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역 당상·유신 등을 소견하여 별군관 등 양역 변통 대책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균역 당상(均役堂上)과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전(戶錢)은 이름이 있는데 별군관(別軍官)은 이름이 없으니,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이기진(李箕鎭)이 관서(關西)에 있을 때 충의사(忠義士)로써 그 이름을 좋게 하여 충정(充定)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이름을 정한 뒤에 파정(把定)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니, 예조 판서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각 고을에 비록 속오군(束伍軍)이 있기는 하지만 난리를 당하면 영장(營將)에게 부속되어 본읍(本邑)에는 다른 군졸(軍卒)로 방어(防禦)할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의 이 별군관은 평상시에는 포(布)를 거두고 만일 위급한 사태가 있으면 본읍에 소속되니, 이노(吏奴)로 대(隊)를 만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균역청(均役廳)의 본래의 뜻은 오로지 포를 거두고 급대(給代)를 충당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하고, 교리(校理) 이현중(李顯重)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대변통(大變通)의 일입니다. 신은 지식(知識)이 없어 실로 앙대(仰對)하기 어려우나, 이태중(李台重)은 바로 신의 족형(族兄)입니다. 이태중이 일찍이 홍계희(洪啓禧)에게 말하기를, ‘군(君)의 경륜(經綸)은 바로 결포(結布)에 있는데 갑자기 별군관을 만드니, 이른바 검려(黔驢)의 기량(技倆)006) 이 이에 그칠 뿐이라는 것인가? 전하(殿下)께서 한마디 말에 움직여 갑자기 백성을 위한 자비(慈悲)의 마음을 내어 이런 대변통의 거조를 하셨는데 여러 신하들은 본래 경제(經濟)의 계책이 없어서 결포(結布)와 호전(戶錢)이 변경하여 감포(減布)와 충대(充代)의 일이 되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야 폐단이 없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래 정한 계획이 없었다는 말은 옳다."
하였다. 이현중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일찍이 양역(良役)을 변통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동궁(東宮)에게 하교(下敎)하신 바가 있으십니다. 이번의 거조는 박문수(朴文秀)의 한마디 말에 동요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이 비록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그 근본은 병판(兵判)이다. 유신(儒臣)은 2필(疋)로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이현중이 말하기를,
"신은 당초에 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으나, 지금은 또한 다시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비록 해부(海夫)가 어깨를 쉬는 것으로써 하교를 하셨지만, 수리(水利)는 스스로 이롭고 불리한 시기가 있습니다. 한번 정식(定式)한 뒤에 더하거나 줄일 수가 없다면 또한 어찌 해부의 이로움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노대(露臺) 백금(百金)의 경계007) 를 생각하시어, 비록 새로 일으켜 짓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줄이고 절약할 것을 생각하고 어가(御駕)를 움직임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신중히 한다면, 절손(節損)하여 그 부족함을 보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수찬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군수(軍需)의 비용을 갑자기 절반으로 줄이고 공중(空中)에서 재력(財力)을 만들어내고자 하시니, 장차 어느 곳에서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목(節目)은 비록 정해졌지만 끝내 백공 천창(百孔千瘡)임을 면치 못하니, 신은 이뒤에 다시 2필로 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균역청을 영구히 준수(遵守)한다는 뜻으로써 마음가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7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93면
-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
- [註 006]검려(黔驢)의 기량(技倆) : 겉치레뿐이고 실속이 없음의 비유. 중국의 검주(黔州)에는 나귀가 없는데 어떤 호사자(好事者)가 싣고 돌아와 산 아래에 내려놓으니, 범이 보고서 커다란 물건이라 이상하게 여겨 숲속에서 엿보기만 하였는데, 어느날 나귀가 한번 울음 소리를 내자 범이 크게 놀라서 자기를 물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가서 지켜보니 나귀가 그밖에 다른 기능이 없음을 알고 가까이 가서 희롱하자, 이에 나귀가 분을 참지 못하고 범을 발길질하였는데, 범이 나귀의 기량이 이뿐임을 기뻐하며 마침내 달려들어 물어 죽여 그 고기를 먹은 다음 가버렸다는 고사임.
- [註 007]
노대(露臺) 백금(百金)의 경계 : 노대(露臺)는 영대(靈臺)를 말하는 것으로, 천자(天子)의 관광소(觀光所).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노대(露臺)를 지으려고 장인(匠人)을 불러 그 비용을 묻자 1백 금(百金)이 든다 하므로, 1백 금이면 중류 백성 10가(家)의 재산과 맞먹는다 하여 중지하였음. - [註 007]
○癸卯/上召見均堂、儒臣。 上曰: "戶錢則有名, 而別軍官則無名, 必也正名。 李箕鎭在關西時, 以忠義士, 好其名而充定, 今亦定名後把定爲宜矣。" 禮曹判書申晩曰: "各邑雖有束伍, 當亂則領付於營將, 本邑無他軍卒可以防禦, 誠可寒心。 今此別軍官, 常時則收布, 脫有緩急, 屬之本邑, 似勝於吏奴作隊。 均廳本意, 不專在於收布充代矣。" 校理李顯重曰: "此乃大變通之事。 臣無知識, 實難仰對。 而李台重卽臣之族兄也。 台重嘗謂洪啓禧曰, ‘君之經綸乃結布, 而卒然爲別軍官, 所謂黔驢之技, 止此而已耶? 殿下動於一說, 而遽出爲民慈悲之心, 爲此大變通之擧, 而諸臣素無經濟之策, 結布戶錢變而爲減布充代之事, 如此而可望其無弊乎?’ 云矣。" 上曰: "素無定計之言, 是矣。" 顯重曰: "殿下曾以良役之不可變通, 有所下敎於東宮者。 今者之擧動, 於朴文秀一言矣。" 上曰: "靈城雖有所陳, 而其本兵判也。 儒臣則以爲二疋可復乎?" 顯重曰: "臣謂當初不宜減, 而今則亦不可復。" 又曰: "殿下雖以海夫之息肩爲敎, 而水利自有利不利之時。 一番定式之後, 不得爲加減, 則亦豈爲海夫之利乎? 殿下念漢 文 露臺百金之戒, 雖有興作之事, 必思省約, 至於動駕, 亦必愼之, 則可以節損, 浦其不足矣。" 上嘉納。 修撰韓光肇曰: "軍需經用猝然減半, 而欲於空中生出財力, 將何處得來耶? 節目雖定, 終未免百孔千瘡, 臣恐後來復作二疋也。" 上曰: "今日群臣, 宜以均役廳永久遵守之意, 爲心可也。"
- 【태백산사고본】 54책 73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93면
-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