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유학 박통원이 문종의 곤위에 관해 상소하니 《실록》을 상고하게 하다
충청도 유학(幼學) 박통원(朴通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종 대왕 왕비(文宗大王王妃) 현덕 왕후(顯德王后)께서 승하(昇遐)하신 후 12년간 곤위(壼位)가 오래 비어 있었습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명사(明史)》 열전(列傳)에 문종 왕후에게 고명(誥命)의 말을 내린 것이 있는데, 그 연월(年月)을 고찰하면 문종조(文宗朝)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고양(高陽) 땅에 한 고묘(古墓)가 있는데, 비석이 잘려서 고찰할 수가 없습니다만,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공빈(恭嬪) 최씨(崔氏)의 묘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씨 집 족보 가운데 역시 공빈 최씨가 있습니다. 연대(年代)를 미루어 보면 역시 문종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반드시 그 사이에 계빈(繼嬪) 최씨(崔氏)가 있었던 듯하나, 문헌으로는 징거할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문적(文蹟)을 널리 고찰하여 이를 정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중대한데다 의심이 없지 않다. 여러 신하들은 각각 소견을 진술함이 옳겠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정언섭(鄭彦燮)이 말하기를,
"신 역시 일찍이 들었습니다. 현덕 왕후(顯德王后)께서 승하하신 뒤 10년 동안 빈위(嬪位)가 없었고, 또 등극하신 후 2년 동안 곤위(坤位)가 있지 않았습니다. 사리(事理)로 헤아려 보면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거(考據)하는 바가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수백 년 발견되지 않았던 일이 지금 비로소 단서를 열게 되니 기다리고 있다가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서평균(西平君) 이요(李橈)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하순(下詢)하기를,
"유소(儒疏)의 사의(辭意)를 일찍이 들어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 역시 일찍이 들었습니다. 또 고양에 공빈의 묘가 있다는 것을 듣고 상달(上達)하려고 하니 중대하고, 사사로이 찾아 보려고 하니 외월(猥越)되어 잠자코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2년 동안 곤위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이러한 이치가 없으니 지극히 의심할 만하다. 그러나 단지 《보략(譜略)》에 실려 있지 않다면 마땅히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겠으나, 만약 《실록》에 나타나 보이지 않으면 신빙할 수 없다. 유소를 보고부터 내 마음이 근심스럽고 두렵다. 지금 이렇게 널리 묻고 널리 캐어 봄은 대개 명확한 문자(文字)를 얻고자 함이다. 종시 의심스럽고 어두우니 《실록》에서 상고해 내지 않을 수 없으나, 역시 중대함에 관계되므로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하는 것이다."
하니, 대신들이 모두 문종이 잠저에 있던 신유년269) 에 현덕 왕후가 훙서(薨逝)하고 문종이 승하한 것이 임신년270) 이었으니 그 사이 12년 동안 곤위가 없었다는 것은 이치 밖의 일이므로 《실록》을 상고해 보아야 마땅하다는 것으로 앙대(仰對)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
○忠淸道幼學朴通源上疏, 略曰:
文宗大王王妃 顯德王后昇遐後十二年間, 壼位久曠。 揆以事體, 必無是理。 《明史》列傳, 有賜文宗王后誥命之語, 考其年月, 似在於文宗朝。 且高陽地有一古墓, 碑石折斷 無可考, 古老相傳, 以恭嬪 崔氏墓。 而崔家族譜中亦有恭嬪 崔氏。 推之年代, 亦似在文宗朝矣。 此必其間有繼嬪崔氏, 而文獻莫徵也。 請博考文蹟而裁處之。
上曰: "此事重大, 而不無可疑。 諸臣各陳所見可也。" 都承旨鄭彦燮曰: "臣亦嘗聞之。 顯德王后昇遐後十年之間, 未有嬪位, 又登極後二年, 未有坤位。 揆諸事理, 不無可疑。 因此而有所考據則幸矣。 數百年未發之事, 今始開端, 若有待而然者矣。" 上命西平君 橈入侍。 下詢曰: "儒疏辭意, 曾聞之耶?" 對曰: "臣亦曾聞之。 且聞高陽有恭嬪墓, 而欲上達則重大, 私尋則猥越, 泯默至今矣。" 上曰: "十二年未有坤位, 決無是理, 極涉可疑。 而但不載於《譜略》, 則當考之《實錄》, 若不著見於《實錄》, 則無可憑信矣。 自見儒疏予心惕然。 今此廣詢博採, 蓋欲得其明的文字。 而終始疑晦, 不可不考出《實錄》, 而亦係重大, 問議于大臣。" 大臣皆以文宗在邸辛酉顯德王后薨逝, 文宗賓天在壬申, 則其間十二年無壼位, 此爲理外, 考見實錄爲宜, 仰對。
- 【태백산사고본】 49책 66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7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