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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70권, 영조 25년 8월 6일 임오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친히 임문휼민의를 짓다

임금이 친히 임문휼민의(臨門恤民儀)를 지었다. 당초 명(明)나라 태사(太史) 초횡(焦竑)이 《양정도해(養正圖解)》를 만들고 책 머리에 문왕(文王)이 사민(四民)을 구휼한 논설을 실었다. 그 책을 금중(禁中)에 간직해 오던 중 숙종(肅宗)이 찬(贊)을 만들었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뭇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임어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덕(德)이 백성들에게 미친 것이 없는지라, 문왕의 정사에 의거하여 사민을 궐문 아래로 불러오게 하고 세자와 더불어 궐문에 나아가서 위로해 주려고 한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유신(儒臣)을 인견하고 초횡의 책을 내어 보이고는 경조(京兆)의 관원에게 명하여 궁민(窮民)을 초(抄)해서 아뢰도록 하였다. 또 말하기를,

"치평(治平)의 세상에서 그 임금은 심히 위구(危懼)스러운 것이니, 세자로 하여금 궁민들의 모습을 직접 보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드디어 친히 의주(儀註)를 지어 예조(禮曹)에 내렸는데, 의주에 이르기를,

"세자가 먼저 홍화문(弘化門) 안 막차(幕次)로 나아가고 내가 이어 소여(小輿)로 홍화문 안에 나아가서 동쪽 사닥다리로 올라 누(樓)로 나아간다. 승사(承史)135) 는 서쪽 사닥다리로 올라 누로 나아가고 영상과 좌상도 일례(一例)로 입시한다. 시위(侍衛)는 다만 병조(兵曹)와 총부(摠府)에 입직(入直)한 인원으로 하되, 당상과 낭청은 누로 오르고 나머지는 모두 문 안에서 멈추며 삼문(三門)을 활짝 연다. 세자가 지영(祗迎)136) 한 뒤에 서쪽 사닥다리로 누에 올라와 시좌(侍坐)하며, 관원 두 사람이 모시고 올라온다. 경조(京兆)의 당상과 낭청은 부관(部官)을 인솔하고 문 밖에서 차례로 선다. 전좌(殿坐)한 뒤에 앞뒤에서 사배(四拜)를 행하고 사민은 절하지 않는다. 절을 마치면 경조의 당상과 낭청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오부(五部)의 관원은 부차(部次)대로 사민을 이끌고는 고휼(顧恤)하는 것을 받는데, 선혜청(宣惠廳)의 낭관이 상(賞)을 반사하는 예(例)에 의하여 쌀을 나누어 준다. 나누어 주는 일이 끝나면 통례(通禮)가 예필(禮畢)을 청하고 대내(大內)로 되돌아온다. 이에 세자가 먼저 누에서 내려와 지영하고 뒤를 따라 대내로 돌아온다. 사민 가운데 매우 늙은 사람은 지팡이를 허락하고 친경(親耕)과 친예(親刈)의 예(禮)에 의하여 모두 상복(常服)을 입으며, 시위는 융복(戎服)으로 한다. 승사와 대신·궁료(宮僚)와 경조의 당상과 낭청 이하는 모두 시복(時服)으로 하며, 고취(鼓吹)·의장(儀仗)·협연(夾輦)은 제외한다. 단지 입직군(入直軍)만으로 궐문(闕門)을 파수(把守)하고 궐문 밖에 문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집춘영(集春營)·광지영(廣智營)·신영(新營)·훈어(訓御)137) 의 보군(步軍) 각각 1초(哨)로써 문밖에 분립(分立)케 하고 산선(繖扇)은 누 아래에 정지하게 한다. 사민 가운데 사부(士夫)의 과녀(寡女) 및 그 밖에 친히 나오지 못할 사람은 모두 대신 받게 한다."

하였다. 이어 승지 윤광의(尹光毅)에게 이르기를,

"조사(朝士)로서 파직되어 가난한 자도 마땅히 구휼하여야 할 것인데, 마땅히 스스로 와서 받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내리는 물건을 어찌 친히 받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한림(翰林) 이의철(李宜哲)이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임금이 내리시는 것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신하의 염의(廉義)도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어찌 조사(朝士)로서 쌀자루를 가지고 민오(民伍)의 사이에 끼어서 구차스럽고 천한 지경을 밟겠습니까? 자사(子思)는 임금이 내리는 음식이라도 오히려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이것이겠습니까?"

하니, 윤광의가 말하기를,

"자사는 빈사(賓師)이었으니, 자처(自處)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의철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선비의 처신에 어찌 지위의 고하(高下)가 있다 하여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행동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내가 이로 인하여 조사를 욕되게 할까 두렵다."

하고, 이어 영갑(令甲)을 밝혀 전의 조관(朝官)은 종들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였다. 인하여 윤음(綸音)을 내리어 석년(昔年)에 백성을 위하던 뜻을 계술(繼述)하는 것임을 표시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46면
  •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

  • [註 135]
    승사(承史) : 승지와 사관.
  • [註 136]
    지영(祗迎) : 임금을 공경히 맞음.
  • [註 137]
    훈어(訓御) : 훈련 도감과 어영청.

○壬午/上親製臨門恤民儀。 初太史焦竤, 作《養正圖解》, 首載文王恤四民之說。 其書藏於禁中, 肅宗爲之作贊, 至是上謂群臣曰: "予臨御多年, 無德及民, 欲依文王之政, 致四民於闕下, 與世子臨門而勞賜之。" 咸曰: "善。" 於是, 上引儒臣, 出書示之, 命京兆官, 抄窮民以聞。 且曰: "治平之世, 其君甚可危懼, 予欲使世子, 見窮民之狀也。" 遂親製儀註, 下禮曹, 儀註曰:

世子先就弘化門內幕次, 予仍以小輿詣弘化門內, 陞東梯詣樓。 承、史自西梯詣樓, 領、左相一例入侍。 侍衛只兵曹、摠府入直人員, 而堂、郞登樓, 餘皆止於門內, 洞開三門。 世子祗迎後, 自西梯登樓侍坐, 官員二人陪登。 京兆堂、郞率部官, 門外序立。 殿坐後, 先後行四拜, 四民不拜。 拜畢, 京兆堂、郞, 分左右立, 五部官以部次率四民, 受顧恤, 惠廳郞依頒賞例頒米。 頒訖, 通禮請禮畢而還內。 世子先下樓祗迎, 隨後還內。 四民中篤老者, 許其杖, 依親耕、親刈禮, 竝服常服, 侍衛戎服。 承ㆍ史、大臣、宮僚、京兆堂ㆍ郞以下, 竝時服, 除鼓吹、儀仗、夾輦。 只入直軍, 把守闕門, 門外無作門。 只以集春營、廣智營、新營、訓御步軍各一哨, 分立門外, 繖扇停於樓下。 四民中士夫寡女及其外不能親進者, 皆令代受。 仍謂承旨尹光毅曰: "朝士之罷官而貧者, 亦當恤之, 當自來受否?" 對曰: "君賜之物, 豈不親受?" 翰林李宜哲曰: "不可。 君賜雖重, 臣之廉義亦不輕。 安有朝士持米橐, 雜民伍之間, 以蹈苟賤之域哉? 思於君之所致饋, 尙猶不悅, 況於此乎?" 光毅曰: "子思賓師也, 自處當如是耳。" 宜哲曰: "不然。 士之所處, 豈可以位有高下而自輕其身乎?"

上曰: "善。 予恐圖此而爲朝士之辱也。" 乃著令前朝官, 使奴代受。 仍下綸音, 以示繼述昔年爲民之意。


  •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46면
  •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