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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 6월 22일 계사 2번째기사 1750년 청 건륭(乾隆) 15년

지돈녕 이종성이 상서하여 호전·결포의 폐단을 아뢰다

지돈녕(知敦寧)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전(戶錢)을 시행할 수 없는 논거(論據)가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모자라는 것이며, 셋째는 전결(田結)의 역(役)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넷째는 사부(士夫)의 마음을 잃는 것입니다. 무엇을 고르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역대로 백성에게 염출하던 제도가 사책(史策)에 소상히 기재되어 있는데, 옛날에 호별(戶別)로 역을 내게 할 때에는 다만 빈부만 따지고 가구수(家口數)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당(唐)나라·송(宋)나라 이래의 9등(九等)의 법도 도성에는 물력(物力)으로, 시골에는 전답으로 셈하여 부유한 자를 상호(上戶)라 칭하고 빈잔(貧殘)한 자는 하호(下戶)라 칭하였으며, 9등의 분등도 빈부의 차이를 참작하여 역을 내는 다소를 정하였을 뿐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대(大)·중(中)·소(小)·잔(殘)의 인구만 헤아려 이름붙인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대호(大戶)·중호(中戶)로 자손은 많지만 지극히 가난한 자가 돈 내는 것은 특히 많고, 소호(小戶)·잔호(殘戶)로 사람은 적은데 매우 부유한 사람이 돈 내는 것은 가장 적으니, 천하에 고르지 못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가히 구전(口錢)이지 호전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구전이라고 할 것 같으면 1구(口)·2구에서 10구, 1백구에 이르기까지 그 차등이 얼마나 되는데 대·중·소·잔의 4, 5등으로 묶을 수 있겠습니까? 호전도 아니고 구전도 아니며 공평하지도 않고 고르지도 못하니, 이것이 시행하지 못할 첫번째입니다.

모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고 상신 김석주(金錫胄)가 호포를 발의한 것이 정사년120) 이었는데, 그때 경외의 경비는 합계 60여만 필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묘년121)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할 때에 이르러서는 2필의 역과 그에 상당하는 쌀을 내는 자가 모두 45만 9천 영이었으니, 필 수로 계산하면 91만 8천 필이 되고 1필을 내는 자까지 합하면 1백만 필이 훨씬 넘었습니다. 지금 양계(兩界)와 양도(兩都)·제주 3읍(濟州三邑)122) 을 제하고 6도(道)의 현 호수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대충 1백만 호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호마다 2관(貫)을 재촉해 거둔다 하여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낄 터인데, 더구나 분등하여 체감(遞減)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한 대호와 중호는 지극히 적고 거의가 소호와 잔호이지 않습니까? 대충 셈하여 보아도 태반이 부족하니, 이는 행하지 못할 두 번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전결의 역만을 증가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의 민역(民役)은 전결과 호구 둘뿐입니다. 전부(田賦)는 정제(定制)가 있으나 연호(煙戶)의 역은 명목이 지극히 많아 해서와 관동에 있어서는 한 집에서 내는 것이 거의 전부(田賦)보다 많고 경기에 있어서는 치계(雉鷄)·시초(柴草)·빙정(氷丁)123) 외에도 별성(別星)124) 이 있으면 솥과 그릇을 장만한다고 돈을 걷고 전배(前排)를 맞이한다고 하여 돈을 받으며, 상장(喪葬)에는 담지군(擔持軍)125) ·잡색군(雜色軍)이 있어야 한다고 돈을 걷고 묘를 조성할 군과 사초꾼[莎草軍]이 필요하다고 하여 돈을 거두니, 제도(諸道)를 통틀어 말하자면 아무리 가장 헐하다고 한 곳도 1년에 거둔 것이 돈으로 셈하면 호당 4, 50문(文)은 넘습니다. 이제 만일 호전을 시행한다면 옛날에 호별로 내던 역을 모두 일체로 쓸어 없애야 하니 아무리 탐관 오리라도 절대로 거듭 겹쳐 받지는 못할 것이고, 옛날에 쓰던 것으로 지금 폐하지 못할 것들은 연호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자연히 전결로 돌려질 것입니다. 이제는 그대로 한결같이 호전을 시행한다 하고 전결의 역만을 아울러 늘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행하지 못하는 세 번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사대부의 마음을 잃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서울이나 외방의 사서(士庶)는 큰 부자나 녹을 먹는 사람 이외에는 대체로 궁핍한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양반이 가장 많고 또 가장 가난합니다. 사부(士夫)의 공경(公卿) 자손과 향인(鄕人)의 교생(校生) 이상을 통칭 양반이라고 하는데, 그 수효는 거의 모든 백성의 반절이 넘습니다. 조선(朝鮮)의 양반은 한번 공장이나 상인이 되면 당장에 상놈이 되니 공장이나 상인이 될 수 없고 살아갈 길은 단지 농사밖에는 없는데, 만일 몸소 농사를 짓고 아내는 들에 밥 나르기를 농부가 하는 것처럼 하면 한정(閑丁)이나 권농(勸農)의 직첩이 바로 나오니 이 짓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상·농업은 모두 할 수 없어 겉으로는 관복을 입고 혼상(婚喪)에는 양반의 체모를 잃지 않으려하니, 어떻게 가장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 서울에서 밖으로 8도에 이르기까지 오두막집이 찌그러지고 쑥대에 파묻혀 눈바람치는 혹한에도 연화(煙火)가 끊긴 곳은 물어보지 않아도 가난한 선비의 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녀로 나이 많아도 시집가지 못한 자는 대개 양반의 딸들이니, 세상에서 궁하게 사는 것은 사실 이들과 비교할 만한 데가 없습니다. 양역(良役)을 지는 백성은 비록 극히 애처롭기는 해도 힘써 농사를 짓고 땔감을 져 나르고 해서 그래도 마련할 길이라도 있지만, 만일 이들 양반들에게 돈이나 베를 내라고 하면 한 푼, 한 실오라기인들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그러나 입에는 지게미와 쌀겨도 흡족하지 못하고 몸에는 누더기도 걸치지 못하면서도 평일에는 손바닥을 치며 조정을 논하고 수령을 평판하게 되는데, 이는 그들의 타고난 습성으로 참으로 가증스럽지만 무엇이든 오래되면 고치기가 어렵다는 것은 성인(聖人)의 훈계에도 나와 있습니다. 우리 나라 풍습은 중국과는 너무 달라 멀리는 신라·고려 때부터 명분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니, 하루아침에 개혁할 수 없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자들은 우리 나라 양반을 옛날의 봉건(封建)126) 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민심을 유지하여 변란이 생기지 못하게 함에 있어서는 국가에 도움이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환자곡에 있어서도 오히려 포탈하고자 하는데 더구나 호전을 서민과 차별도 없이 재촉하여 징수하려 한다면 즐겨 명령에 따라 즉시 내려 하겠습니까? 비록 즉시 납입하고자 하여도 돈을 구할 길이 없고 처자식까지 가두게 되면, 그 원망과 저주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말하기를, ‘나라에서는 차라리 소민(小民)의 마음은 잃을지언정 사부(士夫)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릉(長陵)127) 의 시대에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점이 절대 시행할 수 없는 네 번째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일은 다만 호전(戶錢)의 대체에 대해서만 논한 것이니, 오늘날의 사세에 있어서는 더구나 행하지 못할 일이 또 있습니다. 유사(有司)의 신하가 절목에 의거하여 마련하려고 한 것은 장적(帳籍)입니다. 그러나 장적의 문란함은 여지가 없어 거짓 잔호(殘戶)와 거짓 독호(獨戶) 등, 그 나누고 합치고 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지금 만일 원적(原籍)에 의거하여 돈을 거두려 한다면 이는 양역의 폐단을 전국에 퍼뜨리는 격이 될 것이니, 어찌 가하겠습니까? 호포를 호전으로 바꾸는 일에 있어서는 신은 그윽이 불가한 중에서도 더욱 불가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대(三代)128) 로부터 우리 조정에 이르도록 한 번도 돈으로 백성에게 부과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의 근본을 소중히 여기고 농사를 손상시킴을 경계한 까닭입니다. 군포(軍布)를 돈과 베로 반반씩 받게 된 것은 최근에 나온 일인데, 법 제정의 본의를 한번 잃게 되자 점차 돈을 중하게 여기는 폐단이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전국을 통틀어 호구마다 돈으로 내게 한다면 돈은 어디서 다 나오겠습니까? 상고해 보면 호포의 제도는 일찍이 숙고(肅考)께서 재유(在宥)129) 하실 때에도 강구하고 시행하였으나, 며칠이 못가서 중지되었습니다. 그때는 경신년130) 의 개기(改紀)한 뒤라서 국세가 한창 형통하기가 해가 중천(中天)에 있는 것 같고 조정 신하들의 일 추진이 별이 북극성을 감싼 것과 같아 기강은 족히 변경에까지 미치고 법령은 족히 강포자(强暴者)도 위압할 만하였으나, 먼저 관서 일로에만 시험해 보다가 끝내 행하지 못한 것은 단적으로 백성의 비방이 덩달아 일어나고 이의가 번갈아 아뢰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이 또 추후로 항간의 소문을 들어 보니, 묘당의 뜻은 다분히 결포(結布)에 있으니 호역(戶役)이 앞으로 결역(結役)으로 바꾸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제도에 전분 6등(田分六等)131) 은 땅의 좋고 나쁨으로 나눈 것이고 세액을 9등으로 나눈 것은 절후(節候)까지 아울러 참작한 것이니, 가히 지극히 세밀하다고 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연분(年分)132) 의 법이 폐지되자 전역(田役)이 가장 헐하다고는 하지만 그 지방에서 나는 공물(貢物)도 모두 전답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기 전에도 전결의 역이 이미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토공(土貢)이 대동(大同)으로 바뀌게 된 뒤에는 1결에서 정상적으로 내는 쌀에 가승(加升)133) 을 아울러 계산하니 삼수량(三手糧)이 총 18두가 되나, 소민(小民)이 내는 세는 20두가 아니면 관에 납입할 수 없습니다. 설사 국초의 제도로 말하더라도 하지하(下之下)의 밭에서 상지상(上之上)의 세를 내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니, 결포의 수량은 몇 필로 정하였기에 적어도 1필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는지를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동법에 쌀을 무명으로 바꾸는 규정은 베는 오승포(五升布) 35자[尺]에 쌀은 호남이 8두, 영남이 7두, 호서가 6두인데, 지금 비록 호서의 예로 말하더라도 전결 20두와 합하면 벌써 26두가 됩니다. 지금 결포를 더 부과하려는 것은 대체로 군포를 대신하려는 까닭인데, 지금 오승포 35자로써 훈련 도감의 포보(砲保)와 여러 군문(軍門) 및 각아문(各衙門)의 쓰이는 비용에 대신 낼 수 있겠습니까? 칠승포(七升布) 40자가 되지 않으면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쌀 6두로써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 사세가 앞으로 2냥의 돈을 재촉해 징수할 모양인데, 그렇다면 중년(中年)134) 의 쌀 10두가 아니면 마련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1결에서 내는 것이 꼭 30두가 됩니다. 백성의 힘이 감당할 만한 지의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왕자(王者)의 정사에서 어찌 차마 이를 행하겠습니까? 논자들은 더러 ‘주(周)나라의 병거(兵車)와 당(唐)나라의 용조(庸調)135) 가 다 밭에서 나왔으니, 지금의 전역(田役)은 고제(古制)에 비하면 그래도 헐한 편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주나라의 백묘(百畝)136) 와 당나라의 영업전(永業田)137) 이 모두 공전(公田)이고 백성의 사유(私有)가 아님을 자못 몰랐던 소치입니다. 그 명의(名義)의 바르지 못함은 호전보다도 지나친 것이었으니, 이 한 대목만 가지고도 그것이 시행하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절목(節目)에 대하여 말해 보렵니다. 6도(道)에서 기경(起耕)하고 있는 전결의 수량은 최근 50년 이래로는 경술년138) 의 75만 결이 가장 많았고, 각종 면세전(免稅田) 12만 결까지 합하면 86만 결이 되었습니다. 매 결에 베 1필씩을 내면 86만 필이 되지만 경외의 경비 1백 만 필보다 부족한 것만도 이미 14만 필이나 됩니다. 더구나 5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큰 풍년을 매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쓸 데는 많고 수입은 적어 맞추지 못하는 것은 호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양역의 군포 2필에서 반을 감하여 1필로 하고 1필의 대신은 전결에 돌리면, 이는 더 부과함이 되지 않는다. 제도(諸道)에서 통용되고 있는 조례에서 만일 1결의 전(田)에서 벼 1백 두나 혹 80두를 호수(戶首)에게 세부(稅賦)나 정공(正供) 제반 잡역을 모두 그 속에 포함시키면 상납미 18두를 제하고서도 남은 잡역가(雜役價)로써 족히 베 1필을 마련할 수 있는데, 잡역을 연호(煙戶)에게 떠맡기게 되니 애당초 농민을 착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지금의 논자들도 다분히 이 논의를 찬성하고 있지만 신의 의혹은 더욱 심해지기만 합니다. 농민이 곡식을 내는 것은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데, 많고 적고를 따지지 않고 넉넉히 호수에게 내주는 것은 다만 불려다니고 매맞고 하는 괴로움을 면해보려는 것입니다. 만일 1필 값을 제하고 호수에게 돌아갈 남은 이익이 없다면 전세(田稅)나 대동미를 자신이 내야 하게 될 형편이고, 이를 모면하고자 하면 또 전의 예대로 하여 더 주어야 할 터이니, 어떻게 농민을 착취함이 아니고 더 부과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잡역가를 연호에게 넘긴다 해도 결포를 내는 데에는 또 어떻게 정채(情債)139) 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조삼 모사(朝三暮四)140) 의 꾀이니, 하민(下民)들에게 베풀 것은 못됩니다. 논자는 말하기를 ‘조종하여 받는 정채는 다시 통렬하게 금하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토공(土貢)이 대동으로 바뀐 것은 정채가 끊이지 않고 방납(防納)에까지 이르게 된 까닭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열성조의 한창 융성했을 때에도 금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 명령 한 번으로 다 혁파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연호에게 잡역을 부과시키는 일은 전에는 없었던 것을 오늘날에야 창시한 것인데, 이제 양역의 군포 1필을 감하기 위하여 온 나라의 결(結)과 호(戶)의 역을 모두 증가시키는 것이니, 그 폐단과 원망의 대소 경중이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송(宋)나라 때의 응역 면제는 일시를 구하는 좋은 법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논자들은 특히 하호(下戶)에게 역전(役錢)을 아울러 내게 하는 것을 들어 백성을 병들게 하는 법이라고 극력 반대하였습니다. 《시경》에 ‘잘 사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지만 외롭고 고단한 사람이 불쌍하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 공물의 폐단이 아주 없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좋은 변통이라고 하였지만, 당시의 식자들은 그래도 측은해 하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각박(刻薄)하게 법을 만들어도 그 폐단이 오히려 탐욕에 치닫는데, 지출을 헤아려 수입을 늘리는 것부터가 선왕(先王)의 법제에 어긋나는 일이니, 만일 이 뒤로 이번 일을 예(例)로 끌어들여 백성에게 더 부과시키려 든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 말이 징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이 두 제도의 행해지지 못할 연유를 힘써 논하는 것은 실로 태괘(泰卦)141) 의 구이(九二)와 전(傳)142) 에 이른바, ‘오래 된 폐단은 없애지도 못하고 새로운 걱정만 생겨났다.’고 한 대목에 깊이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71면
  • 【분류】
    정론(政論) / 재정-잡세(雜稅) / 신분(身分)

  • [註 120]
    정사년 : 1677 숙종 3년.
  • [註 121]
    계묘년 : 1723 경종 3년.
  • [註 122]
    제주 3읍(濟州三邑) : 제주(濟州)·대정(大靜)·정의(旌義).
  • [註 123]
    빙정(氷丁) : 얼음을 채취, 운반하는 사람.
  • [註 124]
    별성(別星) : 왕명(王命)을 받든 사신(使臣).
  • [註 125]
    담지군(擔持軍) : 상여꾼.
  • [註 126]
    봉건(封建) : 제후(諸侯).
  • [註 127]
    장릉(長陵) : 인조(仁祖)의 능호.
  • [註 128]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129]
    재유(在宥) : 자재관유(自在寬宥)의 준말. 무위(無爲)로써 천하를 다스림. 곧 자연에 맡기어 간섭하지 아니함을 이름.
  • [註 130]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131]
    전분 6등(田分六等) : 조선조 세종 때부터 실시한 조세 제도의 하나. 모든 전지(田地)를 토질의 비척(肥瘠)에 따라 1등전에서 6등전까지 6등급으로 나누었음.
  • [註 132]
    연분(年分) : 조선조 세종 때부터 실시한 조세 제도의 하나. 그 해의 농사의 풍흉(豊凶)에 따라 상상전(上上田)에서 하하전(下下田)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음. 연분 9등(年分九等).
  • [註 133]
    가승(加升) : 세곡(稅穀)을 수납할 때에 결손 보충용으로 1석(石)당 3승(升)씩 더 징수하던 일.
  • [註 134]
    중년(中年) : 풍흉의 중간이 되는 해.
  • [註 135]
    용조(庸調) : 당대(唐代)의 세 가지 징세법 중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는 용(庸)과 가업(家業)에 부과하는 조(調)를 이름. 《정자통(正字通)》에 "당(唐)나라 무덕(武德:당나라 고조의 연호) 초에 전대(前代)의 호조(戶調)를 썼다. 법제(法制)에 조(租)·용(庸)·조(調)가 있었으니, 백성이 전(田)이 있으면 조(租)가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으며,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다." 하였음.
  • [註 136]
    백묘(百畝) : 주(周)나라 정전(井田)의 제도에서 한 정(井)을 9백 묘(畝)로 하고 이를 1백 묘씩 9등분한 전지.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으로 하고 주위의 8백 묘를 여덟 집에서 나누어 사전(私田)으로 하여 경작하였음.
  • [註 137]
    영업전(永業田) : 세습(世襲)을 허락한 전지. 정전법(井田法)의 공전(公田)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당(唐)나라 고조(高祖) 때에 8세 이상의 남자에게 농토 1백 묘(畝)를 나누어 주고 그 중 20묘를 영업전, 80묘를 구분전(口分田)으로 하여, 영업전은 그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게 하고 구분전은 그 사람 일대(一代)에 한하게 하였음.
  • [註 138]
    경술년 : 1730 영조 6년.
  • [註 139]
    정채(情債) : 시골의 아전이 중앙 관청의 서리에게 아쉬운 청탁을 하고 정례(情禮)로 주는 돈.
  • [註 140]
    조삼 모사(朝三暮四) :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 옛날 송나라 저공(狙公)이 원숭이에게 너희들에게 열매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노라 한즉 원숭이들이 그 적은 것에 노하자, 곧 말을 고치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씩 주겠노라고 한즉 원숭이들이 좋아하였다는 우언(寓言)에서 나온 말.
  • [註 141]
    태괘(泰卦) : 주역(周易)의 괘명(卦名).
  • [註 142]
    전(傳) : 정전(程傳).

○知敦寧李宗城上書, 略曰:

戶錢之不可行, 其說有四, 一曰不均也, 二曰不足也, 三曰增田結之役也。 四曰失士夫之心也。 何謂不均也? 歷代取民之法, 具在史策, 古之以戶而出役者, 只計其貧富, 未嘗計其人口。 以來, 九等之法, 坊郭則以物力, 鄕村則以田産, 富厚者稱上戶, 貧殘者稱下戶, 九等之分, 蓋亦斟酌乎貧富之等差, 以爲出役之多少, 非如我國所稱大、中、小、殘之只計人口而名者也。 今者大戶、中戶而多子姓, 至貧殘者出錢特多, 小戶、殘戶而少人丁, 甚富厚者出錢最少, 則天下之不均莫甚於此。 是可謂口錢, 而不可謂戶錢也。 如曰口錢則自一口二口至十口百口其等幾許, 而乃以大、中、小、殘四五等而率之耶? 非戶非口不公不均, 此不可行者一也。 何謂不足也? 故相臣金錫冑之爲戶布議, 寔在於丁巳年間, 而其時京外經費計爲六十餘萬疋矣。 及至癸卯良役廳之設也, 二疋役幷納米相當者, 爲四十五萬九千零, 以疋計之, 當爲九十一萬八千疋, 幷計納一疋者, 則其過一百萬匹多矣。 今除兩界、兩都、濟州三邑, 而六道見戶雖不能的知, 要不過一百萬左右, 雖逐戶而責二貫尙患不足, 況分等而遞減之乎? 又況大、中至尠, 而盡是小、殘乎? 大略計之, 太半不足, 此不可行者二也。 何謂增田結之役也? 我國民役, 田與戶二者而已。 田賦則固有定制, 而烟戶之役, 名色至繁, 至於海西、關東, 則一戶所出殆過田賦, 至於畿內, 則雉鷄、柴草、氷丁之外, 有別星則以釜鼎器皿而收錢焉, 以延逢前排而受錢焉, 有喪葬則以擔持、雜色軍而收錢焉, 以造墓莎草軍而收錢焉, 通諸路言之, 雖最輕歇處, 一年所收以錢計之, 戶不下四五十文矣。 今若定行戶錢, 則昔之以戶出役者, 皆當一切掃除, 雖貪官汚吏, 決不敢疊徵, 而昔所需用, 今不可闕者, 旣不出於烟戶, 自當歸於田結。 今乃一行戶錢, 而幷增結役, 此不可行者三也。 何謂失士夫之心也? 我國貧國也。 京外士庶, 除素封與祿食外, 大抵多窮餓之人, 其中兩班最多而又最貧。 士夫之公卿子孫, 與鄕人、校生以上通稱兩班, 其數殆過於凡民之半矣。 朝鮮兩班, 一爲工、商, 則立成常漢, 工、商不可爲也, 謀生之道, 只有農務, 而若欲躬耕而妻饁, 一如農夫之爲, 則閑丁、勸農之帖不旋踵而至矣, 此又忍死而不能爲者。 工、商、農業皆不能爲, 外面冠服, 與其婚喪猶欲不失於兩班貌樣, 安得不最貧也? 內而京都, 外而八路, 蝸屋欹傾, 蓬藋蕪沒, 風雪窮寒, 烟火獨絶者, 不問可知其爲貧士之廬。 至於女子之年長未適人者, 大抵皆兩班子枝, 世間之窮生, 實無此輩之可比。 良役之民, 雖極可哀, 力農負薪, 尙有措辦之路, 若使此輩而出錢布, 則一文寸縷何從而得乎? 然口雖不厭糟糠, 身雖不蔽布楬, 平居抵掌論朝廷評守令, 是其伎倆固甚可憎, 而久則難變, 聖人垂訓。 我東風習絶異中國, 粤自最重名分, 其不可一朝改革也明矣。 是故識者以我朝兩班, 比昔之封建, 以其維持民心, 使不敢生變, 亦不爲無助於國家也。 此輩之於還穀, 尙欲逋免, 而況責之以戶錢, 與庶民無別, 其肯聞令而卽納耶? 雖欲卽納, 覓錢無路, 囚繫及於妻孥, 則其所怨詛何所不至。 故新豐府院君 文忠公張維之言曰, ‘國家寧失小民之心, 不可失士夫之心。’ 其在長陵之世尙然, 況於今日耶? 此又決不可行者四也。 雖然凡玆四段, 只就戶錢大體而說耳, 至於今日之事, 則抑有不能行者。 有司之臣, 所以依據而磨鍊者帳籍也。 籍法之紊亂罔有餘地, 贗殘僞獨, 不勝其分合, 今若據原籍而徵錢, 則移良役之弊, 遍之於擧國, 豈其可乎? 至於戶布之變爲戶錢, 臣竊以爲不可之中尤不可焉。 是以自三代至我朝, 未嘗以錢而賦民, 所以重民本而戒傷農也。 軍布之錢、木參半出於挽近, 一失制法之意, 漸致貨重之弊。 況擧一國而戶出錢, 則錢安從生乎? 伏況戶布之法, 亦嘗講行於肅考在宥之日, 不數日而寢。 命時當庚申改紀之餘, 國勢之方亨如日之正中, 朝臣之趨事若星之拱極, 紀綱足以維係遐荒, 法令足以威戢强梁, 而先試於關西一路, 終不能行焉者, 只緣民謗之朋興, 異議之迭陳耳。 臣又追聞道路之傳, 則廟堂之意多在於結布, 戶役將變爲結役云。 國朝之制, 田分六等, 以地利定也, 稅分九等, 幷天時言也, 可謂至詳密矣。 一自年分之法廢, 田役雖云最歇, 任土之貢, 幷出於田畝, 則大同未行之前, 田結之役, 已自不輕。 及至土貢變爲大同, 而一結常賦之米, 幷計加升, 三手糧合爲十八斗, 而小民之應稅者, 非二十斗, 不能納官。 若以國初定制言之, 下之下田莫不應上之上稅, 臣未知結布之數定以幾疋, 而少亦不下於一疋矣。 大同作木之規, 木品則五升三十五尺, 價米則湖南八斗, 嶺南七斗, 湖西六斗, 今雖從湖西言之, 一結之出, 已爲二十六斗矣。 結布之加賦, 蓋所以代軍布也, 今以五升三十五尺, 可以代給於訓局砲保與諸軍門各衙門之用耶? 除非七升準四十尺, 不能納矣。 以此六斗之米, 可以辦備耶? 其勢將責以二兩之錢, 非中年十斗米, 不能辦矣。 以此言之, 一結之出, 洽滿三十斗矣。 勿論民力之支當與否, 王者之政, 豈忍行此? 議者或曰, ‘之兵車、之庸ㆍ調, 皆出於田, 今之田役, 譬諸古制, 猶爲輕歇’ 云, 而殊不知之百畝、之永業, 皆是公田, 而非下民之私有也。 其名義之不正, 殆過於戶錢, 只此一說, 已知其不可行。 而今就節目而論之。 六道起墾之數, 五十年來, 庚戌七十五萬結爲最多, 幷計各樣免稅十二萬結, 則合爲八十六萬結。 每結出布一疋, 爲八十六萬疋, 其不足於京外經費一百萬疋者, 已爲一(千)〔十〕 四萬疋矣。 況五十年一有之大豐, 可期於每年乎? 其多少之不相當者, 又無異於戶錢矣。 或曰, ‘良軍二疋之役, 減其半爲一疋, 一疋之代則歸之於田結, 此非加賦也。 諸道通行之規, 一結之田, 若以稻百斗或八十斗, 捐給戶首, 則稅賦正供、諸般雜役, 皆入其中, 雖除十八斗上納之米, 所餘雜役價, 足以辦一疋, 而雜役則移責於烟戶, 初非厲農夫也。’ 今之議者, 多主此論, 而臣之惑則滋甚矣。 農民斗粟之出, 如剜心頭之肉, 而其不計多少, 優給於戶首者, 只欲免追呼鞭扑之苦也。 若除出一疋之價, 更無餘利可資於戶首田稅、大同, 勢當自納, 如欲免此, 又將依前而加給, 豈可曰非厲農而不加賦乎? 雜役之價, 雖移於烟戶, 結布之納, 又豈無情債? 此眞朝三暮四之術, 非所以示下民也。 議者曰, ‘操縱情債, 更加痛禁’ 云, 而土貢之變爲大同者, 豈非以情債不已, 至於防納之故耶? 列朝盛際所未能禁者, 今可一令盡革耶? 況烟戶之應雜役, 卽是昔無而始有者, 則今爲良軍一疋之減, 幷增擧國結、戶之役, 其爲弊與招怨大小輕重果如何哉? 世免役, 不害爲救時之良法, 而言者特以下戶之幷出役錢, 爲病民而爭之。 ‘哿矣富人, 哀此煢獨’, 卽是之謂也。 大同設行之後, 貢弊頓祛, 人皆謂善變, 而當時識者猶爲之隱憂曰, ‘作法於涼, 其弊猶貪, 量出爲入, 已乖先王之制, 若使此後援例於今, 加賦於民, 則國必莫之救而亡矣’, 不幸今日果見斯言之驗矣。 臣之所以力論二法之不可行者, 實有感於《泰》之九二, 《傳》所謂 ‘深弊未祛, 近患已生’ 者也。

答曰: "令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71면
  • 【분류】
    정론(政論) / 재정-잡세(雜稅)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