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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 5월 17일 무오 1번째기사 1750년 청 건륭(乾隆) 15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양역에 관한 일을 묻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양역(良役)의 일을 널리 여러 신하에게 물어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임어(臨御)한 지 몇 해가 되었으나 하나도 이룬 것이 없으니, 나도 몰래 겸연쩍어진다. 지난번 호조 판서가 입시하였을 때에 이미 하교한 바가 있었고, 홍계희(洪啓禧)도 아뢴 바가 있어 참으로 가상하였으나, 영부사 김재로(金在魯)는 매양 법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난색을 표하였다."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지금의 양역은 실로 망국의 병폐가 되어 있으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가지 대책 중에서 결포(結布)가 나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호포(戶布)가 낫다고 여긴다. 이종성(李宗城)고려가 호포로 망하였다고 말하였으나, 나는 주(周)나라는 갑자(甲子)에 흥하지 않았느냐고085) 말하였다. 호전(戶錢)은 명분이라도 바르지만 구전(口錢)·유포(儒布)·결포(結布)는 시행할 수 없다. 영성(靈城)086) 은 분등하여 돈으로 걷자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5전을 원정(元定)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호구는 점점 줄어들 것이고, 또 우리 나라 백성은 매우 가난하고 특히 양반은 더욱 가난하니, 5전도 어려울 것이다. 앉아서나 누워서나 생각해 보아도 결국 좋은 방책이 없으나,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무제(漢武帝)가 선술(仙術)을 구하니 동방삭(東方朔)087) 등이 오직 한마음의 정성에 달렸다고 말하였는데, 나도 문밖에 나가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편부를 물어 보고 돌아와서 시임·원임 대신과 함께 의정하겠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묵묵히 모색하고 계시니, 신민의 복입니다. 국초에 오위(五衛)를 설립하여 사대부나 상인(常人)을 막론하고 남정(男丁)이라면 모두 소속시켰습니다. 임진 병란 뒤에 유성룡(柳成龍)5군문(五軍門)088) 을 설치하였으나 하민(下民)만이 치우치게 그 역을 담당하였는데, 어찌 순환의 이치가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호(下戶)나 잔맹(殘氓)은 5전도 어렵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결포(結布)는 신의 의향인데, 호포·구전·결포 중에서 간편한 것을 취택하여 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약로는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큰 신이나 작은 신이나 값이 같은 것처럼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5전으로 규정하면 역시 고르지 못할 듯하니, 무엇보다도 기강이 세워진 뒤라야 법령이 행해질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의지를 분발하여 좋은 규정을 굳게 지키실 수 있다면 내일이라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경(坐更)089) 의 법은 먼저 대군(大君)과 대신(大臣)으로부터 비롯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니, 김약로가 말하기를,

"민가를 빼앗아 입주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처럼 한다면, 어찌 행해지지 않겠습니까? 유포(儒布)와 구전은 시행할 수 없으니, 결포와 호포 중에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외방에서는 혹 4, 5부자(父子)가 군역에 응역하고 있어 원호(元戶)는 1천 호인데 군역은 2천여 명이나 되어 많다고 하니, 호전(戶錢)이 나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신만(申晩)은 말하기를,

"결포는 본래 부역이 너무 무거워 더 징수할 수 없으니, 구전(口錢)이 나을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호전은 명분이 바른 것이 참으로 하교하신 바와 같으나 다만 합호(合戶)할 염려가 있으니, 이는 우선 기강을 세우기에 달렸습니다. 분등(分等)에 있어서는 아니할 수 없는데, 대호(大戶)를 1냥으로 한다면 중호(中戶)는 8, 9전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 판서가 어염세(魚鹽稅)를 받아서 보태어서 쓰자고 한 것은 의의가 있는 말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몇 백년 동안의 고질적인 폐단을 갑자기 손을 댈 수 없을 듯하니, 천하를 경영함에는 백성의 적음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호포와 결포는 비록 명색(名色)의 차이는 있지만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은 같습니다. 백성의 호수(戶數)로써 군정(軍丁)의 수효를 헤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음이 많으니, 충분히 상의하여 확정한 후에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결포는 서북에는 시행할 수 없고 삼남의 전결(田結)은 70여 만 결이 되며 내외 군정(軍丁)의 수효가 거의 97만 명에 이르니, 이 역시 시행할 수 없습니다. 호포가 가장 나을 듯하지만 그러나 사물이 고르지 아니한 것은 사물의 본성인 것입니다. 때문에 안할 도리가 없어 마땅히 분등을 하여야 하겠는데, 가난한 양반으로 한 치의 땅도 없는 사람한테는 족징(族徵)090) 의 폐단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미 호전에 뜻을 두고 계시니, 비록 이론이 있더라도 강구해 보아야 마땅할 일입니다. 다만 오로지 돈으로만 걷는다면 돈은 귀하고 무명은 천하게 되니, 역시 폐단이 있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8면
  • 【분류】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금융(金融)

  • [註 085]
    주(周)나라는 갑자(甲子)에 흥하지 않았느냐고 : 이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쳐서 천하를 통일하고 호경(鎬京)에 도읍한 일을 가리킨 것임.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날이 갑자일(甲子日)이었음.
  • [註 086]
    영성(靈城) : 박문수(朴文秀).
  • [註 087]
    동방삭(東方朔) :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벼슬이 태중 대부(太中大夫)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는데, 해학(諧謔)과 직언(直言)을 잘하였고 또한 선술(仙術)을 좋아하였음.
  • [註 088]
    5군문(五軍門) : 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
  • [註 089]
    좌경(坐更) : 궁중의 보루각(報漏閣)에서 밤에 징과 북을 쳐서 시각(時刻)의 경(更)과 점(點)을 알리던 일. 초경 삼점(初更三點)에 시작하여 오경 삼점(五更三點)에 마치며, 서울 각처의 경점을 치는 군사가 보루각의 징과 북의 소리를 받아 다시 징과 북을 쳐서 차례로 알렸음.
  • [註 090]
    족징(族徵) : 조선조 때 부당하게 징수하던 과세(課稅) 방법의 하나. 조세(租稅)나 환곡 등을 거두어 들일 때, 지방 각 고을 이속(吏屬)들이 사망 혹은 도망 등의 이유로 그것을 내지 못할 처지에 있는 사람의 부담을 그 일족(一族)에게 지워 분징(分徵)하던 일.

○戊午/上引見大臣、備堂。 上以良役博詢諸臣曰: "予臨御幾年, 一無所做, 不覺歉然。 頃者戶判入侍, 已有所敎, 洪啓禧亦有所陳誠可嘉, 而領府事金在魯則每以創法爲難矣。" 領議政趙顯命曰: "今之良役, 實爲亡國之病, 不可不變通。 四策中結布似勝。" 上曰: "予則以戶布爲勝。 李宗城高麗以戶布亡, 予則曰不以甲子興乎。 戶錢則名正, 而口錢、儒布、結布不可爲也。 靈城以分等收錢爲言, 而予則以五錢元定爲好。 然若此則戶口必漸縮, 且我國之民貧甚, 而兩班尤貧, 五錢亦難。 予坐臥思之, 終無善策, 而苟利於民, 豈不盡心耶? 然 求仙, 東方朔輩乃謂惟在一心之誠否, 予欲臨門召父老問便否, 歸與時、原任講定矣。" 顯命曰: "聖上已有默運, 臣民之福也。 國初設立五衛, 而勿論士夫、常漢, 男丁則皆屬焉。 壬辰兵燹後, 柳成龍設立五軍門, 而下民偏受其役, 豈無循環之理哉?" 上曰: "下戶、殘氓, 五錢亦難。" 顯命曰: "結布卽臣之意, 而戶、口、結三者中, 取其便者而行之好矣。" 左議政金若魯曰: "譬如巨屨、小屨同價, 勿論大小, 皆以五錢爲式, 亦似不均, 而立紀綱然後, 法令可行。 殿下若奮發聖志, 牢定良規, 則雖明日可爲矣。" 上曰: "坐更之法, 先自大君、大臣始之, 故至今行之。" 若魯曰: "如閭家奪入之禁令, 則豈不行乎?" 儒布、口錢不可行, 結、戶布中可以定之。" 訓鍊大將金聖應曰: "臣聞外方軍政, 或有四五父子應役者, 元戶或至一千戶, 而軍役爲二千餘名之多云, 戶錢似勝矣。" 禮曹判書申晩曰: "結布則本來賦役太重, 不可加徵, 口錢似勝矣。" 吏曹判書金尙魯曰: "戶錢名正, 誠如聖敎, 而但有合戶之慮, 此則在於先立紀綱。 至於分等, 亦不可不爲, 若大戶一兩, 則中戶八九錢可矣。" 上曰: "戶判以魚鹽稅補用云者, 亦有意矣。" 吏曹參判金尙星曰: "幾百年痼弊, 似不可猝然着手, 而天下事不患寡而患不均。 戶、結布, 雖有名色之異, 出於民則一也。 以民戶較軍丁之數, 多不相當, 十分商確後可定矣。" 顯命曰: "結布, 西北則不可行, 三南田結七十餘萬結, 而內外軍政之數, 將至於九十七萬, 此亦不可行。 戶布最勝, 然物之不齊, 物之情也。 不可不分等, 而但貧窮兩班無寸土者, 似不無徵族之弊矣。" 禮曹參判洪鳳漢曰: "聖志旣以戶錢留意, 雖有參差之說, 自當講究。 但專以錢收之, 則錢貴木賤, 亦有其弊矣。"


  • 【태백산사고본】 53책 71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68면
  • 【분류】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금융(金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