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실록70권, 영조 25년 7월 20일 병인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좌의정 조현명이 철산의 서림성에 정한 2백명에게 징포치 못하도록 아뢰다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철산(鐵山)의 서림성(西林城)에 새로 첨사(僉使)를 설치하여 바야흐로 성 안에 기계(機械)를 비치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천수진(天水鎭)의 군졸로 바꾸어 정한 2백 명에게 매년 징포(徵布)토록 한다면 아마도 뒷날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이 조항은 마땅히 절목(節目) 가운데서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해진(該鎭)의 용도를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니, 감영(監營)의 어전(漁箭)·염부(鹽釜) 다섯 곳을 옮겨 떼어 주어서 그 진(鎭)의 용도에 보충토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임피(臨陂)의 나리포(羅里鋪)는 제주(濟州)의 백성을 위하여 설치하고 입죽(笠竹)과 어곽(魚藿)으로 미곡(米穀)과 교역하여 구황(救荒)을 대비토록 한 것인데, 별장(別將)들의 간사한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고군산 첨사(古群山僉使)로 하여금 구관(句管)토록 하였습니다마는, 폐단은 다시 전과 같다고 합니다. 청컨대 본관(本官) 및 인근의 관원으로 하여금 합동하여 조검(照檢)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7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45면
-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