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상을 묻는 일을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다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 예조 판서를 소견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빈궁(殯宮)을 이미 강서원(講書院)에 설치하였으나 앞으로 입묘(入廟)한 뒤에는 마땅히 다시 차비문의 바깥에 하여야 할 텐데, 장례를 치룬 뒤에 혼상(魂箱)을 빈궁에 묻게 되면 불결한 생각이 있다고 하면서 윤광찬(尹光纘)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예(禮)에 「혼상을 초우(初虞)가 지난 뒤에 궁벽하고 정결한 곳에 묻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만일 길이 멀어 유관(留館)한 곳에서 초우를 지내게 되면 반드시 집에 돌아와서 삼우(三虞) 후에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집에 돌아온 뒤에 묻는다는 것이 예의 뜻은 분명합니다마는, 사가(私家)로 말하건대, 집안에 궁벽하고 정결한 곳이 꼭 있지 아니하고 또 자주 옮겨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조주(祧主)122) 를 묘소에 묻는 예를 본받아 초우 뒤에 묘의 윗쪽에 묻고 있으니, 이번에도 세속을 따르는 것이 혹 무방할 듯합니다만, 제주(題主)한 뒤에 반우(返虞)하는 수레 속에서 반드시 혼상을 신주 뒤에다 놓는 것은 예의 뜻이 미묘한데, 이는 신도(神道)로 하여금 서로 합쳤다가 옮겨지게 하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장례의 당일에 환궁하여 혼궁에서 우제를 지내게 될 듯한데 우제를 지내기 전에 곧 매안(埋安)하는 것은 예의 본의에 어긋날 것이므로 신주의 수레에 함께 받들고 궁중에 돌아와 초우를 지내고 다시 묘소로 받들고 가서 매안하여야 할 형편입니다. 그 사이의 절차가 조금은 불편할 것 같으니, 삼가 상재(上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영상의 의논이 간결하여 다시 논의할 것이 없겠고 초우 뒤에 혼상을 받들고 묘소로 가는 절차는 꼭 난처한 단서가 있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으며,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제주한 뒤에 혼상을 신주 뒤에 놓고 반우의 수레로 함께 돌아오는 것은 예의 뜻이 미묘하고 주밀하다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초우 뒤에 바로 매안하는 것은 너무 조급한 듯하니, 오우(五虞) 뒤에 거행하는 것이 예의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 〈혼상을〉 받들고 가는 절차에 있어서는 발인(發引)할 때에 비하여 약간 감손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대신의 논의가 모두 같으나 영돈녕이 헌의한 오우 뒤에 매안한다는 의견은 나의 뜻과 일치하니, 이에 의하여 거행하라. 예조 당상 한 사람이 모시고 가되 의절(儀節)은 한결같이 우주(虞主)를 봉안하는 예대로 수레는 성대하게 의장(儀仗)은 세밀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4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註 122]조주(祧主) : 천묘(遷廟)하는 신주.
○上御崇文堂, 召見禮判。 先是, 上以殯宮旣設於講書院, 來頭入廟後, 則當復爲差備外, 葬後魂箱, 埋於殯宮, 有不潔之慮, 命尹光纉問議于諸大臣矣。 至是, 禮曹判書李益炡曰: "領議政金在魯以爲, ‘禮, 「魂箱初虞後埋於屛處潔地。」 又曰, 「若路遠於所館, 行初虞則必須至家三虞後埋之。」 以此言之, 還家後當埋, 禮意則明, 而以私家言之, 家中未必有屛潔處, 又數移易, 故倣祧主埋墓之例, 初虞後始埋墓上, 今亦從俗恐或無妨, 而但題主後返虞車中, 必置魂箱於主後者, 禮意微妙, 欲令神道, 相合相移之義也。 今則葬之當日似當返京, 行虞於魂宮, 未虞之前, 直爲埋安, 有違禮意, 勢當同奉於神主輦, 還闕中初虞後, 更奉往墓所埋安。 其間節次, 似少難便, 伏惟上裁’ 云, 判府事鄭羽良以爲, ‘領相所論精約, 無容更議, 而虞後奉箱詣墓之節, 則似未必有難處之端’ 云, 領敦寧趙顯命以爲, ‘題主後置魂箱於主後, 同返虞車者, 禮意微密。 今則初虞後, 卽爲埋奉, 似涉太遽, 五虞後擧行, 恐合禮意。 至於奉往節目, 比發引稍損似宜矣。’" 敎曰: "諸大臣議皆同, 而領敦寧獻議五虞後埋安, 予意亦然, 依此擧行。 禮堂一人陪往, 儀節一依虞主奉安例, 盛轝細仗。"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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