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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9월 27일 무인 4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정언 박성원이 여러 가지 국사에 대해 상소하다

정언 박성원(朴盛源)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이종성(李宗城)의 패려스러운 상소가 한번 나오자 죄를 성토하는 소장이 삼사(三司)에서 교대로 발론되었습니다. 비록 물러가 있던 도헌(都憲)과 연로(年老)한 간장(諫長)까지도 모두 일어나서 서로 잇달아 토죄한 것은 대개 시비(是非)를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때 견파(遣罷)시키는 형전을 내린 것에서 성의(聖意)의 소재를 상상할 수 있는데, 오직 저 당여를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하는 무리들은 단지 처분이 엄하지 않은 것만 보고서 돌보아 꺼리는 것이 없이 기회를 포착하여 느닷없이 불쑥 발론하여 마침내 멋대로 대론(大論)을 정지시킨 데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합사(合辭)로 올린 계사(啓辭)가 발론된 지 이미 오랩니다. 종전에 저들 가운데 대각(臺閣)으로 들어가 있는 자들이 또한 많았습니다만, 그때에는 일찍이 감히 갑자기 정지시키려 한 자들이 없었으니, 이는 하늘에서 품부(稟賦)한 본성(本性)이 그래도 없어지지 않아서 역적을 비호하는 죄과에 차마 스스로 빠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종성이 앞에서 창도하고 나섰을 적에 가볍게 파직만 시켰다가 되돌려 서용하고서 그 죄만큼 죄주지 않았으니, 저 기회를 엿보면서 날뛰는 무리들이 과연 무엇을 꺼려서 하지 못하는 짓이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버려둔다면 장래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이종성에게 멀리 귀양보내는 형전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근일의 정주(政注)를 가지고 논하여 본다면 이종성을 서용하라고 한 뒤에 서둘러 검용(檢用)하여 마치 공이 있는 이에게 상을 주고 노고가 있는 이에게 보답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제거(提擧)에 의망(擬望)하고 다음으로는 빈객(賓客)에 주의(注擬)하는 등 차례로 상응(相應)하여 숭장(崇奬)하는 뜻을 드러내어 보였으며, 기타 간범(干犯)한 부류들도 모두 혹여 누락될세라 수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망(政望)이 한번 나가게 되면 공의(公議)가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겼으니, 일이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후의 해당 전관(銓官)도 또한 견벌(譴罰)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겨울 통신사의 사행(使行)이 있을 때 하솔(下率)들이 부린 폐단은 전고에 없었던 것으로 징구(徵求)를 절제없이 마구 하여 매질이 낭자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잔학(殘虐)을 부리고 지나간 곳은 마치 난리를 겪은 것과 같았습니다. 봉사(奉使)한 신하가 염아(恬雅)하여 스스로 조심한 것은 가상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아랫사람을 잘 검속하지 못한 잘못은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조정에서 사람을 가려 보낸 본의가 어디 있습니까? 부선(副船)이 실화(失火)한 데 이르러서는 진실로 이것이 뜻밖의 재변이었는데, 80근의 삼료(蔘料)를 다시 준비하였으며 기타의 물건도 수송(輸送)하느라고 위로는 성상에게 걱정을 끼치게 하였고 아래로는 중외(中外)의 재화(財貨)를 바닥나게 했으니, 주관(主管)한 신하에게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복명(復命)하는 날 상이 있었고 벌은 없었는가 하면 자급(資級)을 건너뛰어 직질(職秩)을 올려서 총애로운 은전이 융숭하였으니, 이러고도 형정(刑政)이 공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차지(次知)와 역관(譯官)에게는 가벼운 감죄(勘罪)도 없이 후한 은전을 내린 것은 더더욱 부당한 데 관계되는 것으로 또한 상은 신중히 하고 벌은 반드시 내린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본보기로 후세에 전하여 뒷사람을 징계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세 사신(使臣) 이하를 죄의 경중에 따라 감단(勘斷)함으로써 봉사한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대저 곤임(閫任)과 수령의 관계는 도백(道伯)의 경우와 견주어보면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 또한 한 도(道)의 원수(元帥)인 것입니다. 지난번 평안 병사 구성익(具聖益)의 상사(喪事)에 시신(屍身)이 빈소에 있는 채 반구(返柩)하지 않았을 적에 도내(道內)의 두셋의 수재(守宰)들이 안주(安州)의 객관(客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는데, 풍악을 크게 벌여 놓았었고 영기(營妓) 가운데 흰옷을 입은 자들도 또한 그 가운데 참여했었다고 하니, 듣기에 놀라운 것은 물론이고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한 가지 사단인 것입니다. 그때 모여 참석한 수령들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책벌(責罰)을 시행하게 하소서. 이춘제(李春躋)가 지난번 당한 일은 그에게 있어서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비록 그 본사(本事)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의 서제(庶弟)가 그때의 일 때문에 치도곤(治盜棍)의 형을 받다가 죽기에 이른 것은 참으로 이른바 ‘나 때문에 죽었다[由我而死]’130) 고 한 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연회에 갔다가 죽은 사람이 이미 한두 집이 아니었으니, 그들의 부형이나 자제가 된 사람들의 입장은 인정으로 참작하여 보더라도 어찌 이춘제와 함께 조신(朝紳)들 사이에서 함께 행동하려 하겠습니까?

이춘제가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진실로 문을 닫고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서 사람들과의 교접(交接)을 드물게 했어야 하는데, 이에 도리어 그 수치를 참아내고 평인(平人)처럼 스스로 조신들이 주행(周行)하는 사이에 서서 경재(卿宰)의 반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으니, 남들은 말을 않고 있지만 어찌 속으로 반성하여 볼 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염방(廉防)이 크게 무너져 다시 남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청컨대 이춘제를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간삭(刊削)시키소서. 여름 사이에 괴원 분관(槐院分館)131) 한 뒤 외람되고 난잡했다는 이야기가 온 세상에 전파되어 물론(物論)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경조(李景祚)·오언빈(吳彦賓)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난잡하고 공평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것으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오언빈이 당초 복과(復科)되었을 적에 이미 비난하는 의논이 많았으니 이는 5점(點)에 분방(分榜)하는 제방이 크게 무너졌으며, 이경조가 어로(魚魯)를 분변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등제(登第)한 처음에 전파되었습니다만, 그의 숙부인 이태령(李泰齡)이 혹시라도 누락될세라 멋대로 가점(加點)했으므로 권점(圈點) 가운데 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청컨대 회권(會圈)을 주관한 사람들을 아울러 삭직(削職)시키소서. 이태령은 사심을 품고 가점하는 죄를 범했으니, 각별히 엄중히 조처하고 다시 분관하게 하소서. 승문원의 제거(提擧)와 주사(籌司)의 당상은 지위와 명망이 자별하고 직임이 긴중하기 때문에 진실로 글이 훌륭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경솔히 제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경재(卿宰)들이 으레 겸하게 되어 명망과 실상이 드러나지 않은 유엄(柳儼)·유복명(柳復明)도 아울러 그 선발에 참여되었으니, 이는 실로 벼슬자리를 위하여 사람을 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울러 개정(改正)하소서.

대간(臺諫)의 직책은 위로 임금과 시비를 다투고 아래로 대신(大臣)과 가부(可否)를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 직책에 대해 어렵게 여기고 신중을 기해서 경솔히 제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장통(掌通)132) 을 특교(特敎)로 영구히 파기시킨 데에서 대개 상세히 하고 신중히 하는 지극한 뜻을 알 수 있는데도, 용렬하고 나약한 무리들이 그 사이에 구차스럽게 충차(充差)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선부(選部)에 신칙하여 특별히 신중하게 가리도록 하소서. 전 헌납 박수(朴璲)는 향임(鄕任)을 탄핵함에 있어 느른하고 번뇌한 것이 더없이 극심하였는데, ‘세력이 백배(百倍)나 되어 감히 손을 댈 수 없다.’는 등의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대풍(臺風)을 무너뜨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수치를 느끼게 하니, 대선(臺選)에서 삭제시키도록 명하소서.

전 군수 정광운(鄭廣運)은 그가 대지(臺地)에 있었을 적에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지난번 도신(道臣)의 장계를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가 정사를 제대로 행하지 않고 형벌을 혹독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파출(罷黜)만 시키고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조적(朝籍)에서 영구히 삭제시키고 다시는 검의(檢擬)하지 말게 하소서.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근일보다 더 심한 적이 없어서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을 고치(高致)로 여기고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상책(上策)으로 삼고 있으므로 강직한 풍도와 충간(忠諫)하는 절개를 귀를 기울여도 들어 볼 수가 없습니다. 관사(官師)133) 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도 없어져버린 상태인데, 더구나 임금이 도리를 어긴 것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른 실수의 중대함에 대해 누가 감히 얼굴을 들고 기휘(忌諱)를 촉범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直諫)하려 하겠습니까? 언로가 막혔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를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찌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개연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꺼리지 않는 문을 활짝 열어 간언(諫言)이 오는 길을 넓히소서. 양역(良役)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는데, 만일 제때에 변통시키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망(危亡)은 서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대개 한 집에서 3정(丁)이 입역(立役)하는 것과 잡비까지 아울러 통틀어 말한다면 거의 15, 6냥이 넘는데,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은 또한 그 숫자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 사정법은 진실로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몇 년이 지나게 되면 또한 전과 같이 되는 폐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은 경외(京外)를 물론하고 위로 경상(卿相)의 집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례(一例)로 식구의 숫자를 계산하고 또 그 사이에서 남녀·장약(壯弱)을 나누어 10세에서 60세에 이르기까지 그 구전(口錢)을 받는다면, 위로는 군국(軍國)의 경용(經用)을 충족시킬 수 있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풀게 할 수 있겠습니다. 대저 지금 세상에서 이야기해야 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결포(結布)·호포(戶布)·구전(口錢)이 그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대개 결역(結役)의 번중(煩重)함이 지금 세상에 있어 하나의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비록 풍년이 든 해를 당하더라도 묵혀서 황폐하게 되어 버려 둔 곳에도 오히려 아무 이유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걱정이 있으니, 이러고도 백성들이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슬기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호포법(戶布法)은 행해도 폐단이 없기는 하지만, 또한 사소하게 고르지 못한 단서가 있기 때문에 십분 폐단이 없는 구전(口錢)만 못합니다. 신이 일찍이 이 구전에 관한 한 조항을 가지고 진신(搢紳)·사우(士友)에게 질의하여 보고 향곡(鄕曲)의 식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순문(詢問)하여 보니,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이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은 그 말이 ‘일단 구전법을 행하면서 상하의 구분이 없게 되면 명분(名分)이 이로부터 문란해질 것이다.’라는 것에 불과했으니,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대개 그 근본을 궁구하지 않고 단지 그 말단만 논한 것입니다.

하늘이 백성을 탄생시킬 적에는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었는데, 오직 수고로운 사람은 늘 수고롭고 편안한 사람은 늘 편안하게 하는 정사만이 유독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이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었는데도 구휼(救恤)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옛 성인(聖人)이 이른바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밀어붙이어 도랑으로 빠지게 한 것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구전법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명분에 있어서는 서로 문란하게 될 이치가 반드시 없을 것이니, 성명께서는 동요되어 의심하지 마시고 쾌히 건단(乾斷)을 내려 속히 행하소서. 이는 또한 이미 시행한 것이어서 증험할 수 있습니다. 방민(坊民)들이 좌경(坐更)134) 하는 법은 일찍이 연품(筵稟)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가좌(家座)135) 의 차례에 따르되 관위(官位)가 있거나 범민(凡民)이거나를 막론하고 돌려가면서 고르게 입역(立役)하게 했었습니다. 지금 이 구전법은 실로 만백성의 균역(均役)인 것이니, 좌경법(坐更法)에 견주어 볼 때 그 중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시행하기 쉬운 것은 좌경법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채택하여 시행하소서. 대저 법(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통상적인 이치인 것입니다만, 법에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 또한 성왕(聖王)이 법으로 다스려 온 성대한 일인 것입니다. 삼대(三代) 때 법을 변혁시키기도 하고 손익(損益)시키기도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양법(良法)이라 하여 유독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첨정(簽丁)의 폐단은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닌데, 신은 단지 그 가운데서 양정(良丁)이 감손되는 폐단만을 거론하여 진달하겠습니다. 교원(校院)136) 을 가탁하여 면하고 각소(各所)에 예속되어 면한 자들은 그 숫자가 본래 많지 않고 또 수시로 태정(汰定)하기 때문에 절로 영원히 잊어버리는 일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부가(富家)·세족(世族)의 묘하(墓下)에 자취를 의탁하고서 이름을 고쳐 사노(私奴)가 된 자들은 향곡(鄕曲)에서 무단(武斷)하는 자들의 울 밑에서 살게 되는데, 솔호(率戶)에 모록(冒錄)된 부류들이 각양각색으로 모면하기를 도모함에 있어서는 본래 그 술책이 많습니다. 이리하여 자손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인연하여 노예가 되니, 이러한데 양액(良額)이 어찌 감손되어 모자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전법이 시행되면 이런 등의 폐단은 저절로 소멸될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속오(束伍)는 곧 국가에서 긴급할 때 쓸 군졸인데도 오로지 군포(軍布)를 거두는 정사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는 부류들만으로 편성되어 입적(入籍)된 상태이니, 만일 뜻밖의 걱정이 있게 되면 국가의 쓰임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모두 흩어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구전법을 행하고 양역(良役)을 파한 다음 모두 부실(富實)한 백성들로 속오에 충정(充定)하며 또 장비(裝備)를 돕게 하기 위해 보인(保人) 10명씩을 주되, 보전(保錢)을 한결같이 구전(口錢)의 예(例)에 따라 시행한다면 또한 한쪽만 고통을 당하는 탄식을 면하게 할 수 있음은 물론 국가의 융정(戎政)에도 반드시 실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두 조항을 가지고 정신(廷臣)들에게 널리 문의하여 상세히 강론한 다음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종성(李宗城)에 대한 일은 이미 하교했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이러는가? 처음 대각(臺閣)에 올라와서 먼저 구습(舊習)을 부리고 있으니, 내가 노쇠하기는 했지만 진실로 놀랍다. 중신(重臣)에 대해 자정(自靖)해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그대가 스스로 말한 것이다. 통신사(通信使)의 사행에 과연 하배(下輩)들이 폐단을 부린 것이 있다면 계칙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세 사신(使臣)을 아울러 추고(推考)하여 무겁게 다스릴 것이고 세 수령에 관한 일은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예풍(禮風)에 관계되니 비국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사문(査問)하게 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승문원의 분관(分館)에 관한 일은 그것이 불공(不公)에 관계가 되었다면 해당 권인(圈人)은 아울러 파직시키고 이태령은 삭직(削職)시키겠다. 이경조는, 이태령이 승문원에 재직하고 있다면 회권(會圈)에 참여한 것이 어찌 외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불공(不公)했다면 그대로 시행할 수 없으니, 회권에서 발거(拔去)시키라. 오언빈은, 작은 허물은 덮어 감싸주는 것이 왕정(王政)에 있어 중대한 일인데, 더구나 본사(本事)의 단서에서 이미 벗어났으니, 성균관의 분관을 어찌 외람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논한 것이 지나친 것에 관계가 된다. 이미 처분을 내려 그 사람을 개정(改正)했으면 되었지 원권(原圈)을 개정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청하는 것은 특별히 개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외람된 짓이다. 원권을 혼란시키려는 그 의도가 무엇인가? 어찌 권점(圈點)한 사람이 없는데, 다시 개권(改圈)하는 도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이른바 혼란시킨다는 것이다. 비국과 승문원의 제조(提調)를 개정하는 일은 지나친 데 관계되는 일이다. 이 중재(重宰)는 거기에 선발된 것이 오히려 늦었다. 이춘제의 일은, 아! 지난날 그가 당한 일을 돌이켜보면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신하를 위하여 딱하게 여기고 있다. 서제(庶弟)를 위하여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의리는 이것이 어느 글에 보이는가?

나는 일찍이 왕첩(往牒)을 열람한 적이 있었지만 유하혜(柳下惠)137) 가 문을 닫고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겠다. 이런 등의 풍습(風習)은 참으로 돈후(敦厚)히 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두서너 신하에 대해 논한 것은 나약한 것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찌 경직(勁直)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박수의 일은 과연 진달한 바와 같은데, 비록 대풍(臺風)을 실추시켰다고는 하지만 지난번 이미 특별히 체차시켰다. 지난일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성인(聖人)이 훈계하신 것이다. 정광운을 잡아다 국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잡아다 국문하면 절로 해당되는 율(律)이 있게 될 것인데, 일의 결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겸하여 영구히 간삭시키기를 청하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대선(臺選)의 일에 대해 특별히 신중을 더하라는 말은 그 청이 옳으니, 전조(銓曹)를 신칙하겠다. 양역(良役)에 대한 일은, 깊숙한 궁중에 있으면서 곤궁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밤낮으로 어찌 해이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청한 것이 의도인즉슨 옳다. 호포(戶布)·구전(口錢)·결포(結布) 이 세 조항에 대한 의논은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이는 경솔히 먼저 강구(講求)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강구한다는 이름만 있고 실효가 없다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대풍(臺風)으로 임금을 면려한 말은 절실한 것에 관계되니, 마땅히 스스로 면려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07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註 130]
    ‘나 때문에 죽었다[由我而死]’ :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외척(外戚) 왕돈(王敦)이 반역을 꾀하자, 왕돈의 종제(從弟)인 왕도(王導)가 종족(宗族)을 인솔하고 대각(臺閣)에 나와서 대죄(待罪)하였는데, 주의(周顗)가 왕도의 충성을 들어 극력 신구(伸救)하였고 또 상소하여 왕도의 무죄(無罪)를 밝혔으나, 왕도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왕돈이 석두성(石頭城)에 웅거하고서 주의의 인망(人望)에 대해 물었을 적에 왕도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드디어 주의를 죽였다. 후에 왕도가 자신의 목숨을 구제해 준 주의의 상소문을 보고는 "내가 주의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주의가 나로 말미암아서 죽었으니 그에게 죄를 졌다."고 말하였음.
  • [註 131]
    괴원 분관(槐院分館) :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에 배속시키는 것. 분관(分館)은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승문원·성균관·교서관(校書館)의 세 곳에 배속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것.
  • [註 132]
    장통(掌通) : 장령의 후보자에 추천됨.
  • [註 133]
    관사(官師) : 백관(百官).
  • [註 134]
    좌경(坐更) : 보루각(報漏閣)에서 밤에 징과 북을 쳐서 시각(時刻)의 경(更)과 점(點)을 알리는 일. 초경 삼점(初更三點)에서 시작하여 오경 삼점(五更三點)에 마치며, 서울 각처의 경점(更點)을 치는 군사가 보루각의 징과 북소리를 받아 다시 징과 북을 쳐서 차례로 알렸음. 여기서는 좌경군(坐更軍)의 자체 설립에 대해 거론한 것으로, 곧 좌경군을 가리킴.
  • [註 135]
    가좌(家座) : 집터의 위치.
  • [註 136]
    교원(校院) : 향교와 서원.
  • [註 137]
    유하혜(柳下惠) : 춘추 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전금(殿禽). 전금이 상사(士師)라는 벼슬에 있을 때 세 번이나 출척(黜斥)을 당하였는데도 떠나지 않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정도(正道)로써 사람을 섬기면 어디에 간들 세 번 출척되지 않겠으며, 정도를 굽혀 사람을 섬긴다면 어찌 부모(父母)의 나라를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음.

○正言朴盛源上疏, 略曰:

向者李宗城之悖疏一出, 而聲罪之章, 迭發於三司。 雖以屛處之都憲、篤老之諫長, 皆起而相繼致討者, 蓋以是非不可不明, 隄防不可不嚴也。 伊時譴罷之典, 可想聖意之攸在, 惟彼死黨之類, 徒見其處分之不嚴, 無所顧忌, 乘機闖發, 終至於擅停大論而極矣。 夫合辭之啓發已久矣。 渠輩之從前入臺亦多, 其時曾不敢遽然停之者, 其秉彝之天, 猶有不泯, 護逆之科, 不忍自陷故也。 而宗城倡之於前, 薄罷旋敍, 不以其罪罪之, 彼窺覘跳跟之輩, 果何所憚而不爲也哉? 此而置之, 則將來之憂有不可勝言, 豈不大可畏哉? 臣謂李宗城宜施投竄之典。 若論近日政注, 則宗城蒙敍之後, 汲汲檢用, 有若賞功而酬勞者然。 首擬提擧, 副注賓客, 次第相應顯示崇奬之意, 其他干犯之類, 亦皆收錄, 猶恐或漏。 政望一出, 公議駭憤, 事之無嚴, 莫此爲甚。 前後當該銓官, 亦不可不譴罰也。 昨冬信使之行, 下率之作弊, 振古所無, 徵求無節, 鞭扑狼藉, 所過殘虐, 如經亂離。 奉使之臣, 恬雅自飮, 雖曰可嘉, 不能檢下之失, 在所難免, 烏在其朝家擇送之本意? 至於副船失火, 固是無妄之災, 而八十斤蔘料之改備, 其他物件之輸送, 上以貽聖上之慮, 下以殫中外之財, 主管之臣, 安得無罪? 復命之日, 有賞而無罰, 超資陞秩, 寵典隆加, 若此而其可謂刑政得平乎? 若夫次知、舌官之無薄勘而蒙厚典, 尤涉不當, 亦有違於愼賞必罰之道, 恐無以垂法而懲後也。 請三使臣以下, 從輕重勘斷, 以爲奉使者之戒焉。 夫閫任之於守令, 視道伯雖有差間, 亦一道之元帥也。 而向來平安兵使具聖益之喪, 在殯未返之時, 道內二三守宰, 遊宴於安州客館, 大張風樂, 營妓之服素者, 亦參其中云, 聽聞可駭, 亦關風敎之一端。 其時參會守令, 令本道査問, 以施責罰焉。 李春躋之向來所遭, 在渠可謂不幸, 雖不必深疑其本事, 而其庶弟其時事, 至死於治盜之刑, 則眞所謂由我而死者也。 且其日赴宴而死者旣非一二家, 則爲其父兄與子弟者, 參以人情, 寧欲與春躋周旋於朝紳之間哉? 在春躋自處之道, 固當杜門蟄伏, 罕與人交接, 而乃反包羞忍恥, 與同平人, 自立於周行之間, 比肩於卿宰之列, 人雖不言, 豈不內省自忸哉? 人心之陷溺, 廉防之大壞, 無復餘地, 請李春躋永刊仕版。 夏間槐院分館之後, 猥雜之說, 擧世傳播, 物論朋騰。 雖以李景祚吳彦賓事言之, 其雜亂不公, 擧此可知。 彦賓之當初復科, 已多非議, 五點分榜, 隄防大壞, 李景祚之不辨魚魯, 已播於登第之初, 其叔泰齡, 恐其或漏, 恣意加點, 圈中之人, 羞與爲列。 請主圈諸人, 竝削其職。 李泰齡挾私加點之罪, 各別嚴處, 使改分館焉。 承文提擧、籌司堂上, 地望自別, 爲任緊重, 苟非文華才猷者, 不宜輕授。 而近爲卿宰之例兼, 望實未著之柳儼柳復明竝與其選, 實非所以爲官擇人之意。 請竝改正焉。 臺諫之職, 上而與人主爭是非, 下而與大臣相可否, 國家之於是職, 不可不難愼而輕授也明矣。 掌通之特敎永罷, 蓋可見審愼之至意, 而闒茸巽懦之輩, 猶不免苟充於其間, 申飭選部, 另加愼擇焉。 前獻納朴璲之彈駁鄕任, 疲惱莫甚, 而勢力百倍, 不敢下手等語, 尤可駭也。 壞損臺風, 令人代羞, 請命刊去臺選焉。 前郡守鄭廣運曾在臺地, 已有人言。 雖以日者道臣狀啓觀之, 可知其乖政酷刑, 不可罷黜而止。 請永刊朝籍, 勿復檢擬焉。 言路之閉塞, 未有甚於近日, 以不言爲高致, 違牌爲上策, 骨鯁之風、忠諫之節, 側聽無聞。 官師規督, 亦且蔑如, 況乎君違之重、衮闕之大, 孰敢抗顔而觸諱冒死而直陳也哉? 言路閉而國不亡, 臣未之聞也。 寧不慨然於今日也? 伏乞大開不諱之門, 以廣來諫之路焉。 良役一事, 爲今日莫大之弊, 若不及時變通, 則國家之危亡, 可立而待也。 蓋一家三丁之役, 竝雜費總而言之, 則殆過於十五六兩, 若其隣族侵徵, 亦不在其數。 今此査正之法, 固不爲不美, 差過數年, 則亦難免如前之弊。 臣以爲勿論京外, 上自卿相家, 下至庶民, 而一例計其口數, 且分男女、壯弱於其間, 自十歲至六十而捧其口錢, 則上可以足軍國之經用, 下可以解吾民之倒懸矣。 夫世之爲此說者有三焉, 結布也戶布也口錢也。 何者, 蓋結役之煩重, 爲今世之一大弊瘼, 雖値豐亨之歲, 陳荒等棄之處, 猶有白地徵稅之患, 如此而民不逃散, 安可保也? 此法之不可行, 不待智者而知矣。 戶布之法, 雖可行之無弊, 而亦有些少不齊之端, 都不如口錢之十分無弊也。 臣常以此口錢一條, 質難於搢紳、士友, 博詢於鄕曲有識, 此法之行, 謂之便者固多。 其中所以難之者, 則其言不過曰, ‘一行口錢之法而無分於上下, 則名分自此而紊亂’, 爲此說者, 蓋不究其本而徒論其末。 天之生斯民, 無間於貴賤, 而惟勞逸之政, 獨有異焉。 使斯民窮困而不之恤, 則恐非古聖人所謂 ‘一夫不獲, 若己推而納之溝中’ 者也。 雖行口錢之法, 其於名分則必無相紊之理, 惟聖明勿以疑動, 夫揮乾斷而亟行也。 此亦有已行之可驗者。 坊民坐更之法, 曾因筵稟, 一從家座之次, 而毋論有官與凡民, 以爲輪行之均役。 今此口錢之法, 實爲萬民之均役, 則視坐更, 其重果何如? 而行之之易, 則曾無異焉。 更乞採施焉。 夫法久弊生, 理之常也, 法弊而改, 亦聖王制治之盛事。 三代所以變革損益者, 蓋以此也。 何獨於良法而不然也哉? 簽丁之弊不一其端, 而臣請只擧其良丁減損之弊而陳之。 托於校院而免焉, 屬之各所而免焉者, 其數本不夥然, 而有時汰定, 自無永失之事。 若夫投跡於富家、世族之墓下, 而改名私奴者, 居生於武斷鄕曲者之籬底, 而冒錄率戶之類, 各樣圖免, 自多其術。 及其子孫, 因緣爲奴, 如是而良額安得不損縮也哉? 口錢之法行, 則此等之弊, 自可消矣。 且念束伍, 卽國家緩急之卒, 而專事於收布之政, 故惟以貧殘無依之類總編而入籍, 脫有不虞, 則不爲國家之用, 而盡爲渙散。 若能行口錢而罷良役, 悉以富實之民, 充定於束伍, 且給資裝保十名, 而保錢一依口錢例施行, 則亦可免偏苦之歎, 國家之戎政, 必將有實效矣。 伏乞聖明, 將此兩條, 博詢廷臣, 詳講以行之焉。

批曰: "李宗城事, 業已下敎, 其何斷斷? 初登于臺, 先售舊習, 予雖耗矣, 良可駭也。 謂重臣以自靖者, 政爾自道也。 信使之行, 果有下輩之弊端, 則不可無飭, 三使臣幷從重推考, 三守令事果若此, 則有關禮風, 令備局査問本道而處之。 承文院分館事, 其涉不公, 當該圈人竝罷職, 李泰齡削職。 李景祚泰齡爲承文, 則參圈豈曰濫也? 而其曰不公, 則不可仍施拔圈。 吳彦賓則掩匿覆過, 王政之大者, 況本事端緖已脫, 成均分館, 豈曰濫乎? 今爾所論其涉過矣。 旣處分而改正其人, 何必改正原圈乎? 今爾所請, 非特欲改正乎? 濫也。 混亂其圈, 其意何則? 豈有無圈點之人而改圈之道乎? 此所謂混亂也。 備局、承文提調改正事, 其涉過矣。 此重宰, 其選晩矣。 李春躋事, 噫! 想往日之所遭, 在上者爲臣矜惻。 爲庶弟而杜門, 此等義理, 見於何文? 予則曾覽往牒, 莫知柳下惠之杜門。 此等風習, 誠非篤厚也。 大抵論二三臣者, 可謂揷軟, 豈可曰勁直? 朴璲事, 果若所陳, 而雖墜臺風, 往已特遞。 往事勿說, 聖人攸訓。 鄭廣運拿問事依施。 拿問則自有其律, 不待結事, 以一事兼請永刊, 莫知其是。 另加愼擇臺選事, 其請是矣, 申飭銓曹。 良役事, 廈氈之上, 思其窮民, 夙宵奚弛? 今者所請, 意則是也。 戶、口、結三條之議, 自古有之, 而此非輕先講求者。 何則, 有講究之名而無實效, 是欺民也。 以臺風勉君之言, 其涉切實, 當自勉。"


  • 【태백산사고본】 51책 6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307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