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증과 이학의 일을 투서한 이양제를 잡아 내사복에서 친국하다
임금이 이양제(李亮濟)를 내사복(內司僕)에서 친국(親鞫)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판의금부사 김성응(金聖應)이 참국(參鞫)하였다. 이에 앞서 투서한 적(賊)을 오래도록 체포하지 못하자 엄히 신칙하여 기찰하라고 연달아 명하였는데, 이날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 장태소(張泰紹)의 집 문 밖에 선비 옷을 입은 늙수그한 사람 하나가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두리번거리며 왔다갔다 하므로 행동이 의심스러웠는데 장태소의 종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끌어들여 그 옷을 수색하여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이윽고 바지를 더듬어 보니 봉서(封書) 하나가 땅에 떨어졌는데 겉봉에 쓰여 있기를, ‘장 대장 친집 개탁(張大將親執開坼)’이라고 하였으므로 뜯어 보니 그 속의 말 뜻이 전일의 투서와 같았었다. 그 사람에게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나는 바로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인데, 가평(加平)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름은 이양제(李亮濟)이다."
하였다. 장태소가 속여서 묻기를,
"너는 전에도 우리 집에 투서하더니 또 투서하려 한 것은 무슨 의도이냐?"
하니, 이양제가 답하기를,
"전에 투서한 곳은 포도 대장의 집이 아니라 정휘량(鄭翬良)의 집이었다."
하였다. 장태소가 말하기를,
"글 내용에 무슨 말을 하였느냐?"
하니, 이양제가 말하기를,
"이증(李增)과 이학(李壆)의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글 내용에 윤태(尹台)라고 한 것은 누구를 지칭한 것이냐?"
하니, 답하기를,
"심(沈) 자를 잘못 윤(尹) 자로 쓴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5냥 백금(五兩白金)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니, 답하기를, "양(兩) 자가 아니라 두(斗) 자를 잘못 쓴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이 밖에 달리 한 말은 없느냐?"
하니, 답하기를,
"홍계희(洪啓禧)의 균역청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홍(洪) 자 아래에 무슨 자를 썼느냐?"
하니, 답하기를,
"태(台) 자를 썼다. 홍계희의 서제 홍계량(洪啓良)이 증(增)과 연혼(連婚) 관계이기에 언급한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장태소가 청대하여 보고하니 바로 친국을 명하게 된 것이다. 이양제의 투서속의 사의(辭意)로 임금이 묻기를,
"포도청에서의 공사(供辭)를 보아 이미 알고 있지마는 너도 조선의 신하인데 ‘5두 백금(五斗白金)으로 술을 나누면서 서로 축하한다’는 등의 말을 어찌 차마 할 수 있느냐? 낱낱이 솔직히 불어라."
하니, 이양제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과연 사혐(私嫌)으로써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으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으나 여선군(驪善君)이 이소(李炤)의 아들이 땅에 엎드려 호소할 때에 잘못 주달하여 소의 자손으로 하여금 보존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깊이 통분을 품어 왔으므로 투서 내용에 여선군까지 극악한 죄과로 몰려고 약연(躍然) 등의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은 숭선군(崇善君)의 손자 소(炤)와 이종간이 되므로 소가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 신에게 서신을 보내서 자신이 죽은 뒤에 반장(返葬)해 줄 것과 계후(繼後)를 세워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소가 죽자 그 가족은 길에 떠돌게 되었고 소의 처도 이미 죽었습니다. 소의 서자는 이름이 이인명(李仁明)으로 나이 15세요 둘째 이경명(李景明)은 나이 13세인데, 소의 양자는 신과는 혐의가 있어 서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심성희(沈聖希)는 여천군(驪川君)의 가까운 인척이기 때문에 과연 그 자신이 죽어 애석하다고 썼는데 심(沈) 자를 잘못 윤(尹) 자로 썼습니다. 이번에 균역법을 실시한 뒤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되었기에 홍태(洪台)만 제거하면 혹 균역법이 중지될까 하여 쫓아내려고 쓴 것입니다."
하였다. 김덕해(金德海)에게 묻기를,
"너의 근본은 누구이며 어느 해에 일산 사지(日傘事知)가 되었고 이양제를 과연 알고 있느냐?"
하니, 김덕해가 공초하기를,
"신의 아비는 김진성(金振聲)인데 맹인이고 신의 어미는 곧 권의형(權義衡) 집의 비자(婢子)입니다. 신은 무신년130) 의 업무(業武)로서 갑인년131) 에 금군에 들어갔고 임술년132) 에 출신(出身)하여 영남의 변장(邊將)이 되었다가 교체하고 돌아온 뒤에 다시 일산 사지가 되었습니다. 이양제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권집(權䌖)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국청에서 장폐(杖斃)했다 하기에 고의로 과연 시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43면
- 【분류】사법(司法)
- [註 130]
○上親鞫李亮濟于內司僕, 領議政金在魯、判義禁金聖應參鞫。 先時, 投書之賊, 久未捕, 連命嚴飭譏詗矣, 是日右捕盜大將張泰紹家門外, 有一人斑白儒衣, 徊徨來去, 日已昏暮, 蹤跡可疑, 泰紹傔從輩見而怪之, 捉而入搜其衣無物。 探其袴, 有一封書落地, 其外封書以張大將親執開坼, 坼而見之, 則其中辭語, 與前日投書同。 問其人, 則對曰: "我是廣平大君後裔, 家於加平, 名爲亮濟矣。" 泰紹詭問曰: "汝前旣投書我家, 又欲投書者何也?" 亮濟曰: "前日所投, 非捕將家, 卽鄭翬良家也。" 泰紹曰: "書中爲何語耶?" 亮濟曰: "語及增、壆事矣。" 又問: "書中尹台誰也?" 對曰: "沈字, 誤以尹字書之矣。" 又問: "五兩白金之說, 何謂也?" 對曰: "非兩字, 卽斗字之誤也。" 又問: "此外無他語乎?" 對曰: "語及洪啓禧均役事矣。" 問曰: "洪字下, 以何字書之乎?" 對曰: "以台字書之矣。 啓禧庶弟啓良, 與增連姻, 故及之矣。" 遂請對以聞, 命卽親問。 問李亮濟投書中辭意: "觀於捕廳供辭, 已知之, 汝亦朝鮮臣子, ‘五斗白金酌酒相賀’ 等言, 豈忍爲之? 一一直招。" 亮濟供: "臣果以私嫌陷人惡逆, 更無可達矣, 驪善君不善奏達於炤子伏地時, 使炤之子孫, 不得支保, 故深懷悲痛, 投書中欲驅驪善於極惡之科, 而有躍然等語矣。 臣與崇善之孫炤爲姨從, 炤在謫時, 移書於臣, 使於身死後返葬、立後, 而炤旣死, 其眷屬顚連道路, 炤妻亦已死矣。 炤之庶子名仁明, 年十五, 次(敬明)〔景明〕 年十三, 炤之養子, 與臣有嫌, 不相知矣。 沈聖希卽驪川之切姻, 故果以身死可惜書之, 沈字誤書以尹字矣。 今番均役後, 民不得聊生, 若去洪台, 則或意均役之中止, 欲逐而書之矣。" 問金德海曰: "汝之根本爲誰, 何年爲日傘事知, 而果知亮濟乎?" 德海供: "臣父振聲, 是盲人, 臣母卽權義衡家婢子也。 臣於戊申業武, 甲寅入禁軍, 壬戌出身, 爲嶺南邊將, 而遞來後, 復爲日傘事知矣。 亮濟則本不知之, 權䌖未知以何事而杖斃於鞫廳云, 故果爲收屍矣。"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43면
- 【분류】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