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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76권, 영조 28년 3월 4일 을축 10번째기사 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숭문당에 나아가 복제에 관해 의논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약원의 제조·예조 당상·호조 판서·어영 대장·강서원(講書院)의 관원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곡하면서 말하기를,

"두 해에 걸쳐 모두 이러하니,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의 복제(服制)는 상복(殤服)으로 낮추어야 할 것인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가 말하기를,

"남자는 직첩을 받으면 상(殤)이 될 수 없다고 상례(喪禮)에 실려 있습니다. 위호(位號)까지 이미 정해진 뒤인데 어떻게 상복으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의 복제는 마땅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무신년105) 의 예보다 한 단계 낮추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전(各殿)의 복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의례(儀禮)》에 이르기를, ‘적자(適子)가 있으면 적손(適孫)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준거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에게는 적자가 되느냐?"

하니, 행 부사직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동궁에게 압존(壓尊)이 되니, 적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체모는 비록 있어야 하나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다. 빈궁(殯宮)·예장(禮葬)·묘소의 3도감(都監)을 합하여 하나의 도감으로 만들고 각 1인씩을 두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홍상한(洪象漢)·홍락성(洪樂性)·홍인한(洪麟漢)·홍락인(洪樂仁)을 모두 집사(執事)로 정하여 입참하게 하고 어영 대장도 함께 입참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존숭(尊崇)하는 일은 도감에서 장사를 치룬 뒤에 다시 날을 받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관(禮官)과 시강원의 관원에게 복제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원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대공(大功)의 복제로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이 마땅할 것 같다, 옛 요속(僚屬)들의 복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신년에는 내가 기년(朞年)의 복을 입었는데 그때에 동궁의 관원들도 모두 임금의 복제에 따랐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번에도 이 복제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승정원·홍문관·시강원·익위사·강서원(講書院)·위종사(衛從司)에서는 성복(成服)하기 전에 모두 입직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께서는 시마복(緦麻服)을 입고 나와 곤전(坤殿)은 대공의 복을 입고 세자와 빈궁은 기년복을 입어야 하겠다. 뭇 신하들은 예(禮)에 복이 없으나 명호가 정해진 뒤라서 빈궁의 상사(喪事)와는 차이가 있으니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에 백관은 천담복으로 배제(陪祭)하고, 입시(入侍)에는 대공의 복제와 마찬가지이니 현빈(賢嬪)106) 의 상 뒤에 입시하였을 때와 같이 하며, 강서원과 위종사에서 입직할 때나 배제할 때에는 천담복을 입고 평상시에는 딴 때처럼 상복(常服)을 입도록 하라. 강서원과 위종사는 졸곡을 기다려 혁파하고, 혁파하기 전에는 사부(師傅)에 결원이 생겼다 하더라도 우제와 졸곡에 후임을 내지 말며, 대·소상(大小祥)에는 무신년의 예대로 세손의 옛 요속이 배제하도록 하라. 이번에는 기왕 무신년과는 차등을 두기로 하였으나 체모는 있어야 하니, 무신년에는 복이 다한 뒤 대상에 2품 이상이 배제하였으나 이번에는 소·대상에 대신과 정2품 이상만 천담복 차림으로 배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나라에 역사(役事)가 자꾸 겹치니, 경기 백성이 민망스럽구나. 이번의 제물 값을 경기 감영에 배정하지 말아야 하겠는데, 이제 듣건대, 이 배정의 명칭을 외방에서는 ‘백성의 부조(賻助)’라고 일컫는다 하니, 그 명칭이 바르지 못하다. 이것은 조사(詔使)와 산릉(山陵)의 일은 대동법(大同法)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국상이 났을 때에 모든 물력을 각 고을에 배정하였던 것인데, 경자년107) 이후로는 민폐를 생각하여 공인(貢人)으로 하여금 먼저 바치게 하고 공물(貢物) 값의 명목으로 여러 도에 배정하였으니, 이 역시 하나의 대동법인 것이다. 이 뒤로는 제수(祭需)의 공가(供價)라고 부르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연여(輦輿)와 의장(儀仗)은 보수하지 말고 그대로 쓰고 책인(冊印)의 상(床)도 호조의 옛것을 가져다 쓰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혼궁(魂宮)을 이미 강서원으로 정하였으니 혼궁의 중관(中官)108) 은 위종사에서 접거(接居)하고 종실과 충의는 승문원에서 접거하며 헌관청(獻官廳)과 전사청(典祀廳)은 효순(孝純)109) 혼궁의 헌관청과 전사청을 함께 쓰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빈궁(殯宮)의 진향(進香)은 의정부와 6조의 관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나, 종친부와 충훈부에서도 진향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의시(議諡)는 성복이 끝난 뒤에 바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38면
  • 【분류】
    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

○上御崇文堂, 召見大臣、藥院提調、禮堂、戶判、御將、講書院官。 上見諸臣, 迎哭曰: "兩年皆如此, 予心當如何?" 又曰: "今此服制, 當爲殤服降等乎?" 領議政金在魯曰: "男子受職, 不爲殤, 載在喪禮。 位號旣定之後, 安有殤服之可論?" 上曰: "百官服制, 當如何?" 禮曹判書李益炡曰: "似當於戊申減一等矣。" 上曰: "各殿服制當如何?" 在魯曰: "《禮》曰, ‘有適子, 則無適孫。’ 似當據此矣。" 上曰: "於元良, 則爲適子乎?" 行副司直洪鳳漢曰: "於東宮, 亦(厭)〔壓〕 尊, 不得爲適子矣。" 敎曰: "體貌雖存, 宜有參酌。 殯宮、禮葬、墓所三都監, 合爲一都監, 各一員擧行。" 敎曰: "洪象漢洪樂性洪麟漢洪樂仁皆以執事入參, 御將同爲入參。" 敎曰: "尊崇, 都監過葬事後, 更爲擇日擧行。" 命禮官、春坊官考服制以奏, 無可援據者。 在魯曰: "定以大功宜矣。" 上曰: "似宜矣。 舊僚屬之服, 何以爲之。? 戊申, 予服朞, 其時春坊, 皆從君服矣。" 在魯曰: "今亦依此制服可矣。" 敎曰: "政院、玉堂、侍講院、翊衛司、講書院、衛從司, 成服前竝入直。" 敎曰: "慈殿當服緦麻, 予與坤殿當爲大功, 世子、嬪宮當爲朞服。 群臣禮無服, 然名號旣定之後, 與嬪宮喪有間, 虞、卒哭, 百官以淺淡服陪祭, 入侍, 大功之制一也, 與賢嬪喪後入侍時同, 講書院、衛從司入直時陪祭時淺淡脤, 常時從他常服。 講書院、衛從司待卒哭革, 不革前, 師傅雖有闕, 勿代於虞、卒, 大、小祥, 依戊申例, 世孫舊僚屬陪祭。 今番旣以差等於戊申, 而體貌宜存, 戊申則服盡後大祥二品以上陪祭, 今則小、大祥, 只大臣正二品以上, 淺淡服陪祭。" 敎曰: "國役稠疊, 民可悶。 今番祭物價, 勿爲分定於營, 而今聞此分定之名號, 外方稱以民賻云, 其名不正。 此乃詔使、山陵, 不在大同, 故國喪時, 凡諸物種, 分定各邑, 一自庚子以後, 爲民弊, 令貢人先進排, 以貢價分定諸道, 亦一大同。 此後稱以祭需供價。" 敎曰: "輦輿、儀仗勿爲修補, 仍舊用之, 冊印床, 亦取用戶曹舊件。" 敎曰: "魂宮旣定於講書院, 魂宮中官入接於衛從司, 宗室、忠義入接於承文院, 獻官廳典祀廳, 與孝純魂宮獻官、典祀廳, 通用。" 敎曰: "殯宮進香, 只政府、六曹官進香, 宗親府、忠勳府官亦爲進香。" 敎曰: "議謚過成服後, 卽爲擧行。"


  • 【태백산사고본】 55책 7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38면
  • 【분류】
    왕실(王室)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