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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2월 15일 병자 4번째기사 1746년 청 건륭(乾隆) 11년

평안 도사 임집을 파직하고,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을 어긴 이명직을 조사하게 하다

평안 도사 임집(任)을 파직하라고 명하고,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 금지령을 어긴 이명직(李命稷)을 형조로 하여금 엄밀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재자관(䝴咨官) 이명직이 돌아오는 길에 비단을 사 가지고 오는 것을 평안 도사 임집이 수색하여 내어서 그 비단을 곧장 불태워 버리고 이명직은 순영의 감옥에 가둔 다음, 사유를 갖추어 써서 계문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명직이 맨 먼저 새로운 금지령을 범하였기 때문에 사형에 처하여야 하지만 아직 정해진 형률이 있지 않다 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금지된 물품을 몰래 사올 경우 법률상 본시 효시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정해진 형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제정한 이 금지령은 성덕(聖德)을 빛낼 제도로서, 다만 나라 안에 시행하여 습속을 만회할 기회일 뿐만 아니라, 이미 천하에 알려져 있습니다. 대개 무늬 있는 비단은 연경(燕京)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소주(蘇州)·항주(杭州)에서 짜다가 우리에게 파는 것으로서, 연경의 상인 정세태(鄭世泰)가 새로운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소문을 듣고서 깜짝 놀라며 당장 강남(江南)에 연락하여 직조를 중지시키고 우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네 국왕으로서는 진실로 성덕(聖德)의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제부터 살길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좋은 소문의 영향은 멀리 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명직을 죽이지 않는다면 진실로 법령이 흐트러져서 먼 곳 사람들의 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좌의정 정석오(鄭錫五)는 말하기를,

"어복(御服)에 쓰이는 면단(綿緞)의 경우는 호조에서 해전(該廛)에 은을 주어 사오도록 한 다음 가져다 쓰는 것이 상례입니다. 신은 일행을 조사하여 보아서 과연 비단 외에 금지령을 범한 물품이 있다면 전민(廛民)을 죄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조사를 하는 것도 옳거니와, 전민이 같이 범하였다면 역시 죽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병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인명은 지중한 것인 만큼, 사형을 의논할 경우 급히 하는 데에 힘쓰는 것은 옳지 못하고, 형률을 억지로 끌어대며 구차히 증거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애당초 정해진 형률이 없는데도 서둘러 죽인다면 이는 백성을 속이는 것이요, 그의 범행이 아무리 관무(官貿)가 아니라 하더라도 죽을 죄는 아닙니다. 지금부터 법조문을 분명히 세우고 나서 시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다른 여러 신하들도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장석지(張釋之)의 말218) 과 같이 그 자리에서 효시를 하였다면 그만이겠지만 조정으로서는 마땅히 법률을 살펴보아서 처리하여야 한다."

하고, 이어 형조에 명하기를,

"이명직은 잡아와서 엄밀히 조사한 다음에 아뢰도록 하고, 도사 임집은 마땅히 효시할 것을 청하여야 했음에도 의례적으로 가두기만 하였는데, 그것은 직무 유기이니, 파직시키라. 의주 부윤(義州府尹) 권일형(權一衡)은 연명으로 장계를 하였는데, 역시 흐리멍덩한 처사이니, 종중 추고하게 하고, 평안 감사 이기진(李箕鎭)은 직책이 번신(藩臣)인 만큼, 마땅히 엄중히 징벌하는 것에 협조하여야 했음에도 의례적인 등문(謄聞)만 하였으니, 역시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무늬 있는 비단의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 역시 장애되는 바가 있습니다. 지금 통신사가 나올 날이 멀지 않았는데 왜인에게 줄 예폐는 으레 화주(花紬)를 써 왔고, 왜인은 성미가 편협하여 비록 더 좋은 대단(大緞)을 대신 주더라도 반드시 약조를 구실삼을 것이니, 말썽을 빚어낼 단서가 생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 일은 교린(交隣)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참작하여 사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이것을 금지한 것은 대개 사치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니, 기이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멀리서 사다가 이웃나라의 사치를 돕는 것이 옳겠는가? 왜인의 상선이 남경(南京)을 왕래한다고 하니 혹 우리의 금지령을 들었을 법도 하고, 또 실로 우리에게 없어서 다른 물건으로 대신 주는 데는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저들이 어찌 까다롭게만 나오겠는가? 지금 이것을 이유로 금지를 풀고서 이 사실을 사책에 쓴다면 나는 후세의 논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의 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32면
  • 【분류】
    인사(人事)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의생활(衣生活) / 출판(出版) / 사법(司法) / 무역(貿易) / 상업(商業)

  • [註 218]
    장석지(張釋之)의 말 :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 장석지가 형벌을 관장하는 정위(廷尉)로 있었는데, 황제의 행차 앞으로 어떤 사람이 달려와 어가의 말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이를 잡아다 장석지에게 넘겨 다스리게 하였는데, 장석지가 법에 따라 벌금을 물렸다, 황제가 벌이 너무 가볍다고 하니, 장석지가 황제에게 "그때 폐하께서 사자로 하여금 아예 죽이게 했다면 모르거니와, 일단 정위에게 넘긴 이상에는 법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한 말.

○命罷平安都事 職, 紋緞犯禁人李命稷, 令秋曹嚴査以啓。 時回還齎咨官李命稷, 潛市禁緞而來, 平安都事 搜獲之, 卽焚其緞, 囚命稷于巡營獄, 具狀以聞。 上以命稷首犯新禁, 罪可死, 而猶未有定律, 詢于入侍諸臣。 領敦寧趙顯命曰: "潛貨禁物, 法本梟示, 不可謂無定律也。 今者此禁, 有光於聖德, 不但行于國中, 而爲挽回俗習之機, 亦已聞于天下。 蓋紋緞, 非燕京所出, 自織來, 而售諸我人, 燕商鄭世泰聞有新禁大驚, 卽報江南止其織紋, 謂我人曰, ‘在汝國王, 誠盛德事, 吾屬自此無以聊生矣。’ 令聞所曁, 不其遠乎? 今不誅命稷, 誠恐法遂解而爲遠人所笑也。" 左議政鄭錫五曰: "御服所需錦緞, 戶曹授銀, 該廛貿來取用例也。 臣謂一行照査, 果有雲紋外犯貨者, 廛民可罪也。" 顯命曰: "査可爲也, 而廛民同犯, 則亦可殺也。" 兵曹判書元景夏曰: "人命至重, 議大辟不可務快, 律不可曲引而苟證。 初未有定律而遽殺之, 是罔民也, 其所犯雖非官貿, 罪不至死。 第自今明立法條, 而後施之可矣。" 諸臣多以査處爲是, 上曰: "若昔張釋之言, 卽地梟示則已, 朝廷但當審法而處之。" 仍命刑曹, 押來命稷, 嚴査以聞。 都事 , 宜請梟示, 循例拘囚, 其涉不職, 罷職。 義州府尹權一衡, 聯名狀聞, 亦涉矇然, 從重推考。 平安監司李箕鎭, 職在藩臣, 宜贊嚴懲, 而循例謄聞, 亦推考。 戶曹判書金始炯曰: "禁紋之令, 亦有窒礙處。 顧今信使不遠, 贈禮幣, 例用花紬, 倭人性偏, 雖代以大緞之美, 必以約條爲辭, 恐有生梗之端也。" 顯命曰: "事係交隣, 酌定市來宜矣。" 上曰: "始爲此禁, 蓋出惡奢之意, 則遠市奇衺之物, 助侈於隣國, 其可乎? 倭人商舟, 往來南京, 想或聞我之禁, 而我實無有, 代以他物, 我則有辭。 彼亦豈苛責乎? 今以此解禁書之史冊, 予恐見議於後世, 不特爲遠人所笑也。"


  •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32면
  • 【분류】
    인사(人事)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의생활(衣生活) / 출판(出版) / 사법(司法) / 무역(貿易) / 상업(商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