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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1월 17일 임인 2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어용의 모사와 이봉에 관한 어제인 수후문(垂後文)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한 어용(御容)의 면부(面部)에 점흔(點痕)이 있어 점점 안광(眼光)을 먹어 들어가고 있으므로 어제 다시 그려야 되겠다는 내용으로 동조(東朝)께 앙품(仰稟)하였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니 다시 그려서 영희전(永禧殿)으로 이봉(移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좌상(左相)이 나에게 화상(畵像)을 그려 자손들이 우러러보게 하도록 권하였는데, 사가(私家)의 경우에는 1백 개의 화상이 있더라도 받들어 저장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제왕가(帝王家)의 사체(事體)는 그렇지가 않아서 실로 후세에 큰 폐단이 된다. 내가 옛날에 은사(恩賜)받은 화본(畵本)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의 일은 이를 계술(繼述)로 여기기 십상이어서 차차 계승하여 그리게 된다면 진전(眞殿)이 곧 하나의 태묘(太廟)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나의 뜻은 황희(黃喜)가 반찬을 간소하게 한 뜻과 같다."

하고, 인하여 어제(御製)인 수후문(垂後文)을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화상을 그리는 것은 열명(說命)015) 에서 시작된 것인데, 말세에 점점 치성하여졌다. 아조(我朝)에서는 영희전(永禧殿) 삼실(三室)에다 어용(御容)을 보관하고 있는데, 열조(列朝)에서는 진정(眞幀)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아! 그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 옛날 무진년016) 우리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모사(模寫)하였고, 7년 뒤 우리 성고(聖考)의 어용(御容)을 그렸었다. 내가 사위(嗣位)한 지 9년 만에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장대(張大)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인 갑오년017) 에 은사(恩賜)받은 도본(圖本)이 있었는데, 지난날 은사받은 것을 없앨 수 없어 다시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뒷날 자손된 사람이 대대로 그린다면 그리기는 쉽지만 그 폐단은 곤란한 점이 있게 되어 진전(眞殿)의 실수(室數)가 장차 태묘(太廟)와 같게 되고야 말 것이다. 이제 진전을 중건(重建)하는 일로 인하여 나의 깊은 뜻을 보인다. 아! 뒷날 임금이 되고 신하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이 하교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번의 이 거조는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더 건조하는 일로 인하여 뒷날 장대하게 하는 폐단을 연다면, 이는 위로 나의 성고(聖考)의 겸억(謙抑)하는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되므로 특별히 징계하는 뜻을 보여 의궤(儀軌)에 붙일 것을 명한다. 아! 사왕(嗣王)들은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전교(傳敎)를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영희전(永禧殿)에 처음 광묘(光廟)018) 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에 또 원묘(元廟)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무진년에는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어진을 모사(模寫)하여 함께 봉안하였으므로 그대로 일전 삼실(一殿三室)의 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진전이 있으면 열성(列聖)의 영정도 똑같이 함께 봉안하는 것이 예(禮)에 있어 당연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근 30년 동안 봉안하여 오던 어용을 갑자기 이봉(移奉)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데, 자성(慈聖)께서 대체(大體)를 돌아보고 원대한 앞날을 생각하여 함께 봉안하려 하신 것이다. 계사년019) 에 도사(圖寫)한 궐전(闕殿)과 심도(沁都)020) 에 봉안했던 영정이 근래 탈이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해마다 점점 가중되고 있어 제때에 다시 모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모사하였으면 신본(新本)을 함께 진전에 봉안하는 것이 진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하겠기에 먼저 자성(慈聖)에게 여쭈어 윤허를 받았다. 오늘 진전에 전알할 때 친히 고유(告由)했는데 고유하고 난 뒤에는 날을 넘길 수가 없기에 오늘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한 것이다. 선조(先朝)의 어용과 삼성(三聖)의 어용을 모사하는 것, 진전을 중수하는 것은 사체가 모두 중한 것이니, 어용 모사 도감(御容模寫都監)의 당상과 낭청, 진전 중수 도감(眞殿重修都監)의 당상과 낭청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서계(書啓)하게 하라. 여러 가지 등등의 일도 이달 안으로 거행하라. 도제조에게 두 도감을 겸하여 맡기겠으니 그 망(望)에는 모사 중수 도감 도제조라고 써서 들이라.

아! 어진을 봉안하고 나서는 털끝만큼도 흠탈(欠頉)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곧 자식의 상정(常情)인 것이고, 또 한 전(殿)에 함께 봉안하여 몸소 청작(淸酌)을 올리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자식된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위로 과거에 비용을 아낀 성대한 뜻을 본받아 힘써 절약하는 쪽을 따르게 한 것은 자성의 하교에도 언급하였고, 나의 뜻도 또한 그러하다. 자성께서 제기(祭器) 가운데 전부터 써 오던 것이 있는 경우에는 새로 준비하지 말고 그것을 쓰라는 것으로 하교가 있으셨다. 자성의 하교가 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감히 조금이나마 경비(經費)를 도와 내가 단지 선왕을 위한 것일뿐, 장대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혜청(宣惠廳)의 선미(膳米) 1백 석을 탁지(度支)021) 로 보내어 그 비용을 보태게 하라. 도감의 여러 신하들도 이런 뜻을 본받아서 위로 우리 성고(聖考)께서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 성덕(盛德)에 부합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註 015]
    열명(說命) : 《서경(書經)》 상서(商書)의 편명(篇名)인데,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꿈에 어진 사람을 보고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그와 같은 사람을 찾던 결과 부암(傅巖)이란 곳에서 열(說)을 얻었다고 함.
  • [註 016]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 [註 017]
    갑오년 : 1714 숙종 40년.
  • [註 018]
    광묘(光廟) : 세조(世祖).
  • [註 019]
    계사년 : 1713 숙종 39년.
  • [註 020]
    심도(沁都) : 강화.
  • [註 021]
    탁지(度支) : 호조.

○命大臣、禮堂入侍。 上曰: "璿源殿奉安御容面部有點痕, 漸入眼彩, 昨以改摸之意, 仰稟東朝矣。" 領議政金在魯曰: "聖敎如此, 改摸移奉於永禧殿宜矣。" 上曰: "向時左相勸我畫像, 爲子孫觀瞻云, 而私家則雖有百畫像, 何難藏奉, 而帝王家事體則不然, 實爲後世之大弊矣。 予於昔年, 有恩賜之本, 我國之事, 謂以繼述, 次次繼畫, 則眞殿便成一太廟矣。 予意則與黃喜素膳之意同矣。" 因命書御製垂後文, 其略曰:

凡圖像, 始自說命而末世漸盛。 我朝永禧殿奉安三室御容, 而列朝多未有眞幀, 猗歟聖意, 可以仰體。 昔年戊辰, 摸寫我太祖影幀, 越七年我聖考圖畫御容。 予嗣服九年, 命繪以圖者, 非張大也。 在潛邸時甲午歲, 有恩賜圖本, 而昔日恩賜, 不可泯沒, 不可不更圖者也。 他日爲子孫者, 代代以圖, 其圖雖易, 其弊則難, 眞殿室數, 將如太廟而後已。 今因眞殿重建之事, 示予深意。 吁嗟! 他日, 爲其君爲其臣者, 焉敢忽此敎焉? 今者此擧, 神道、人情當然者。 而因此添建之擧, 以開日後張大之弊, 則是上負我聖考謙抑之意也, 特示微意, 命付儀軌。 嗚呼! 嗣王, 其敢忽哉? 其敢忽哉?

又命書傳敎曰:

永禧殿初奉光廟御眞, 其後又奉元廟御眞, 戊辰摸寫太祖大王御眞, 同爲奉安, 仍成一殿三室之制。 旣有眞殿, 則列聖影幀, 一體同奉, 於禮當然。 而近三十年奉安御容, 不忍遽然移奉, 迄于今日, 慈聖顧大體慮長遠, 其欲同奉。 癸巳圖寫闕殿及沁都奉安影幀, 近因有頉, 隨歲漸加, 不可不及時更摸。 旣已摸寫, 則奉以新本, 同安眞殿, 允合情禮, 先稟慈聖而蒙允。 今日眞殿展謁時, 親自告由, 旣告之後, 不可過日, 今日大臣、禮堂入侍之命, 蓋此也。 先朝御容、摸寫三聖、眞殿重修, 事體俱重, 御容摸寫都監堂ㆍ郞, 眞殿重修都監堂ㆍ郞, 其令該曹卽爲書啓。 凡諸等事, 自今月內擧行。 都提調兼察二都監, 其望以摸寫重修都監都提調書入。 噫! 旣奉御眞, 則其欲毫無欠頉, 乃人子之常情, 其欲同奉一殿, 躬薦淸酌, 亦子道之所當然也。 雖然上體昔年恤費之盛意, 務從節約, 慈敎攸曁, 予意亦然。 慈聖於祭器有昔年所御者, 則勿爲新備, 以此用之事下敎。 慈敎若此, 予豈敢不少助經費, 以示予只爲先不張大之意乎? 惠廳膳米一百石, 送于度支, 以補其費。 都監諸臣, 亦體此意, 上副我聖考節用愛民之盛德。


  • 【태백산사고본】 50책 6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