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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 7월 3일 계묘 1번째기사 1750년 청 건륭(乾隆) 15년

홍화문에 나아가 양역에 대해 하유하고, 유생 등이 의견을 아뢰다.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양역의 편부를 묻고 임금이 대소 신료(臣僚)와 사서(士庶) 및 백성들에게 하유하기를,

"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태평하다.’고 성훈(聖訓)에 실려있다. 오늘날에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다고 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백성들이 편하다고 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아! 양민은 지금 도탄(塗炭)에 빠져 있다. 옛날 이윤(伊尹)145) 은 한 사람이라도 제 자리를 얻지 못하면 저자[市]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겼다. 하물며 몇십 만의 백성이 바야흐로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그 임금이 되어 구제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백성의 부모된 도리라 하겠는가? 아! 지금의 이 일은 하나는 열성조(列聖朝)의 뜻을 본받으려는 것이고, 하나는 백성을 중히 여기려는 것이며 하나는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임어(臨御)한 지 30년 동안 익히 이 폐단을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한 것은 어찌 백성을 소홀히 여겨 그랬겠는가? 법을 경장(更張)함에는 반드시 폐단이 따르게 되고 새 법은 또 묵은 법만 못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아! 창백한 얼굴 흰 수염에 나이 또한 늙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또 어느 때를 기다린단 말이며, 후일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열성조를 뵙는단 말인가? 한밤중 생각해 보면 아찔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것이다. 하나는 호포(戶布)요 하나는 결포(結布)요 하나는 유포(遊布)요 하나는 구전(口錢)이다. 그러나 유포와 구전의 불편함은 지난번 궐문에 임하였을 때에 이미 하유하였다. 한편 결포는 간편할 것 같기는 하나 세를 더 부과시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지금에 강구할 것은 호포를 호전(戶錢)으로 바꾸어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호포와 호전이 그 근원은 하나인데 경한 쪽을 택한 것이다. 무슨 법이건 처음에는 좋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삼대(三代)146) 때에 충후(忠厚)와 질실(質實)과 문채(文采)를 가감(加減)한 것도 모두 이런 뜻에서였다. 이제는 계획도 상세하게 검토되었고 두서도 이미 가려졌지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일에 다다라서는 두렵게 여기고 계책을 충분히 검토하여 성취시킨다.’고 하였으니, 두렵게 여긴다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고, 계책을 충분히 검토한다는 것은 중지(衆知)를 모은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삼복(三伏)의 더위를 맞아 또 백성 앞에 나선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아! 하늘이 굽어보고 조상들이 살피고 계시다. 내가 비록 성의가 얕고 덕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이번의 이 마음은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다. 순(舜)임금이 순임금다웠던 것은 두 끝을 절충하여 중간을 취했기 때문이다. 친히 물음에 있어서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아! 우리 경사(卿士)와 군민(軍民)은 각자 소회를 다 말하고 물러가서 허튼 말을 하지 말라. 나의 솔직한 심정을 다하여 하유하노니, 모두 모름지기 다 알지어다."

하였다. 또 유생(儒生)에게 하유하기를,

"너희들은 유생에게 호전을 부과하는 것을 불가하게 여길 것이나 위로 삼공(三公)에서부터 아래로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부역은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또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 너희들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에는 모두가 나의 적자(赤子)인 것이다. 피차간에 어찌 애증(愛憎)이 다를 수 있겠는가? 내가 만일 잠저(潛邸)에 있을 때라면 나도 의당 호전을 내야 하는 것이다. 한 집에서 노비나 주인이 똑같이 호전을 내는 것은 명분을 문란시키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호(戶)가 있으면 역(役)이 있는 것이 상례이다. 또 양민은 오래도록 고역(苦役)에 시달려 왔으니, 기어코 부역을 고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나의 뜻이 아니다. 이미 옛날부터 열성(列聖)의 뜻은 간절하였지만 임금의 뜻을 받드는 신하가 없어서 지금까지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변통하려고 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지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너희는 이해하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병(兵)을 버리고 먹을 것을 버릴지언정 신(信)은 못버린다. 신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미 한 필(疋)을 감하겠노라고 말을 하였는데 어떻게 백성에게 차마 실신(失信)이야 하겠는가?"

하였다. 유생 이봉령(李鳳齡)은 말하기를,

"호포와 결포가 모두 폐단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역질이 요(堯)임금 때의 홍수와 탕(湯)임금 때의 가뭄 같으니 성상께서는 의당 애처로운 마음으로 더 돌보아야 하실텐데, 도리어 온 나라의 백성을 전에 없던 새로운 역(役)으로 바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성상의 뜻은 비록 백골(白骨)의 징포(徵布)를 없애려 하시지마는 앞으로의 폐단은 자못 더 심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규응(李奎應)은 말하기를,

"호전의 폐단은 앞으로 양역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작은 폐단을 고치려다 큰 폐단을 낳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정양원(鄭陽元)은 말하기를,

"호전은 심히 불편합니다.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억제하고 쓸데없는 잡비를 없애며 제번 군관(除番軍官)을 도태하고 은결(隱結)을 찾아내는 것이 변통의 한 대책이 될 것입니다."

하고, 이세희(李世熙)는 말하기를,

"이번의 변통은 부역을 증가시키는 것을 모면하지 못합니다. 옛날 노(魯)나라의 선공(宣公)이 전묘(田畝)에 세를 부과하니 공자(孔子)《춘추(春秋)》에 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요순(堯舜)의 다스림을 본받으시려 하시면서 어떻게 부역을 증가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식한 선비로다. 너는 조금 머물러 기다려라. 내 조용히 다시 묻겠노라."

하였다. 이서(李恕)가 말하기를,

"송(宋)나라의 청묘법(靑苗法)147) 은 천하에 돈을 뿌렸다가 일시에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폭락하고 폭등하였는데, 이번의 호전은 폐단이 청묘법보다 더할 것입니다."

하고, 다른 유생들도 모두 호전은 시행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방민(坊民)에게 들어와서 소회를 아뢰라고 명하였다. 방민들은 호전이 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후배(李厚培)란 자가 나서서 말하기를,

"방민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입술을 삐쭉거리면서 불평하다가 엄위(嚴威) 아래 나서자 황공하여 편하다고 말하니, 이러한 백성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입술을 삐쭉거린다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임금이 백관에게 들어와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보혁(李普赫)이 말하기를,

"호전이나 결포는 모두 시행할 수 없습니다. 어염세(魚鹽稅)와 수령의 사용(私用)으로서 감축한 베의 수량으로 충당하면 됩니다."

하고, 조명채(曹命采)는 말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은 허튼 말 하기를 좋아하니,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조정에서 행하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김상적(金尙迪)은 말하기를,

"호전은 행할 수 없으니, 결전(結錢)으로 바꾸어 주소서."

하고, 부제학 조명리(趙明履), 교리 김선행(金善行)·김문행(金文行) 등의 아뢴 바도 모두 같았으나, 유독 사간 윤광찬(尹光纘)만이 내수사를 혁파하고 불필요한 군병이 무위 도식(無爲徒食)함을 없애며 주현의 합병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현을 합친다는 말은 충후(忠厚)하고 신실(信實)하며 관록을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니, 행할 수 없다."

하였다. 다시 이세희(李世熙)에게 물으니, 다만 은결을 찾아내고 제번 군관을 줄이자고만 말하고 별다른 소견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광찬이 내수사의 혁파를 청하였는데, 내가 무엇을 아끼랴마는 난처한 바가 있다."

하니,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소청을 대신(大臣)은 마땅히 시행하자고 청하여야 하겠으나, 이 한 관사(官司)가 없어지면 거기에 소속되었던 사람이 갈 곳이 없어지므로 반드시 다른 구멍을 뚫을 염려가 있으니, 이 점이 민망합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금이 재차 궐문에 임하여 폐단을 바룰 대책을 널리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묘책을 내어 임금의 걱정을 덜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윤광찬만이 내탕(內帑)의 혁파를 청하였다. 내탕이라는 것은 대내(大內)의 사사로운 비용을 맡은 곳이다. 이렇듯 크게 변통할 때를 당하여 과연 이 일을 유사(有司)에게 내맡기면 성덕의 사심 없음을 보일 수 있을 텐데, 대신된 사람이 혁파를 청하지도 못했으면서 도리어 소속된 자들의 돌아갈 곳이 없음을 말하니, 그렇다면 이문성(李文成)148)선묘(宣廟)에게 혁파하기를 청한 것은 과연 오늘날의 대신만 못해서 그랬겠는가? 대신이 이러하니, 어떻게 나라 일을 도모하겠는가? 균역(均役)이란 동쪽에서 쪼개서 서쪽에 보태주는 것인데 근본은 버리고 끝만 취하니 경장(更張)의 이름만 있고 경장의 실속이 없어 돌아서기도 전에 폐단만이 매우 컸으니, 슬픈 일이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73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금융(金融)

  • [註 145]
    이윤(伊尹) :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 [註 146]
    삼대(三代) : 하·은·주.
  • [註 147]
    청묘법(靑苗法) :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의 한 가지. 싹이 파랄 때에 관(官)에서 돈 1백 문(文)을 대여하고 추수한 뒤에 이자 20문을 붙여 상환(償還)하게 한 것임.
  • [註 148]
    이문성(李文成) : 문성은 이이(李珥)의 시호.

○癸卯/上御弘化門, 詢良役便否, 諭大小臣僚、士ㆍ庶民等曰: "噫! ‘民惟邦本, 本固邦寧’, 聖訓攸載。 今日邦本, 固乎否乎? 今日元元, 便乎否乎? 吁嗟! 良民方在塗炭之中。 昔之伊尹, 以一夫不獲, 若撻于市。 況幾十萬元元, 方在嗷嗷, 爲其君莫能濟, 是豈爲民父母之意乎? 噫! 于今此擧, 一則體列祖也, 一則重元元也, 一則固邦本也。 臨御三十年, 熟知此弊而不爲下手者, 豈忽吾民而然哉? 法之更張, 必有其弊, 新法又莫若舊法故也。 噫! 蒼顔皓髯, 年又衰耗。 及今不爲, 更待何時, 他日何顔, 歸拜列祖乎? 中夜興思, 不覺蹶然。 爰命大臣、諸臣, 講究善策。 一則戶布, 一則結布, 一則遊布, 一則口錢也。 遊布、口錢之不便, 頃於臨門時已諭。 而結布雖似簡便, 近於加賦, 故今者講究以戶布爲戶錢。 其本一也, 而卽取其輕也。 法非不美, 久則弊生。 三代忠、質、文損益, 意亦此也。 今則計已詳矣, 頭緖已就, 而曰, ‘臨事而懼, 好謀而成’, 臨事而懼, 卽謹愼也, 好謀而成, 取群議也。 方當伏暑, 又爲臨民, 意蓋此也。 噫! 蒼蒼照焉, 陟降臨焉。 予雖誠淺, 予雖否德, 今者此心, 可質彼蒼。 舜之所以爲, 亦執其兩端而用其中也。 其所親問, 予無適莫。 嗟! 我卿士軍民, 各悉所蘊, 退無浮囂。 悉諭心腹, 咸須知悉。 又諭儒生曰: "汝等以儒生賦錢爲不可, 而上自三公下至士庶, 則此均役也。 且民吾同胞, 物吾與也。 自汝等視民, 則雖有人吾之別, 而自予視之, 均吾赤子。 豈有愛憎於彼此乎? 予若在潛邸時, 則亦當爲戶錢矣。 雖以一家奴主均爲出錢, 名分紊亂云, 而有戶則有役例也。 且良民久於苦役, 必欲均役。 此非予意也。 已自昔年, 聖意藹然, 而有君無臣, 迄今未行。 今欲變通, 實出爲民, 非爲私用, 汝等諒之乎? 孔子曰, ‘去兵去食而民無信不立。’ 予旣以減一疋爲言, 豈忍失信於民乎?" 儒生李鳳齡曰: "戶、結俱有弊端。 況今癘疫, 便是潦、旱, 聖上宜加若保如傷之恩, 而反使一國民庶, 直驅於無前之新役。 聖意雖欲除白骨〔徵〕 布, 而來頭之弊, 殆有甚也。" 李奎應曰: "戶錢之弊, 將甚於良役, 不可革小弊而生大弊也。" 鄭陽元曰: "戶錢甚不便。 抑損諸宮折受, 罷冗費, 汰除番軍官, 搜括隱結, 則爲變通之一策也。" 李世熙曰: "今此變通, 未免加賦。 昔魯宣公稅畝, 孔子書之《春秋》。 今我聖上治效, 而豈聞加賦之名乎?" 上曰: "有識之士也。 汝則留待。 當從容更問。" 李恕曰: "宋之靑苗法, 散錢於天下, 一時收歛, 故錢暴賤暴貴, 今此戶錢, 弊甚靑苗矣。" 他儒亦皆以戶錢爲不可行, 上命坊民入陳所懷。 坊民多以戶錢爲便, 李厚培者進曰: "諸民皆欺罔矣。 在外則鼓吻稱冤, 而嚴威之下, 惶恐曰便, 此等之民, 皆可殺也。" 上曰: "鼓吻之說, 誠是也。" 上命百官入陳。 李普赫言: "戶、結俱不可行。 當以魚鹽及守令私用, 充減疋之數。" 曹命采言: "愚氓好作浮言, 不可盡信。 惟在朝家行之之如何。" 金尙迪謂: "戶錢不可行, 易以結錢", 副提學趙明履、校理金善行金文行等所達亦皆然。 獨司諫尹光纉請罷內司, 汰冗兵去冗食, 倂州縣, 上曰: "倂州縣, 非忠信重祿之意, 不可行也。" 更問李世熙, 只以括隱結除番軍官爲對, 別無所見矣。 上曰: "尹光纉請罷內司, 予何慳惜, 而事有難處者矣。" 右議政鄭羽良曰: "臺臣有請, 大臣當請施, 而無此一司, 則所屬無歸處, 必有更穿他穴之患, 是爲可悶矣。"

【史臣曰: 聖上再臨門, 博詢救弊之策, 諸臣無一人出奇計分上憂者, 獨尹光纉請罷內帑。 夫內帑者, 大內之所私用也。 當此大變通之日, 果若以此出付有司, 則可以示聖德之無私, 而爲大臣者旣不能請罷, 反謂所屬無歸處, 然則李文成之請罷於宣廟者, 果不及於今之大臣而然耶? 大臣如此, 何以謀國事? 均役, 破東補西, 舍本就末, 有更張之名, 而無更張之實, 不旋踵而爲弊甚巨, 嗟夫!】


  •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73면
  • 【분류】
    정론(政論)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금융(金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