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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3월 23일 신미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태조·신종·의종 세 황제를 대보단에 병향하는 의식을 정하다

다시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 세 황제를 대보단(大報壇)에 병향(幷享)하는 의식을 정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좌참찬 원경하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김재로에게 이르기를,

"경(卿)의 헌의(獻議)가 나의 의견과 서로 합치되나, 들으니 원경하가 들어왔다고 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고자 한다."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할아버지와 손자를 병렬(幷列)하는 것이 옛 예를 상고해 보아서 마침내 어떠할지 감히 헌의합니다. 대신이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와 소목(昭穆)의 예를 이끌어서 신의 할아버지와 손자를 병사(幷祀)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는 말을 배척하였으나, 신도 역시 변명할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동당(同堂)이라고 하나 그 실(室)이 이미 다르니, 아마도 두 황제를 한 제단에 모시는 것의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역시 제단은 함께 했으나 그 자리가 다르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소목(昭穆)의 제도는 희조(僖祖)가 중앙에 자리하여 동향을 하였기 때문에 비록 할아버지와 손자를 병렬해도 압존(壓尊)이 될 혐의는 없습니다. 지금의 경우는 신종이 주위(主位)가 되고 의종을 병렬할 것 같으면 이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자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니 실로 옛 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주공(周公)이 세 임금을 세 제단(祭壇)의 같은 터에서 고(告)한 글로 본다면 한 제단에서 병렬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희조(僖祖)를 동향(東向)으로 했다는 글을 보고 나의 마음에 감동됨이 있으며, 밤중에 그것을 생각하니 두렵고 근심스러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두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비록 크게 은혜에 보답하는 뜻이나 고황제(高皇帝)가 우리 동방을 돌보아 봉(封)해주고 국호(國號)를 하사한 은혜를 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한 모퉁이 청구(靑丘)에서 세 황제를 함께 제사지내면 어찌 엄연하지 않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예는 너무 번거로운 데에 관계되고 일은 신중함이 귀한 것이니 갑자기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널리 묻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 대왕께서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삼가 제후의 법도를 닦았는데, 태조 황제께서 특별히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하사하시고 면복(冕服)을 내리셨으니 조선은 곧 기자(箕子)의 옛 칭호입니다. 이 칭호를 주신 것이 어찌 백세에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공으로 태조의 휘호를 올려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또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예를 거행한다면 이는 전하께서 성조(聖祖)와 성고(聖考)의 지업(志業)을 계술하는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함께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김재로는 말하기를,

"황조의 여러 황제를 이미 모두 제향할 수 없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하여 임진년의 은혜에 보답하였고, 지금 의종을 추향(追享)하는 것은 병자년에 구원한 일에 보답하기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데에까지 이른다면 마침내 제례(祭禮)에 거듭 어려운 바가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두 황제만 제사지내면 실제로 제사지내지 않는 것과 같은 탄식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승지와 사관에게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고 명하니, 모두 세 황제를 함께 제사함이 실로 존주(尊周)의 의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나 유독 기사관(記事官) 채제공(蔡濟恭)만이 ‘정(情)은 비록 무궁하나 예는 한정이 있으니,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있는 승지와 입직한 옥당의 관원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하순하자, 승지 김상신(金相紳)은 단연코 행하여야 한다고 청하였고, 응교 황경원(黃景源)은 ‘본조(本朝)가 대명(大明)에 대하여는 자식이 부모에 대한 것과 같으니, 대명이 이미 망한 후에는 기(杞)·송(宋)의 고사에 의거하여 태조(太祖)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 진실로 불가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또 좌의정·원임 대신·비국 당상과 여러 유신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잠이 안 오는 날 밤에 고요히 생각을 해보니 황단에 단지 두 황제만 제향을 받든다면 두렵고 근심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니, 신종(神宗)의 혼령이 장차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중주(中州)가 이적의 판국으로 변하였고 예의가 청구(靑丘)에만 유독 남아 있으니, 이는 바로 뜻 있는 선비가 통탄하며 울어야 할 처지이다. 세 황제를 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이 사체에 합당한 듯하니 경 등의 뜻은 어떠한가? 고황제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로 우리의 국호를 내렸으니 그 은혜와 분의를 어찌 차마 잊어버리겠는가?"

하고, 임금이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좌의정 조현명이 말하기를,

"중국[神州]이 망하여 종묘와 사직이 빈터가 되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은혜를 갚는 도리에 있어서는 비록 열성조를 모두 제향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으나, 경전(經傳)을 상고하건대 옛날 이런 예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조(先朝)에서 제단을 설치하고 이름을 대보(大報)라고 하였으니, 이는 임진년 우리 나라를 재조시킨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사(正史)가 나옴으로 인하여 의종을 병향하였는데, 지금 또 한층 더 미루어 올려서 고황제를 병향한다면 아마도 한정된 절차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황제는 대조(大造)의 은혜가 있었고, 신종(神宗)은 재조(再造)의 은혜가 있는데, 그 큰 근본을 잊어버리는 것이 미안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밤중에 두려워하며 슬퍼하는 바이다."

하였다.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병자년에 동쪽으로 구원하신 은혜에 깊이 감동하고 선조(先朝)에서 대보(大報)한 뜻을 미루어 넓히시어 의종(毅宗)을 병향한다면, 두 황제의 출자인 태조 황제를 어찌 함께 제단에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조는 황조의 시작이고 의종은 황조의 마지막이며, 신종은 중간으로 우리 나라에 큰 은혜가 있으니 세 황제를 함께 제향한다면 존주(尊周)의 의리에 더욱 광채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로 하여금 이런 순문을 받게 하였다면 그는 반드시 힘껏 찬동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은 말하기를,

"이런 등속의 의논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 것이 방해롭지 않으니, 반드시 널리 묻고 반복하여 논란하게 하소서."

하고, 판돈녕부사 이기진(李箕鎭)은 말하기를,

"오늘의 하교는 전에 없었던 예(禮)입니다. 처음에는 의종을 병향하는 것으로 일이 시작되어 지금 갑자기 고황제를 함께 제향하려 하니 도리가 마침내 어떠할지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말하기를,

"예가 비록 인정에서 연유되기는 하나, 중도에서 절충하는 것이 귀한 바이니, 고황제를 병향하는 것은 아마도 대보(大報)의 뜻에 합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성(箕聖)조선(朝鮮)이란 칭호를 어떻게 준 것인데, 이 은혜를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황제의 은혜가 진실로 큽니다. 그러나 만약에 신종의종의 일이 없었다면 고황제를 위하여 단을 설치하였겠습니까, 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사가(私家)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원조(遠祖)를 어찌 다 제사지내겠습니까?"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런 의논은 없었으니,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며, 원경하는 말하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았던 전례를 후세에 거행하는 바가 많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우참찬 서종급(徐宗伋)·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사직 윤급(尹汲)은 모두 어렵게 여기고 삼가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였고, 응교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막중한 전례를 가볍게 의논하는 것은 옳지 못한데, 전하께서는 늘 한 가지 일을 만나면 번번이 한 마음으로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시니 이것이 전하의 병통입니다."

하였으며, 교리 김선행(金善行)은 말하기를,

"애당초 만약 황조가 멸망한 것으로써 혈제(血祭)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면 태조를 함께 제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선조(先朝)에서 단을 설치한 것으로 인하여 우리를 재조시켜 준 은혜를 갚고자 하였고, 의종의 사직을 위하여 죽은 절개와 주사(舟師)를 보내 구원하려 한 것은 동토(東土)의 인민들이 지금껏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성상께서 함께 제사지내는 뜻을 하교하신 것은 모두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황제를 함께 향사하고자 하는 것은 대보(大報)의 뜻에 어그러짐이 있으니, 전례(典禮)를 욕되게 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수찬 윤동도(尹東度)는 말하기를,

"태조(太朝)의 존엄함으로 낮추어 신손(神孫)의 제단에 나아가는 것은 예의 뜻에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이규채(李奎采)는 말하기를,

"하교가 대보의 칭호를 일컬은 뜻과 다름이 있으니 혹시 경솔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식을 낳음에 으레 ‘그 덕을 갚고자 하면 하늘이 다함이 없도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한 구석에 치우쳐 있는 나라에 칭호를 준 것이 아무리 의례적인 전례라고 하나 대보(大報)의 뜻에 가깝지 않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규채가 말하기를,

"덕을 갚고자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쓰는 것이지, 군상(君上)에게 쓰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고, 임집(任)도 또한 다른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원경하가 말하기를,

"윤동도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나아가는 격이라는 의논에 대하여 신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으나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건대 오히려 근거할 바가 있고, 김선행의 욕되게 하는 데 가깝다는 말은 매우 잘못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조에 향화(香火)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세 황제를 제단에 향사하려는 것이다. 혹시라도 중흥(中興)을 할 것 같으면 우리 나라에서 어찌 다시 제사지낼 필요가 있겠는가? 향화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세 황제를 향사한다면 과연 이것은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여러 옥당 관원의 의논이 모두 다투기를 매우 힘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신은 동쪽 번국(藩國)의 한낱 배신(陪臣)인데도 두 황제에게 제사하였는데, 나는 동쪽 번국의 왕으로서 세 황제를 함께 제사함에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조금 물러나라고 명하였다. 2경(更)쯤에 임금이 집서문(集瑞門) 밖에 나와 앉아서 다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정침(正寢)에서 불안하여 이 문에 나와 앉으니, 선조(先朝)의 영혼이 오르내리면서 혹시 나에게로 다가오신 듯하다."

하였다. 인하여 김선행에게 숙묘(肅廟) 어제시(御製詩) 4수(首)를 읽도록 명하였다. 그 셋째 시에 이르기를,

"고황제가 우리에게 조선 국호를 내려 주셨네.

임진년 참담할 때 누가 재조시켰던가.

제후의 법도를 3백 년 동안 삼가 지켰지만,

하늘과 같은 성덕을 어찌 다 갚으리."

하고, 그 넷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성이 적군에 포위되었던 해를 어찌 차마 말하랴?

이로부터 다시 천자에게 조회하지 못하였네.

슬프다. 갑신년의 주갑(周甲)이 벌써 돌아오니,

고국에 향사 받들 사람이 전혀 없구나."

하였다. 임금이 손을 모으고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나도 불충하고 불효한 사람이고, 여러 신하들 역시 잘못되었다. 선조(先朝)의 어제(御製) 가운데 ‘보(報)’ 자는 곧 대보(大報)의 뜻이고, 변두(邊豆)는 곧 향사(享祀)의 뜻이다. 어제를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신을 시켜 그것을 읽게 한 뒤에야 비로소 옛날의 성의(聖意)를 알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효이다. 고황제와 신종 황제의 공덕과 은의(恩義)를 연중(筵中)에서 비교하여 헤아린 바가 있었으니, 이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뿐이다. 이것이 나의 불충이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고황제를 대보단에 함께 제사하는 것을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3백 년 황조의 은혜를 망각한다면 어찌 그르지 아니한가? 나의 뜻이 벌써 정하여졌으니 각자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조의 어제에 이미 ‘보(報)’ 자의 뜻이 있었으니, 성상의 계술(繼述)하는 도리로서는 뜻을 결단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 가운데 네 글자는 신의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말하겠습니까?"

하였으며, 황경원은 말하기를,

"성상의 제술(製述)에서 선조(先朝)의 남긴 뜻을 볼 수 있으니, 기(杞)·송(宋)의 고사에 의거하여 고황제를 함께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김선행은 또 다른 의논이 없다는 것으로 우러러 대답하였으며, 원경하는 말하기를,

"의종(毅宗)의 휘호(徽號)는 《명사(明史)》를 상고해보니 갑신년066) 6월 무오일(戊午日)에 대행 황제(大行皇帝)의 시호를 올리기를, 소천 역도 강명 각검 규문 분무 돈인 무효 열황제(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라 하였고, 묘호는 사종(思宗)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로써 신위(神位)에 쓰는 것이 마땅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죄주는 것도 《춘추(春秋)》를 통해서이며 나를 아는 것도 《춘추》를 통해서이다.’ 하였듯이 나 역시 나를 안다거나 나를 넘친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 거사에 있다고 여긴다. 중화(中華)에서 태조를 역대 제왕의 묘당에서 제사를 받들었으나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즐거이 흠향(歆饗)하겠는가? 오늘의 단사(壇祀)로 황명(皇明)의 이미 끊어졌던 향화(香火)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아! 우리 나라가 고황제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특별히 봉전(封典)을 허락하였고 국호(國號)를 내렸으니 외번(外藩)의 작은 나라를 예로써 융성하게 대우함은 천고에 뛰어났으며, 다시 신종 황제의 재조시켜 준 망극한 은혜와 병자년의 난리에는 의종 황제가 장수에게 동국(東國)을 구원하도록 명하셨으니, 황제의 은혜를 돌이켜 생각함에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신다. 그 은덕을 갚고자 하면 하늘과 같아 다함이 없으며, 멀리 중주(中州)를 바라보니 황조의 향화가 끊긴 지 벌써 오래되었다. 지금 의종 황제를 뒤좇아 향사할 때에 세 황제를 함께 제사함은 예(禮)에 진실로 당연하니 한 제단에서 황제를 모시면 황조의 해와 달이 앞으로 다시 조종(朝宗)의 나라에 비칠 것이다. 이 즈음에 옛날 어제시(御製詩)를 생각하고 세 황제를 추모하는 융성한 뜻이 두 편의 시 가운데 애연하며 어제시의 미묘한 뜻이 소자의 마음과 은연중에 부합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소자의 마음에 슬픈 감회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개도(開導)해 주신 것이니 그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다시 묻기를 기다리겠는가? 의조(儀曹)로 하여금 세 황제를 함께 향사하는 일을 곧 거행하도록 하고 제문(祭文)과 악장(樂章)을 뒤좇아 짓는 것도 역시 지난날의 하교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 황제의 서열, 곧 신종의 자리는 전대로 함이 마땅하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황조의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를 적용한다면 태조가 중앙에 위치하고 신종의종은 좌우로 나누어 배열하는 것이 합당하며, 금등(金縢)067) 의 제도를 적용하면 세 황제를 위해 각각 제단을 만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원경하는 말하기를,

"두 제도가 모두 의거할 바가 있으니 대신의 진달한 바가 진실로 예제(禮制)에 합당합니다."

하였으며, 황경원은 말하기를,

"천자가 제후의 나라에 가면 꼭 단궁(壇宮)을 하는데, 궁(宮)이란 것은 제단 주위에 쌓은 담을 뜻합니다. 지금 이 단궁의 제도를 형상하여 세 제단을 만들고 차례대로 세 황제를 향사할 것인데 단은 12척(尺)이 되고 담은 3백 보가 됩니다."

하였다. 김재로는 말하기를,

"단궁의 제도는 척수(尺數)가 너무 넓어 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몸소 단(壇)의 그림을 그려서 내렸는데, 그 제도는 한 제단에 세 단을 나눈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35면
  • 【분류】
    왕실(王室) / 외교(外交) / 풍속(風俗) / 역사(歷史)

  • [註 066]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 [註 067]
    금등(金縢) : 금등(金縢)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篇名). 무왕(武王)이 병을 앓을 때에 주공(周公)이 그 조상인 삼왕(三王) 즉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에게 기도하여 자신으로 무왕의 목숨을 대신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그 축책(祝冊)을 금등의 궤 속에 넣어 두었음. 이때 주공은 삼왕을 위해 세 개의 단(壇)을 만들었음.

○辛未/更定太祖神宗毅宗三皇幷享大報壇之儀。 上引見領議政金在魯、左參贊元景夏。 上謂在魯曰: "卿之獻議, 與予見相合, 而聞元景夏入來, 故欲爲質問。" 景夏曰: "祖、孫幷列考諸古禮, 終涉如何, 敢有獻議。 而大臣引同堂異室之制、昭穆之禮, 斥臣祖、孫不宜幷祀之言, 臣亦有可辨者。 雖曰同堂, 其室旣異, 則恐不可爲兩皇同壇之證也。" 上曰: "今亦同壇而異榻矣。" 景夏曰: "昭穆之制, 僖祖居中東向, 故雖祖孫幷列, 而壓尊無所嫌矣。 今則神宗主位, 毅宗若幷列, 則是祖孫比肩同位, 實違古禮。 以周公告三王三壇同墠之文觀之, 其不當爲一壇幷列, 從可知矣。" 上曰: "見僖祖東向之文, 予心有感, 中夜思之, 有怵惕不安之懷矣。 幷祀兩皇, 雖大報之意, 而高皇帝眷顧我東, 錫封賜號之恩, 又何可忘乎? 一隅靑丘, 幷祀三皇, 豈不儼然乎?" 在魯曰: "禮涉太廣, 事貴愼重, 非倉卒所可議。 博詢宜矣。" 景夏曰: "昔我太祖大王 威化回軍, 恪修侯度, 太祖皇帝特賜朝鮮之號, 錫以冕服, 朝鮮箕子舊號也。 以此錫號, 豈非百世不可忘之恩乎? 先正臣宋時烈, 以威化回軍, 請上太祖徽號。 今若又行高皇同祀之禮, 則是殿下繼述聖祖、聖考之志業也, 臣謂幷祀爲宜。" 在魯曰: "皇朝列帝旣不可盡享, 故先朝設壇祀以報壬辰之恩, 今當追享毅宗, 以報丙子之事而已。 至若幷祀高皇, 則於禮終有所重難, 不可輕議。" 上曰: "只祀二皇, 則實有如不祭之歎矣。" 仍命承、史各陳所見, 皆以爲幷祀三皇, 實合尊周之義, 獨記事官蔡濟恭, 以 ‘情雖無窮, 禮則有限, 高皇幷祀, 似難輕議’ 爲對。 上命在院承旨、入直玉堂入侍下詢, 承旨金相紳請斷然行之, 應敎黃景源以爲, ‘本朝之於大明, 猶子之於父母, 大明旣亡之後, 依故事, 奉太祖之祀, 固無不可矣。’ 上又命左議政、原任大臣、備堂、諸儒臣入侍。 上曰: "予於無寐之夜, 靜以思之, 皇壇之只享二皇, 不無怵惕之心, 神宗陟降將謂斯何? 中州腥膻, 而靑丘獨存, 此正志士痛泣處也。 三皇一壇, 事體恰當, 卿等之意如何? 高皇朝鮮二字錫我國號, 其恩其義, 豈忍忘耶?" 上仍流涕。 左議政趙顯命曰: "神州陸沈, 廟社丘墟, 在我邦報恩之道, 雖盡享列祖, 未爲不可, 而考之經傳, 古無是禮。 故先朝設壇, 名以大報, 爲報壬辰再造之恩也。 正史出而幷享毅皇, 今又推上一層幷享高皇, 則恐無限節矣。" 上曰: "高皇有大造之恩, 神皇有再造之恩, 忘其大本, 似爲未安, 此予所以中夜怵惕者也。" 工曹判書趙觀彬曰: "我聖上深感丙子東援之恩, 推廣先朝大報之意, 幷享毅宗, 則二皇所自出之太祖皇帝, 豈可不同奉一壇乎? 太祖皇朝之始, 毅宗皇朝之終, 神宗中葉, 大有惠於我, 幷享三皇, 尤有光於尊周之義。 若使先正臣宋時烈承此詢問, 其必力贊之不暇矣。" 吏曹判書鄭羽良曰: "此等議, 不妨有同有異, 必博詢覆難焉。" 判敦寧李箕鎭曰: "今日下敎, 前所未有之禮。 初以毅宗幷享始事, 而今遽同享高皇, 道理終涉如何矣。" 戶曹判書朴文秀曰: "禮雖緣情, 所貴折中, 高皇幷享, 恐未合於大報之義矣。" 上曰: "箕聖 朝鮮之號, 何以錫之, 此恩可不報乎?" 文秀曰: "高皇之恩固大矣。 若無神宗毅宗事, 則爲高皇帝設壇乎, 否乎? 雖以私家言之, 遠祖豈可盡祭乎?" 顯命曰: "先朝無此議, 今不可輕議也。" 景夏曰: "列朝未行之典, 後世多有擧行者矣。" 上曰: "卿言是矣。" 右參贊徐宗伋、兵曹判書金尙魯, 司直尹汲皆主難愼之議, 應敎金尙喆曰: "莫重典禮, 不可輕議, 而殿下每遇一事, 輒一念憧憧, 此是殿下病處。" 校理金善行曰: "當初若以皇朝淪亡, 血祭爲當云爾, 則幷祭太祖可矣。 因先朝設壇, 欲報再造之恩, 毅宗殉社之節, 舟師之援, 東土人民至今感泣, 故聖敎幷祀之義, 皆曰恰當。 高皇幷祭, 有違大報之義, 在典禮不近於瀆乎?" 修撰尹東度曰: "以太祖之尊, 俯就神孫之壇, 禮意未安。" 李奎采曰: "下敎有異於大報設號之意, 無或率爾乎?" 上曰: "生子, 例以 ‘欲報之德, 昊天罔極’ 云者何也? 錫號偏邦, 雖曰例典, 若曰不襯於大報之義, 則予未之知也。" 奎采曰: "欲報之德, 用於父母, 不宜用於君上也。" 亦持異議, 景夏曰: "東度以祖就孫之議, 臣不曰是, 而考之《禮經》, 猶有所據, 善行近瀆之說, 甚非矣。" 上曰: "皇朝香火已絶, 故壇祀三皇。 如或中興, 則我國豈可復祀乎? 香火不絶而祀三皇, 則果是瀆也。" 顯命曰: "諸玉堂議, 皆是爭之甚力。" 上曰: "先正以東藩一陪臣, 而祀二皇, 予以東藩之王, 幷祀三皇, 有何不可?" 命少退。 二更, 上露坐於集瑞門, 復召大臣、諸臣曰: "予不安正寢, 出坐此門, 先朝陟降, 其或臨予矣。" 仍命金善行, 讀肅廟御製詩四首。 第三曰,

高皇錫我朝鮮號。 禍慘龍蛇孰再造? 侯度恪謹三百年, 如天聖德若何報?

第四曰,

忍道(狐)〔孤〕 城月暈年? 自玆不得更朝天。 痛哉申年已周六, 故國無人薦豆籩。

上拱手俯伏流涕良久曰: "予不忠不孝人也, 諸臣亦非矣。 先朝御製中報字, 卽大報之義, 籩豆卽享祀之意。 御製予未記憶, 使儒臣讀之, 然後始識昔年聖意, 此予不孝也。 高皇帝神皇帝功德恩義, 有所較量於筵中, 思之澟然。 此予不忠也。 今日諸臣, 以竝祀高皇於大報壇, 謂甚未穩, 忘却三百年皇朝之恩, 豈不非乎? 予意已定, 各陳所見。" 在魯曰: "先朝御製, 旣有報字之意, 在聖上繼述之道, 當決意行之。" 顯命曰: "聖敎四字, 臣罪萬死。 上意旣定, 臣何敢復言?" 景源曰: "聖製可見先朝遺意, 依故事, 竝祀高皇帝爲宜。" 善行又以無他議仰對, 景夏曰: "毅宗徽號, 考見《明史》, 則甲申六月戊午, 上大行諡曰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 廟號思宗矣。" 上曰: "當以此書神位矣。 孔子曰, ‘罪我者其春秋, 知我者其春秋。’ 予以爲知予濫予, 皆在此擧也。 中華太祖于歷代帝王廟, 陟降之靈, 其肯歆饗乎? 今日壇祀, 可續皇已絶之香火矣。" 仍敎曰: "嗚呼! 我國受高皇莫大之恩, 特許封典, 錫以國號, 以外藩小邦, 禮遇之隆, 夐絶千古, 復蒙神皇再造罔極之恩, 丙子之亂, 毅皇命將東援, 追惟皇恩, 涕泗霑襟。 欲報其德, 昊天罔極, 遙瞻中州, 皇朝之香火, 熄已久矣。 今於毅皇追祀之時, 三皇竝祀, 禮固當然, 一壇三皇, 皇朝之日月, 將復照於朝宗之邦。 此際覺得昔年御詩, 追慕三皇之盛意, 藹然於二篇之中, 而御詩微意, 暗合於今日小子之心, 此豈偶然哉? 小子之起感蹙惕者, 正若陟降開導之也, 其在繼述之道, 何待更詢? 令儀曹三皇竝祀, 卽爲擧行, 祭文樂章追撰, 亦依向日下敎擧行。" 上曰: "三皇序列, 則神宗之位當依前矣。" 在魯曰: "用皇朝同堂異室之制, 則太祖居中, 神宗毅宗當分列左右, 若用金縢三壇之制, 三皇當各壇矣。" 景夏曰: "二者俱有所據, 大臣所達, 允合禮制矣。" 景源曰: "天子適諸侯, 必爲壇宮, 宮者壝也。 今象此壇宮之制, 而爲三壇, 以次祀三皇, 壇可爲十二尋, 壝可爲三百步矣。" 在魯曰: "壇宮之制, 尺數太廣, 不可用也。" 上親寫壇圖下之, 其制以一壇分三壇也。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335면
  • 【분류】
    왕실(王室) / 외교(外交) / 풍속(風俗)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