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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3월 2일 경술 1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대신과 예조 당상을 인견하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황단(皇壇)을 설치한 것은 임진년046) 에 재조(再造)해 주신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의종 황제 때에는 천하의 형세가 어떠하였는데, 장수에게 출사(出師)를 명하여 외방의 번국(藩國)을 구원하게 하였고, 또 조선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만 그 장수가 잘 협력하여 구원을 도모하지 못했다고 꾸짖었으니, 그 감동하여 눈물을 흘림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실로 임진년의 은혜와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 신종과 함께 제사지내는 전례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3월 19일은 곧 의종 황제께서 사직을 위해 돌아가신 날입니다. 선조(先朝) 갑신년은 옛날 갑신년이 거듭 돌아오는 해이므로 이날 서총대(瑞葱臺)에서 의종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을 뿐이며, 대보단(大報壇)에 이르러서는 단지 신종만을 위해 설치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대대로 황조(皇朝)의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 황조가 망함에 있어서 특별히 고황제(高皇帝)로부터 제사를 지내더라도 어찌 그 정례(情禮)를 다 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종께서 천하의 힘을 다하여 망하여가는 나라를 재조시켜 주었으니, 이것은 실로 유사 이래 전혀 없었던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신종 황제를 위해 단을 설치하였고, 의종 황제는 함께 제사지내지 않은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갑신년047) 에 명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의종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고, 대보단의 경우는 신종 황제만을 제사지냈으니, 일이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신종은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국(東國)을 재조시켰고, 의종은 군사를 보냈다가 즉시 거두었으니, 덕의(德意)의 경중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나 아들이 받은 은혜의 두텁고 얇은 것을 가지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섬긴다면 이런 신하와 아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시험삼아 숭정(崇禎)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건대, 청나라 병사가 요양(遼陽)에 가득하고 유적(流賊)이 중원(中原)에 두루 널려 있었다. 그런 중에도 오히려 바다를 건너 멀리 군사를 보내어 속국을 구원하려 하였으니, 밤중에 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의종의 덕의(德意)가 신종과 다를 것이 없는데, 갑신년 뒤로 한번도 제사의 전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 칸의 사당에 소왕(昭王)을 제사지내는 일048) 이 어찌 청구(靑丘)에 있지 않은가? 만약 선조(先朝)께서 이 《명사》를 보셨다면 함께 제사지내는 전례는 응당 조정 신하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슬프고 간절합니다. 대저 동방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대명(大明)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데, 동토(東土)의 신민이 대명을 섬김에 어찌 감히 몸과 살을 아끼겠습니까? 그러나 대보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은혜를 보답하는 것입니다. 임금과 어버이를 섬길 적에 은혜의 두텁고 얇은 것으로써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러합니다만, 조공 종덕(祖功宗德)049) 역시 제사의 전례상 높고 낮은 절차가 있는 것이며, 또 정사(正史)에서 말한 것 역시 사실과 어긋나는 구절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의리의 지극히 정밀한 곳이므로 널리 유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정월에 황제가 친정(親征)하니 조선에서 급박함을 고했다는 등의 구절이 그러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널리 지방에 있는 유신들에게 묻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2면
  • 【분류】
    풍속(風俗) / 외교(外交)

  • [註 046]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047]
    갑신년 : 1644 인조 22년.
  • [註 048]
    한 칸의 사당에 소왕(昭王)을 제사지내는 일 : 소왕(昭王)은 주(周)나라 제후국(諸侯國)인 초(楚)나라 임금. 당(唐)나라 때 한유(韓愈)의 제초소왕묘시(題楚昭王廟詩)에 "오히려 구덕이 있기에 구덕을 생각하여 한 칸의 초가집에서 소왕의 제사를 지낸다.[猶有舊德懷舊德 一間茅屋祭昭王]"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구덕이 있는 황제의 제사를 지냄을 가리킴.
  • [註 049]
    조공 종덕(祖功宗德) : 조유공 종유덕(祖有功宗有德)의 준말로, 묘호(廟號)를 정함에 있어서 공(功)이 있는 이를 조(祖), 덕(德)이 있는 이를 종(宗)이라 함을 이른 것임.

○庚戌/上引見大臣、禮堂。 上曰: "昔年皇壇之設, 報壬辰再造之恩也。 毅皇之時, 天下何如, 而命將出師以救外藩, 及聞朝鮮下城, 只責其將帥之不能協圖, 其爲感泣, 當如何也? 此實與壬辰之恩無異同, 豈可無幷祀之典耶?" 領議政金在魯曰: "三月十九日, 卽毅宗皇帝殉社稷之日也。 先朝甲申, 以舊甲重回, 乃於是日, 祀毅皇瑞蔥臺而已, 至於大報壇, 則只爲神宗而設也。 我國世受皇朝之恩, 今皇朝淪亡, 雖自高皇帝祀之, 豈曰盡伸情禮, 而神宗竭天下之力, 再造垂亡之國, 此實載籍以來所未有之恩。 故蓋只爲神皇設壇, 而不竝祀毅皇也。" 禮曹判書金若魯曰: "甲申年則亡, 故祀毅皇, 大報壇則祀神皇, 事固有異。 神宗動天下之兵, 再造東國, 毅宗出師旋撤, 德意不無輕重。" 言未及卒, 上曰: "臣與子以受恩厚薄事君父, 焉用臣子哉? 試思崇禎時景像, 兵滿遼陽, 流賊遍中原。 然猶欲涉海出師, 遠救屬國, 中夜念此, 不覺淚下。 毅宗德意無異神皇, 甲申以後一未受祀典。 一間祭昭王者, 豈不在於靑丘乎? 先朝若見此《明史》, 則竝祀之典, 當不待廷臣之言矣。" 左議政趙顯命曰: "聖敎惻怛悲切。 夫東方一草一木, 無非大明之恩, 東土臣民於大明事, 豈敢惜身體髮膚? 而至於大報壇, 所以報載籍所無之恩者。 事君父不以恩之厚薄, 聖敎誠然, 而祖功宗德亦有祀典隆殺之節, 且正史所言亦不無爽實之句。 此乃義理至精密處, 博詢儒臣而處之宜矣。" 上曰: "爽實者, 指何語也?" 顯命曰: "正月親征朝鮮告急等句然矣。" 上命博詢於在外儒臣。


  • 【태백산사고본】 52책 69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32면
  • 【분류】
    풍속(風俗) /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