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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10월 18일 계사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병조 판서 김상로가 북관을 순행하여 시찰하고 돌아오니 그를 인견하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북관(北關)을 순행하여 시찰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진(城津)은 항아리에 들어앉은 듯하여 외부의 사정을 모를 걱정이 있고, 길주(吉州)는 대나무를 쪼개는 듯하게 막을 수 없는 근심이 있어서 모두 관방(關防)으로 의뢰할 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길주의 읍치(邑治)를 고을 남쪽 10여 리 지점인 전에 의의(擬議)한 바 있던 창덕(倉德)이라고 명칭하는 곳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어서 방어사(防禦使)를 길주로 옮겨 주면 성진과 같이 벽우(僻隅)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완급(緩急)할 때 힘을 얻기가 쉽지 못한 곳보다는 나을 것 같고 민정(民情)도 모두 옮겨 설치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그 형세를 인하여 잘 인도하면 더욱 편리하고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길주의 성을 새로 쌓아야 하겠는가?"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구성(舊城)에서 거리가 10리에 지나지 않아서 나무 하나나 돌 한덩이도 모두 실어다가 쓸 수가 있어서 민력(民力)은 심한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창덕에 고을을 설치하는 일은 바야흐로 흉년을 만났으니 명년 가을을 기다려서 거행토록 하며, 방어사는 길주로 옮겨 주고 성진 첨사(城津僉使)를 방수장(防守將)으로 삼아서 변지(邊地)의 과(窠)182) 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무산(茂山)부령(富寧)의 사이에는 차유령(車踰嶺)이 있고 회령(會寧)부령(富寧)의 사이에는 무산령(茂山嶺)이 있으며 회령종성(鍾城)의 사이에는 가파령(茄坡嶺)이 있는데, 모두 요해(要害)의 땅입니다. 그 근처에 있는 승군(僧軍)을 단합시켜서 이 세 영(嶺)을 막아서 지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북녘 땅은 요험(嶢險)하여 군량미의 운반이 바다를 경유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니, 온 도내(道內)의 선척(船隻)을 모아서 길주덕원(德源)으로 하여금 남북(南北)의 주선(舟船)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이를 징발하여 군량을 조운(漕運)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장백산(長白山)의 북쪽은 곧 천평(天坪)으로 번호(蕃胡)183) 가 살던 곳인데, 근래에 호인(胡人)의 부락이 철수해 버려서 드디어 중간에 있었던 봉홧불을 폐지하여 북쪽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종전대로 중간에 봉화를 설치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진(鎭)하나를 감평(甘坪)에 설치하여 완항령(緩項嶺)을 지키어 적로(賊路)를 끊도록 해야 하며, 홍원(洪原)에 새로 설치한 봉대(烽臺)는 백성이 많이 불편해 하니 옛 봉대를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친기위(親騎衛)는 모두 효용(驍勇)하고 활을 잘 쏘며 갑옷과 말도 정비되고 건장합니다. 청컨대 천인(千人) 이상을 더 두어 그 남관·북관의 권관(權管)을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에게 예속시켜 각각 친기위(親騎衛)의 출신으로 도시(都試)에 합격한 자를 권관에 충당하여 무사(武士)를 권장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뒤에 길주에서 고을을 창덕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 땅에는 끝내 우물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여 옮기는 일을 시행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54면
  • 【분류】
    군사(軍事) / 사상(思想)

○癸巳/兵曹判書金尙魯行視北關還。 上引見, 尙魯曰: "城津有坐甕之患, 吉州有破竹之憂, 俱非關防之可賴者。 臣意則莫若移設吉州邑治於州南十餘里, 前所擬議倉德爲名之地。 仍以城津防禦使移授吉州, 則似勝於城津之處在僻隅, 未易得力於緩急也, 且民情咸願移設, 因其勢而利導, 尤爲便好。" 上曰: "州城當新築耶?" 尙魯曰: "距舊城不過十里, 一木一石, 皆可輸用, 民力不甚勞矣。" 上曰: "倉德設邑事, 方値歲歉, 待明秋擧行, 防禦使移授吉州, 城津僉使爲防守將, 以邊地窠施行。" 尙魯又言: "茂山富寧之間有車踰嶺, 會寧富寧之間有茂山嶺, 會寧鍾城之間有茄坡嶺, 皆要害之地。 宜團合旁近僧軍, 阨守三嶺。" 又言: "北地嶢險, 運餉由海爲便, 宜聚一路船隻, 令吉州德源, 分管南北舟船, 有急則發而漕餉。" 又言: "長白山之北卽天坪, 蕃所居, 近以落撤去, 遂罷間烽, 北民甚恐, 宜依前置間烽。 又設一鎭於甘坪, 以守緩項嶺斷賊路, 洪原新設烽臺, 民多不便, 宜仍其舊烽。" 又言: "南、北道親騎衛, 皆驍勇善射, 鎧馬精健。 請益置千人以上, 而其南、北關管, 隷於南、北兵使, 各以親騎衛之出身中都試者充權管, 以勸武士。" 上皆從之。 後吉州欲移邑倉德, 以其地終不出井泉, 不果移。


  •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54면
  • 【분류】
    군사(軍事)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