如之。 至崇禮門外路祭所行路祭訖, 百官奉辭, 應陪從群官, 以次陪從。 至墓所, 奉安梓室於靈帳宮, 行朝奠上食。 行遷奠, 參贊洪象漢跪, 白啓欑塗, 攝翊禮跪, 贊陞輿陞輴。 至羡道南奉辭位, 用轆轤, 奉下梓室。 參贊洪象漢, 帥舁梓室官等, 奉梓室, 安於玄室大棺內北首。 參贊率內侍, 再整棺衣、銘旌, 令平正, 都監提調率其屬, 以黼翣、黻翣、畫翣, 樹於梓室兩傍, 鎖閉玄室。 參贊及持平朴師訥, 同監鎖, 師訥書其封曰謹封, 參贊覆土九鍤, 仍築灰以塞。 又以哀冊, 跪奠於退壙之西, 以贈玉帛函, 跪奠於哀冊之南。 都監提調帥其屬, 奉明器、服玩等諸具, 以次陳之, 帥作工續以終事, 下誌石, 群官哭再拜奉辭。 誌文曰:
我世孫幼諱昌興, 此乃百日命名也。 卽祚二十六年庚午八月二十七日丑時, 生於昌慶宮之景春殿, 生時紅光亘霄焉, 卽嬪宮 洪氏誕生也。 外祖參判鳳漢, 永安尉玄孫也。 翌年辛未五月十三日封世孫, 以五章服, 抱奉行禮於崇文堂。 生已碩大, 儼然若成人。 及冊封, 復命名曰琔, 處於同宮歡慶殿。 歲壬申三月初四日卯時, 薨逝於通明殿, 得年纔三歲也。 嗚呼, 痛矣! 此我世孫生卒也。 嗚呼! 三歲幼兒, 豈述行錄, 而有諡焉有誌焉? 其無行錄, 何以徵焉? 飮泣以記, 心膽欲摧。 旣述始末, 宜錄行誼, 而嗚呼! 予豈忍爲三歲孫一字夸大乎? 只錄其槪焉。 自二歲冬臘, 能識字。 古人六歲始敎方名, 而纔周年已指四方而對其所, 知字數, 侍者記之, 乃六十有九字。 且指李字而又自指, 此謂我姓之意也。 予有所食, 來立案右, 手開其蓋。 昨冬因孝純喪, 臨視者曠焉, 若聞稱予, 輒必飮涕, 且聞予聲, 雖遠且微, 必聳聽而喜, 是乃本然之孝也。 凡兒性喜華美, 而常取厚而質者, 以此良知之孝, 與其聰明。 一疾彌留月餘, 終至于難醫之境, 明星之眼, 開朗之音, 何復見聞? 嗚呼, 痛矣! 嗚呼, 痛矣! 親製行錄, 仍作誌文, 幷與梓室上字, 墓表前後面皆親書。 【行錄藏於玄室、本廟, 而誌文藏於魂遊石下。】 凡諸儀物, 必也減制, 令後人爲我孫哀殤焉。 四月十二日, 賜諡懿昭, 五月十二日, 葬于楊州 鞍峴南麓巳向原。 時皇明 崇禎紀元後三壬申暮春, 爲我良知賢孫痛泣以識。 俟閉玄室, 題主官洛豐君 楙, 陞詣卓前, 先題陷中曰朝鮮國王世孫諱琔神主, 次題前面曰懿昭世孫神主。 訖, 行立主奠, 仍爲返虞。 【幷遵喪禮補編儀式。】 封墓制度, 前面高六尺三寸三分, 後面高五尺七寸三分, 左右高六尺二分, 經十九尺, 圓五十七尺。
樹表石, 前面書曰朝鮮 懿昭世孫之墓, 御筆也。 後面御製文曰:
予卽阼二十六年庚午八月二十七日誕生, 壬申三月初四日卒, 噫! 得年纔三歲。 五月十二日葬于楊州 鞍峴南麓巳向原。 嗚呼! 此我世孫生卒也。 前面大字、後面陰記, 皆親書。 凡諸儀物, 減其數減其制, 令後人爲我孫見墓而垂淚焉。
上具無揚黑紗貼裏, 乘輿出明政門, 百官以常時靑戎服, 只佩劎侍衛如常儀。 上到宣仁門前路, 召宣傳官敎曰: "擧動之時, 路邊禾穀易致蹂躪, 觀光民人、侍衛軍兵, 勿令踐踏之意, 持二令旗, 分付禁衛營、都監, 各別申飭。" 至懿昭墓所, 入幕次, 改具衰服哭臨, 午時臨壙, 見下梓室, 又爲哭臨後, 還大次, 具黑紗戎服, 乘輿出齋宮外, 命奪大司諫趙載敏告身, 罷持平朴師訥職。 前日, 上下臨壙一哭之敎, 諸承旨請對, 上洊下嚴敎, 重推諸承旨及提稟中官, 至以壅滯法駕, 事係軍律責之, 而兩司未及請對。 是日, 上自墓所, 將回鑾, 大司諫趙載敏始求對, 上問之, 載敏曰: "親臨壙上, 卽帝王家常禮之外。 職在臺閣, 何敢不言?" 上曰: "只欲爲臺體而來耶?" 命補機張縣監, 促令肅命。 載敏問承旨曰: "肅單當親呈乎?" 上以爲慢蹇, 命投畀於機張。 持平朴師訥前進, 上以其立奏而不伏, 重推。 師訥纔發大諫二字, 上以其被推而不爲引避, 遞之。 及上乘馬, 師訥未及戎服, 以朝衣祇迎, 命拿處, 已而寢之, 改命載敏奪告身三等, 師訥罷職, 遂還宮。 領議政金在魯入言: "中官若不稟承旨求對, 則是上下阻隔也。" 仍救趙載敏、朴師訥, 命竝敍用。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4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