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어사 한광조를 인견하여 지방관의 비위와 영덕 옥사에 관해 묻다
임금이 영남 어사 한광조(韓光肇)를 불러 보았는데, 한광조가 말하기를,
"방군포(防軍布)136) 는 바로 대가를 지급하는 물건이며 곤수(閫帥)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좌수사(左水使) 신만(申漫)이 약간만 대가로 지급하게 하고, 전부를 가져다 썼습니다. 쌀 50석(石)과 판재(板材) 5구(具)를 배에 실어 올려 보냈는데, 기타 왜국(倭國)의 물화(物貨)로 선물[善事]할 만한 것이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전 경주 부윤(慶州府尹) 정홍제(鄭弘濟)는 진정(賑政)을 아주 잘하였으나, 9천여 석을 요리(料理)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으며, 또 범수(犯手)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 좌병사 유동무(柳東茂)의 불법(不法)은 문서에 갖추어 있습니다. 그리고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덕후(金德厚)는 그의 모든 짐바리를 모두 소[牛]를 사서 보냈는데, 그 수효가 94두(頭)나 되었으나, 또 서로 결탁한 영비(營裨)137) 가 거짓으로 칭찬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아 대부(阿大夫)138) 이다. 잘 다스린 사람은 누구인가?"
하자, 한광조가 말하기를,
"사천 현감(泗川縣監) 이사순(李思順)은 지처(地處)가 비록 한미하기는 하나, 아주 잘 다스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덕(盈德)의 옥사(獄事)는 향전(鄕戰)에서 나왔는가?"
하자, 한광조가 말하기를,
"영덕의 고가(故家)와 대족(大族)은 모두 남인(南人)인데, 이른바 신향(新鄕)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서인(西人)이 되었다고 일컫는 자입니다. 요즈음에는 서인이 학궁(學宮)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으나, 구향(舊鄕)과 서로 경알(傾軋)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자(朱子)의 화상(畫像)이 비가 스며든 것으로 인하여 더럽혀졌기 때문에, 신향의 무리가 간혹 그 죄를 성토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화(禍)를 전가(轉嫁)시킬 계획을 꾸며 그 화상을 감추고, 아울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의 화상도 감추어 버리고는 남인이 훔쳐 갔다고 말을 퍼뜨렸습니다. 인하여 모모(某某) 7인의 성명을 지적하여 본현(本縣)에 정소(呈訴)하였는데, 본현에서는 진영(鎭營)에 통보하여 여러 해 동안 추핵(推覈)하면서 형장(刑杖)이 혹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원통하다고 일컬었었습니다. 신이 내려간 뒤에 그 사실을 추핵하여 알아내었으나, 화상이 간 곳은 끝까지 바로 공초하지 않고, 안산(案山)에 묻어 두었는데 사태(沙汰)가 났다고 하니, 물과 불에 던져 버리지 않았음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몇 해 전에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상소하였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50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교통-육운(陸運) / 교통-수운(水運) / 구휼(救恤) / 향촌(鄕村) / 사상-유학(儒學)
- [註 136]방군포(防軍布) : 방수군(防戍軍)의 보인(保人)이 내는 보포(保布).
- [註 137]
영비(營裨) : 감사(監司)의 막료(幕僚).- [註 138]
아 대부(阿大夫)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아(阿)땅의 대부(大夫). 아 대부가 지방에서 악정(惡政)을 하고도 왕의 측근에게 아부하여 선정(善政)을 했다고 왕을 속였는데, 이것이 뒤에 탄로되어 제나라 위왕(威王)이 아 대부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였음.○甲戌/上召見嶺南御史韓光肇, 光肇曰: "防軍布卽給代之物, 而非閫帥所可擅用者。 左水使申漫, 略干給代, 盡數取用。 米五十石、板材五具, 船載上送, 其他倭國物貨可以善事者, 不可勝計。 慶州前府尹鄭弘濟, 賑政頗善, 而料理九千餘石, 民多怨之, 又有犯手。 前左兵使柳東茂之不法, 具在文書。 興海郡守金德厚, 凡其駄載, 皆買牛以送, 其數爲九十四頭, 且以符同營裨, 虛譽頗多矣。" 上曰: "眞阿大夫也。 善治者誰也?" 光肇曰: "泗川縣監李思順, 地處雖微, 頗善治矣。" 上曰: "盈德獄事, 出鄕戰耶?" 光肇曰: "盈德故家、大族, 皆南人, 所謂新鄕, 則自稱爲西人者也。 近來則西人用事於學宮, 與舊鄕, 自相傾軋矣。 朱子畫像, 因雨漫漶, 故新鄕輩, 或慮聲罪, 遂生嫁禍之計, 匿其畫像, 竝匿先正臣宋時烈畫像倡言以南人偸竊。 因指摘某某七人姓名, 呈訴本縣, 本縣通于鎭營, 累年推覈, 刑杖酷毒, 人稱其冤。 臣下去之後, 推得其實, 然畫像去處, 終不直供, 以爲埋置案山, 因以沙汰云, 安知不投諸水火也?" 上曰: "頃年館學儒生不知如此, 陳疏矣。"
- 【태백산사고본】 48책 65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250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교통-육운(陸運) / 교통-수운(水運) / 구휼(救恤) / 향촌(鄕村) / 사상-유학(儒學)
- [註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