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관 관리를 인견하여 문종의 곤위가 궐위였음을 말하다
임금이 춘추관(春秋館) 당상과 낭청을 인견하니 비국 당상이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역사에서 상고한 등본(謄本)을 보건대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빈궁(嬪宮)에 있다가 승하(昇遐)한 뒤 그 해 비록 문씨(文氏)·권씨(權氏)를 뽑아 승휘(承徽)로 삼았으나 책빈(冊嬪)한 일은 없다. 병인년274) 소헌 왕후(昭憲王后)275) 의 국휼(國恤) 때에 다만 왕세자(王世子)·승휘 등의 복제(服制)는 있었으나 빈궁의 복제를 마련한 것은 없었으니, 빈위(嬪位)가 책봉(冊封)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임신년276) 문종(文宗)의 국휼 때에도 역시 다만 단묘(端廟) 및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3년 복제는 있으나 중궁전(中宮殿)의 3년 복제는 없다. 거기에 ‘명부(命婦)는 귀인(貴人)·소용(昭容)을 일컫는다.’라고 하였으니,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명부를 상세하게 썼는데 하물며 곤위(壼位)이겠는가? 이 역시 증명될 수 있다. 문종께서 잠저에 계실 때와 등극한 뒤에 공빈 최씨(恭嬪崔氏)라는 호가 모두 재록(載錄)된 것이 없으나 역시 한번 보고서 판단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있다.
경오년277) 고부(告訃)한 뒤에 세습(世襲)을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감(太監) 윤봉재(尹鳳齎)가 국왕과 왕비의 면복(冕服)을 받들고 왔다. 그때 내전(內殿)에 영접하는 예의 유무(有無)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예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이제 왕후가 이미 훙서(薨逝)한 것이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이는 곧 현덕 황후가 면복해서 황제(皇制) 가운데 권씨라고 일컬은 것이니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에 현덕 황후 성씨를 재록한 것은 이미 의심할 수가 없다.
임신년 7월 강맹경(姜孟卿) 등이 단묘(端廟)에게 아뢰기를, ‘내전(內殿)은 지극히 소중한데, 오랫동안 모후(母后)가 없으니 선조(先朝)의 귀인(貴人) 홍씨(洪氏)로써 내정(內政)을 총괄하게 하소서.’라고 청했으니, 이는 문묘(文廟)에게 곤위(壼位)가 없다는 첫 번째 증거가 될 수 있다. 계유년278) 12월 광묘(光廟)279) 께서 잠저에 계실 때 정인지(鄭麟趾) 등을 데리고 근정문(勤政門)에 서서 ‘위로 모후가 보호해 주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현비(賢妃)가 경계해 주는 도움이 없으니, 납비(納妃)하여 후사(後嗣)를 구하고 선왕의 혈통을 이어 만세(萬世)의 터를 여소서.’라고 청하였으니, 이는 문묘의 곤위(坤位)가 없다는 두 번째 증거이다. 다음 해 정부(政府)·6조(六曹)·집현전(集賢殿)의 2품 이상이 의논을 드려 현덕 왕후의 존호(尊號) 여섯 글자를 더했으니 문종 왕후는 다만 현덕 왕후만이 있었음이 환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10년 동안 빈위가 비었고 2년 동안 곤위가 없었던 것은 왕홍서의 사기(史紀) 가운데 성씨를 잘못 쓴 것이고, 전주(全州) 최씨의 족보 중에 공빈을 재록한 것은 견강부회해서 의심스러운데도 기록한 것이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명쾌하게 알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왕홍서가 잘못 기록했고 새로 간행한 《명사(明史)》가 믿을 만한 본(本)이 되는 것을 곧 판단할 수 있으며, 근정문에서 우리 광묘께서 종사(宗社)를 위하여 건청(建請)하였으니 단묘의 성덕이 이로 인하여 더욱 밝아지며 소자(小子)가 선조를 추모하는 작은 정성도 역시 이로 인하여 거의 펴질 수 있을 것이다.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다 듣고 알도록 하고, 호서(湖西) 유생의 소장은 이제 다시 논의할 것이 없으니 돌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베껴 온 설화(說話) 이외에 또 들을 만한 것이 있는가?"
하니, 김시형(金始炯)이 대답하기를,
"병진년280) 연간에 현덕 왕후에게 태기(胎氣)가 있자 세종 대왕께서 이에 봉씨(奉氏)를 폐하고 권씨를 승휘로 삼아 빈궁에 들였는데, 단종을 탄생하고 다음날 승하하였습니다. 정사년281) 이후로 다시 책빈(冊嬪)한 일이 없으므로 마음에 매우 의아하여 약방(藥房)에서 문후(問候)한 것을 받들어 상고하니, 각전(各殿)에 모두 문후하였는데 유독 빈궁에 문후한 것이 없었고, 또 문묘께서 등극한 이후를 상고하여도 중궁의 문후가 없으며, 또 무진년282) 연간에 대신(大臣)이 자주 계빈(繼嬪)을 책립(冊立)하는 일을 가지고 영묘(英廟)에게 진청(陳請)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문묘께서 등극하신 뒤의 일로 말하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어 처음부터 논할 수가 없었으니, 이 두어 가지 일에서도 중곤(中壼)이 궐위(闕位)되었던 것의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씨(金氏)·봉씨(奉氏)도 모두 폐해졌고 현덕 왕후도 역시 나이가 젊어서 승하했으나, 영묘께서 책빈의 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원손(元孫)이 이미 탄생하여 국가의 근본이 이미 굳어졌으니, 다시 사속(嗣續)의 근심이 없었으므로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 [註 274]병인년 : 1446 세종 28년.
- [註 275]
소헌 왕후(昭憲王后) : 세종 대왕의 비(妃) 심씨(沈氏).- [註 276]
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277]
경오년 : 1450 문종 즉위년.- [註 278]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註 279]
광묘(光廟) : 세조(世祖).- [註 280]
○上引見春秋館堂、郞, 備堂同入。 上曰: "今覽考史謄本, 顯德王后在嬪宮, 昇遐之後, 其年雖選文氏、權氏爲承徽, 而無冊嬪事。 丙寅, 昭憲王后國恤時, 只有王世子、承徽等服制, 而無嬪宮服制磨鍊, 嬪位不冊封可知。 壬申文宗國恤時, 亦只有端廟及內、外命婦三年之制, 而無中宮殿三年之制。 其曰命婦稱貴人、昭容, 可謂詳矣。 旣詳書命婦, 況壼位乎? 此亦可證。 文宗在邸, 與登位後恭嬪 崔氏之號, 俱無載錄, 而亦有一覽可以立辨者。 庚午告訃之後, 不待請襲, 太監尹鳳齎奉國王、王妃冕服而來。 其時詢問內殿迎接之禮有無, 僉曰禮無。 況今王后已薨乎? 以此推之, 此乃顯德王后冕服, 而皇制中稱權氏, 列聖誌狀, 以顯德王后姓氏載錄者, 旣無可疑。 壬申七月, 姜孟卿等啓于端廟, 請以 ‘內殿至重, 而久無母后, 以先朝貴人洪氏, 摠內政’ 云, 此無文廟壼位之一可證也。 癸酉十二月, 光廟在潛邸時, 率鄭麟趾等立勤政門, 請以 ‘上無母后保護之力, 下無賢妃儆戒之助, 納妃求嗣, 以承先王之統, 以開萬世之基’ 云, 此無文廟坤位之二可證也。 翌年政府、六曹、集賢殿二品以上獻議, 加顯德王后尊號六字, 文宗王后只有顯德昭然無疑。 而第以十年嬪位之曠, 二年坤位之缺, 王鴻緖史紀中姓氏之誤書, 《全州崔氏族譜》中, 恭嬪之載錄, 傅會疑錄。 今幸快知, 因此而王鴻緖之誤藁, 新刊《明史》之爲信本, 其可以立判, 而勤政門我光廟爲宗社建請, 端廟之聖德, 因此益彰, 小子慕先之微忱, 亦因此而庶可伸矣。 其令中外, 咸皆聞知, 而湖儒之章, 今無更議, 給之。" 上曰: "謄來說話外, 又有可聞者乎?" 金始烱對曰: "丙辰年間, 顯德王后有胎候, 世宗大王仍廢奉氏, 而權氏以承徽入嬪宮, 誕生端廟, 翌日昇遐。 而丁巳後更無冊嬪事, 故心甚疑訝, 奉考藥房問候, 則各殿皆有問候, 而獨無嬪宮問候, 又考文廟登極後, 則無中宮問候, 且戊辰年間, 大臣屢以冊立繼嬪事, 陳請英廟, 而皆不許。 以文廟登位後事言之, 方在諒陰中, 初無可論, 此數事可爲中壼闕位之明驗矣。" 上曰: "金氏、奉氏皆見廢, 顯德王后亦早歲昇遐, 英廟之不許冊嬪之請, 豈偶然乎?" 元孫旣誕, 國本已固, 更無嗣續之憂, 故有此事也。"
- 【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 [註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