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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2권, 영조 26년 12월 2일 신미 2번째기사 1750년 청 건륭(乾隆) 15년

대구 유학 이양채가 상서하여 ‘휘’에 대해 아뢰다

대구(大丘)의 유학(幼學) 이양채(李亮采)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이 사는 고을은 바로 영남의 대구부(大丘府)입니다. 부의 향교(鄕校)에서 선성(先聖)에게 제사를 지내 온 것은 국초부터였는데, 춘추의 석채(釋菜)265) 에는 지방관이 으레 초헌(初獻)을 하기 때문에 축문식(祝文式)에 대수롭지 않게 ‘대구 판관(大丘判官)’이라고 써넣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구(大丘)’의 ‘구(丘)’ 자는 바로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자인데, 신전(神前)에서 축(祝)을 읽으면서 곧바로 이름자를 범해 인심이 불안하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편리함을 따라 변통하여 막중한 사전(祀典)이 미안하고 공경이 부족한 탄식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승지 황경원(黃景源)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예(禮)에 ‘모든 제사에는 휘(諱)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예로부터 고을 이름에 공자의 이름자가 많이 있습니다. 개봉부(開封府)에는 봉구현(封丘縣)이 있고, 진주부(陳州府)에는 침구현(沈丘縣)이 있으며, 귀덕부(歸德府)에는 상구현(商丘縣)이 있고, 하간부(河間府)에는 임구현(任丘縣)이 있으며, 순천부(順天府)에는 내구현(內丘縣)이 있고, 제남부(濟南府)에는 장구현(章丘縣)이 있으며, 청주부(靑州府)에는 안구현(安丘縣)이 있는데, 현의 향교에서 석전(釋奠)할 때 일찍이 휘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지금 원량(元良)이 아뢴 바를 듣건대 대구의 유생들이 고을 이름의 일을 상소로 진달했다고 한다. 아! 근래에 유생(儒生)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와 같은가? 3백여 년 동안 본부의 많은 선비들이 하나의 이양채 등만 못해서 말없이 지내왔겠는가? 한낱 그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상구(商丘)와 옹구(顒丘)란 이름이 아직도 있는데, 옛날 선현(先賢)들이 어찌 이를 깨닫지 못했겠는가?"

하고, 그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72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89면
  • 【분류】
    정론(政論) / 행정(行政) / 풍속(風俗)

  • [註 265]
    석채(釋菜) : 소나 양의 희생을 생략하고, 다만 약식으로 채소 따위로 간소하게 공자(孔子)의 제사를 지내는 일.

大丘幼學李亮采上書, 略曰:

臣等所居之鄕, 卽嶺南之大丘府也。 府校之祀先聖, 粤自國初, 春秋釋菜, 地方官例爲初獻, 故祝文之式, 輒以大丘判官塡書。 所謂大丘之丘字, 卽孔夫子名字也, 神前讀祝, 直犯名字, 人心不安。 伏乞從便變通, 俾莫重祀典, 無未安欠敬之歎焉。

承旨黃景源白上曰: "《禮》 ‘凡祭不諱。’ 自古縣號, 犯子之名者多矣。 開封府封丘縣, 陳州府沈丘縣, 歸德府商丘縣, 河間府任丘縣, 順天府內丘縣, 濟南府章丘縣, 靑州府安丘縣, 而縣學釋奠之時, 未嘗諱也。" 上敎曰: "今聞元良所稟, 大丘儒生, 以邑名事陳章云。 噫! 近者儒生之務爲新奇, 一何如此乎? 然則三百餘年本府多士, 不若一李亮采等而泯默乎? 非徒我國商丘、顒丘之名尙今在焉, 昔之先賢, 豈不覺此?" 命給其章。


  • 【태백산사고본】 53책 72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89면
  • 【분류】
    정론(政論) / 행정(行政) / 풍속(風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