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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0월 7일 기사 1번째기사 1746년 청 건륭(乾隆) 11년

심육 외 9명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동양위 신익성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심육(沈錥)을 대사헌으로, 이양원(李養源)을 지평으로, 송명흠(宋明欽)을 자의로, 김약로(金若魯)를 공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을 집의로, 윤동준(尹東浚)을 사간으로, 이득종(李得宗)을 정언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수찬으로, 황경원(黃景源)을 교리로, 윤지태(尹志泰)를 필선으로 삼고,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증 영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충헌(忠憲)의 시호를,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에게 경헌(景憲)의 시호를, 증 이조 판서 박훈(朴薰)에게 문도(文度)의 시호를, 증 좌찬성 김식(金湜)에게 문의(文毅)의 시호를 내렸다. 이 때에 임금이 송인명의 시호를 곧장 의논하지 않는다고 누차에 걸쳐 칙료를 내리므로, 홍문관에서 문민(文敏)으로 올렸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春坊) 때부터 이미 충성이 드러났는데, ‘충’ 자의 시호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고 어필로 충민(忠敏)으로 고쳤는데, 뒤에 연신(筵臣)이 충민은 국조의 선휘(先諱)에 구애되는 바가 있다고 앙달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시호도 처음에 이 시호로 정하다가 선대에 구애가 되기 때문에 충경(忠敬)으로 고쳤다. 내가 과연 잊고 있었다."

하고, 시호 단자를 들여오라고 명하여 어필로 ‘민(敏)’ 자를 ‘헌(獻)’ 자로 고친 다음, 하교하기를,

"고 좌상의 시호를 이미 친히 썼기 때문에 준례에 따른 서경은 할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곧장 선시(宣諡)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2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己巳/以沈錥爲大司憲, 李養源爲持平, 宋明欽爲諮議, 金若魯爲工曹判書, 徐命臣爲執義, 尹東浚爲司諫, 李得宗爲正言, 閔百昌爲修撰, 黃景源爲校理, 尹志泰爲弼善, 賜東陽尉 申翊聖文忠, 贈領議政宋寅明忠憲, 吏曹判書鄭世規景憲, 贈吏曹判書朴薰文度, 贈左贊成金湜文毅。 時, 上以宋寅明之不卽議諡, 屢下飭敎, 弘文館擬以文敏, 上曰: "自爲春坊時已著其忠, 忠字之諡, 烏可已乎?" 以御筆改以忠敏, 後因筵臣以忠敏有礙於國朝先諱仰達, 上曰: " 然矣。 麟坪諡號初亦以此諡爲號, 礙於先代, 故改以忠敬。 予果忘之矣。" 命入諡單, 以御筆改敏爲憲, 敎曰: "故左相諡, 旣已親寫, 不可循例署經。 其令該曹, 卽爲宣諡。"


  • 【태백산사고본】 47책 6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225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